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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106화 (106/108)

<-- 빗속의 여인 [完] -->

마차가 멈춘 곳은 다시 세이지 궁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드디어 밤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밤은 무도회의 시작을 의미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무도회의 시작. 나는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롬.”

바람이 분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다. 그가 나를 눈에 담는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걸어갔지만, 그가 빨랐다. 저벅저벅 걸어와 나를 제 품에 넣는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인다.

“저도 그랬어요.”

그가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흔들린다.

“왜 그러셨습니까.”

“어떤 거를요?”

“거짓 증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다들 너무 친절하시네요. 사형수에게 거짓 증언이라니.”

“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레이디가 제 어머니를 독살하지 않은 건 알고 있습니다.”

제롬이 내 두 팔을 쥐고는 나를 바라본다.

“왜 그러시는 건지 몰라도, 저는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글쎄요.”

나는 뒤돈다. 그의 마차로 걸어간다.

“안 오세요?”

그를 바라본다. 그가 내게 빠른 보폭으로 다가온다.

“설령…….”

“네.”

“아닙니다.”

그가 쓴 웃음을 지었다.

“됐습니다.”

그가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시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마차에 나를 들였다. 그가 뒤따라 타고는 문을 닫는다.

마차가 움직인다. 나는 움직이는 차창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일이 어떤 방향으로 튈 수 있을지 내 주판을 튕겼다. 나는 독이 든 유리병을 쥐었던 내 손을 바라본다. 그 감촉, 검에 독을 부었을 때의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다.

오늘 밤 요나단의 거짓 유언장은 사실이 될 것이다. 그래, 그가 그 밤에 말했었지.

‘유서를 숨겨놨어. 네가 모를 어딘가에. 안전한 곳에. 그 유서는 내가 죽으면 정확히 하루 뒤에 세상에 드러날 거야. 그 유서에 뭐라 적혀 있게? 나를 죽인 것은 세실리아 화이……. 윽.’

그는 그의 말 그대로,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 그의 달콤한 트릭이 손해볼 것 없는 거래가 될 줄이야. 나는 내 발목에 단단히 묶여있는 서늘한 칼의 감촉을 느낀다. 그게 지독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설령 요나단을 죽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좋다. 제롬은 궁지에 놓인 나와, 세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흐리멍텅한 물고기 눈으로 세상의 급류에 휘말려 요나단에게 감정적으로 약점이 잡힌 채 인형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를 선택해 요나단과 그의 잔당들을 깨부술 것인가.

나는 내 자신을 파멸으로 내던졌지만, 제롬은 그 끝에서 나를 잡아줄 것이었다.

물론 제롬은 망설이겠지만, 내가 내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상황이라면 무언가 다를 것이다. 예정된 나의 죽음은 그의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줄 것이다. 계획이 생각보다 잘 맞아떨어져 미소지었다. 우리가 가진 완벽한 일상이 깨부숴진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올 거라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일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지금.

내 일상은 너무나도 취약해 그 완벽이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그렇다 해서 불안할 필요는 없었다. 완벽이 깨지면, 일상이 흐트러지면 그 뒤에 더 견고한 삶이 지어지니 말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망가진 일상도 다시 관성에 따라 제자리를 찾는다. 그때 남은 상흔은 흉터가 아니라, 더 단단하고 준비된 삶의 흔적이 된다.

그럼 내 앞에 펼쳐질 모험은 어느 쪽으로 나를 인도할까.

더 완벽한 내일일까, 파멸일까. 인생을 걸고 하는 도박이었다. 잭에게 배운 것이었다.

나는 상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제롬을 보며 물었다.

“무도회가 어디에서 열린다고 했죠?”

“제도에 있는 슐츠 가문의 성이었습니다.”

“아, 슐츠 가문 본가 말고, 제도에 있는 성을 말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슐츠 가문이 축제의 주최였구나. 왜 율리아가 말 안 해줬나 모르겠네. 나는 상념에 잠겼다.

“사람들 많이 오겠죠?”

제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슐츠 가문의 사람들과 요나단의 세력들은 분명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정말 성대한 파티겠네요.”

“그렇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

“제롬.”

그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행복하세요.”

그의 뺨을 쓸었다. 그가 제 손을 들어 그 위에 겹친다.

“그럴 겁니다.”

그가 내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럴 겁니다.”

그 때, 서서히 마차가 멈춰섰다.

* * *

와, 세상에.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곳은 바로 율리아가 살고 있는, 슐츠 가문의 성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무도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물론 블리시스에 있는 슐츠 본가보다는 덜 화려하다 들었지만 충분히 근사했다.

성채 벽에 여기저기 내걸려있는 크림슨 레드의 휘장. 내 친구의 집인데 어째서 나는 이곳에서 편안함이나 안온함을 찾을 수 없는 걸까. 왠지 몸의 촉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준다.

