<-- 집에 원수를 들였다 -->
“재, 재판이라니요.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재판을 받아야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떨고 있었지만 내게 닿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 뿐. 애초에 이런 소문조차가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제롬의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오명을 쓰다니. 얼마나 큰 불명예인가.
“목소리 낮추세요, 레이디 세실리아.”
어느 귀부인이었다. 나를 흘겨보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는 경멸과 혐오가 섞여 있는 듯 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캐서린 화이트는 내 훌륭한 친구였죠. 그 여자는 강한 사람이었어요. 존경할 만한 여자였고, 똑똑한 여자였어요. 그래서 전 화이트 공작이 귀애했겠죠.”
다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올리비아 부인은 캐서린의 친구였지.
“그런 여자가 자살이라니. 난 믿지 못해.”
“동감이에요.”
그 귀부인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제롬 공작이 너무 자살이다 꽉 못박아놓아서 이의를 제기 못한 것 뿐이었지.”
“그러고 보니 사교계에서 당신 별명이 뭔지 알아요?”
그녀의 말에 귀부인 몇이 올라가는 입매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채를 파닥였다. 그때, 소피아 부인이 나섰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내가 총애하는 아이를 소개하려고 만든 자리인데 다들 너무하시는군요.”
그녀의 말에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다들 저를, 그리고 레이디 세실리아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군요. 아직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일이니 모두 이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도록 해요.”
나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감정을 절제하려 노력했다. 내 손이 분노로 떨렸다. 끔찍한 불명예이자 모욕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기분을 환기해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소피아 부인.”
나는 그리고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신들께서 정의로우사. 그 날 화이트 캐슬에서 상황을 목격한 시종인들이 많습니다.”
공기가 고요히 잦아들었다. 한참 떨리고 있는 내 속과는 달리, 목소리는 명료했다.
“요나단 경과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그 분과 직접 대화해 보지요.”
그때 소피아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내게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녀의 엄격한 눈이 내게 잘 대처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 그래요. 아직 모든 게 확실하지 않은데 이렇다 말하는 건 실례지요.”
“재판을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러고 보니 요나단 그 치는 항상 허풍을 떨기 좋아했죠.”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그 귀부인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아주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 뒤로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그 뒤로 호의적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부분 결혼에 대한 것이었다.
“신혼이라니, 얼마나 풋풋할 때겠어요.”
“제롬 공작을 닮을 아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여자아이면 사교계의 꽃이 될 것이요, 남자라면 뭇 여자들의 마음을 훔칠 미남이겠지요.”
“레이디 세실리아. 그 사람은 어떤가요? 얘기해줘요, 부디.”
나는 그 귀부인과 눈을 맞추고 웃어보였다.
“다정하세요. 아주. 하루하루가 행복하답니다.”
“어머, 역시나라니까요.”
“후계자 계획은 아직인가요, 레이디?”
“아직은 제가 아이를 갖는다는 게 준비가 안 되어서…….”
“그래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젊을 때 낳는 게 좋아요. 그게 편해.”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것은 순간이었다. 나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소피아 부인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가 직접 오해를 해명할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율리아의 정보력이 아니었으면, 소피아 부인의 친절이 아니었으면 일이 커질 뻔 했다.
소피아 부인이 내게 망신주려는 의도로 이 파티를 계획한 것이었다면, 그녀는 아까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지지해주었고 그게 상황을 바꾸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건 제롬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만큼, 더더욱. 시간은 빨리 흘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카밀리아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레이디?”
“그녀의 결혼식은 정말 아름다웠죠.”
“정말 친절하고, 상냥한 여자에요, 카밀리아는. 훌륭한 레이디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어요.”
카밀리아가 그린힐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모두에게 미소를 건넸다.
“저도 근황은 잘 모르겠지만, 에드거 경이 카밀리아 옆에 있으니 분명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해요. 물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동생을 키우셨다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귀부인 한 분이 눈물을 머금으면서까지 내 손을 잡아왔다.
“레이디 카밀리아가 그렇게 심성 고운 사람으로 자라난 건 다 레이디의 공이 커요.”
“이런 사람을 로징턴의 가시라고 불러왔다니. 레이디는 그냥 엄격한 거였겠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테이블의 끝에는 온화한 미소를 건네고 있는 소피아 부인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답례했다.
“과찬이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티파티는 썩 나쁘지 않게 끝났다. 나는 얼마나 소피아 부인에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굳이 소피아 부인과 혼자 남기를 기다렸다.
결국 그녀와 내가 혼자 남고, 시종이 문을 닫았을 때였다.
“잘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소피아 부인.”
“공작부인으로서 사교계 진출은 처음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걸 탐탁지 않아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역시 그런가요?”
“그래요.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위험하면서도 누구나 바랄만한 것이니까. 명심해요, 레이디. 정상에 있을수록 나락으로 떨어지기가 더 쉬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 숨을 내뱉었다. 큰 일이 끝나자마자 내 앞에 더 거대한 과제 하나가 놓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피아 부인이 조심스럽게 내 팔에 팔짱을 끼었다.
“걷죠, 레이디 세실리아.”
“네, 부인.”
“내 정원이 좋겠어요.”
그리고 나와 그녀는 정원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하늘, 우리를 미로처럼 둘러싸고 있는 푸른 녹음의 벽들. 나는 말없이 풀내음에 취해 소피아 부인과 보폭을 맞춰 걸었다.
“정말 훌륭한 정원이에요, 소피아 부인.”
“그리고 대화를 하기에 더욱 더 적절한 장소가 있을 수 없죠.”
그녀가 한결 편안하게 웃었다.
“이곳을 걷고 있는 사람은 당신과 나뿐이니.”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소피아 부인.”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놓았다. 소피아 부인이 나를 보았다.
“요나단 화이트 경과 무슨 악연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그 사람과는 그저께 처음 만났는데…….”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돈 것이 어제였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푼 것일까. 요나단 경이. 아니면 그가 정말 무언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게 다 그의 장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즘 재미있는 일도 없고, 당신이 화제의 중심이니만큼 오늘 즈음이면 온 율러의 사람들이 그 소문에 대해 알고 있겠군요.”
“말도 안돼요.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으니까요.”
소피아 부인이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이니, 거짓이니. 그런 건 사람들에게 문제되지 않는 일들이랍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겉으로 보이는 스토리죠. 스토리 그 자체.”
“만일 그게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침물하게 땅을 바라보며 걸었다. 아까도 감정에 매몰되어 이성을 잃을 뻔 했다. 남들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가십이었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정신이 그만 아찔할 정도로 아팠다.
“괜찮아질 거예요.”
소피아 부인이 미소지어주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언젠간 잊으니까. 자신의 삶보다 소중한 건 없죠. 그리고 그 삶에 매몰되면 다들 그 일에 대해 잊어요.”
나는 그저 걸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 별 거 아니었을 일이었겠지만 그게 지금이라 힘들었다. 율러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가 아니라, 내게 현재 가장 가까이 있는 고민거리라 힘들었다.
“몇몇은 기억하는 능력을 높게 친다만, 저는 망각이 있어 사람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망각은 아픔을 덮는 마약이고, 슬픔을 지워주는 바람이에요.”
그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흔들렸다. 소피아 부인이 미소지어보였다.
“사교계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기억하는 것 또한 잘해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잊는 것을 잘하는 것이랍니다. 실수는 남기고 아픔은 어서 잊어야겠지요.”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직감이, 이 일이 여기서 끝이 난 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직감이 무언가가 더 찾아오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가슴이 아리다.
“레이디는 잘 할 겁니다. 여태껏 잘 해왔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본다.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난다. 용기가 났다.
집에 돌아왔을 때엔, 제롬이 귀가할 시간이었다.
“그 이는 아직이니?”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예를 차리며 멀어졌다.
“그럼……. 혹시 요나단 경이 저택에 계신지 알아봐줄래?”
“계십니다.”
그녀가 깔끔히 답했다. 나는 계단 위를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하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나는 층계를 올라, 요나단이 머물고 있는 방을 안내받았다. 문 앞에서 나는 심호흡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침을 삼키고는 방문을 노크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나단 경. 안에 계신 건 알아요. 대화 좀 해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실내는 온통 불 하나 켜지 않아서 어두웠다. 나는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오한이 돋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는 인영을 발견했다. 그 인영 비슷한 것과 눈이 마주쳤을 때, 숨이 턱 막혔다. 실내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났고, 발에 무언가가 채여 내려다보니 술병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가 연기에 쩔어 있었던 공기가 마냥 텁텁했다. 입안에서 두려움으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인영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창문 사이로 비치는 환한 달빛이 그의 얼굴 반을 드러내 주었다. 어제 보았던 그 사람 좋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얼굴엔 냉소가 걸려 있었고, 시리도록 진하게 푸른 눈은 잔혹하게 반짝였다.
그가 손짓하자 촛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체는 아니었다. 방을 알아볼 정도로만 은은하게 켜진 촛불들이 어둠을 조금씩 밀어냈다.
두려워 말자. 두려워 말자. 난 할 수 있다. 다짐했다.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흑!”
그는 비웃음을 입에 걸고 나를 지나쳐, 문을 닫았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문이 잠겼다. 나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댔다. 문이 잠긴 것이었다.
“무, 문은 왜…….”
그가 어둠 속에서 미소지어보였다.
“우리 할 얘기가 있지?”
근사한 미소였다. 하지만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 노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