밤하늘을 바라본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조금만 있으면 슐츠 가문의 성 전역에 어둠이 깔릴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인다. 붉은 카펫 위를 밟고 성의 입구로 다가간다.

공기가 알싸하다. 왜일까.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끼.’

벽에 있는 이끼가 특이하다. 이끼가 성 벽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본다. 제롬이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 그가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초대장 보여주십시오.”

시종인이 우리의 앞을 막아선다. 그가 보이는 미소는 분명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분탓이려나. 나는 생각에 잠긴다. 순간 몸에 한기가 돋아 팔을 쓴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제롬이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긴다. 우리의 앞에 환한 빛무리가 펼쳐진다.

“제롬 화이트 공작 전하, 그리고 세실리아 화이트 공작부인께서 출입하십니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 순간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물든다. 나는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그 수십의 시선, 그리고 웅성임에 손이 그저 떨렸다. 무서웠다. 제롬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적막. 적막이 사람과 나와,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나는 제롬의 리드에 따라 계단을 천천히 밟고 내려왔다. 타박. 타박. 타박.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나는 그만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사람들 사이가 갈라진다. 나는 그 쪽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알았다.

“동생님, 제 신실한 벗이 주최하는 축제에 모습을 드러내주시다니요.”

그 사내가 킥킥대며 웃는다.

“요나단.”

제롬이 싸늘하게 마주한다. 요나단이 악마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있는 숙녀를 바라본다.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율리아.

“이 쪽은 오늘 이 화려한 파티의 주인공이자 주최자. 레이디 율리아 슐츠입니다.”

“아아.”

제롬이 삐딱하게 웃는다.

“만나서 참 영광입니다, 레이디.”

율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인사를 받지 않는다.

“안녕, 율리아.”

“그래.”

그녀는 싸늘하게 답했다.

“이런.”

요나단이 끼어든다.

“제 벗께서는 레이디 세실리아와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아, 세상에. 그러고 보니 시간이 이렇게 빠르군요. 처형식은 언제인가요?”

그의 농담에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나는 움츠러든다.

“요나단!”

“됐어요, 제롬. 실례하죠.”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제롬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다, 내가 그의 팔을 비교적 세게 당기자 그제서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는 달리, 요나단은 상황에 심취해 있었다.

“다시 음악을 연주하죠. 정말 좋은 밤 아닙니까!”

요나단 화이트가 두 팔을 번쩍 들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의 말에 음악이 다시 흘러나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제롬은 그런 나를 에스코트해 벽의 의자로 안내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 그냥.”

한 나라의 공작. 그리고 화이트 가문의 공작인 제롬과 공작부인인 내가 조롱당했다. 나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핀다. 내 처형을 주장했던 화이트 가문의 가신. 내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한 시종인들. 그 외 제롬의 권력의 독식을 싫어했던 타 귀족들.

그리고 율리아와, 요나단 화이트.

아주 적의 소굴에 걸어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훌륭했다. 시선이 느껴져 발코니를 바라본다. 위태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그니스가 있다.

아그니스가 이 장소에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로 요나단이 걸어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요나단이 아그니스에게 키스했다. 분명 보라고 하는 키스였다. 요나단과 아그니스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그 찰나의 순간 요나단과 내 눈이 마주친다.

그가 짓궂게 미소지어보인다. 나는 침묵한다.

키스가 끝나고 두 사람은 대화를 한다. 아그니스가 요나단에게 와인잔을 건넨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힌 뒤, 와인을 마셨다. 요나단은 가뿐히 잔을 비우고는 제멋대로 잔을 던진다. 나는 그 커플들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때 제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이디, 무슨 생각을…….”

제롬의 목소리가 옅어진다. 그 또한 발코니의 커플을 본 것이었다. 나는 순간 내 계획도 잊고 멍해져 그대로 가만 서있었다. 아그니스와 요나단,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아는 걸까. 내 기억대로라면 그들은 파티에서 잠깐 시간을 보낸 게 다일 텐데. 이대로라면 계획이 어긋날지도 모른다. 혼란스럽다.

“저, 잠시 공기 좀 쐬어야겠어요.”

“세실리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그 자리에서 넘어진다.

“어머, 실수.”

어느 귀부인이었다. 그리고 와하하 웃음이 쏟아진다.

“이것도 실수이려나.”

내 머리 위로 와인이 떨어진다. 나는 그대로 사고가 정지한 채 그 자리에 엎어져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제롬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지금 내 아내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실수였어요.”

귀부인이 앙큼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사과하십시오.”

“미안해요, 레이디 세실리아.”

그녀가 뒤돌았다.

“새 공작부인께 찬사를.”

완연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문다.

“모두 파티는 잘 즐기고 있으십니까.”

아그니스를 에스코트한 요나단이었다. 그가 나와, 제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은 와인에 젖어 온통 엉망이었고, 제롬은 침묵했다.

“저런. 레이디께서 바닥에 구르셔야 되겠습니까.”

요나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신이 멍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손을 무시했다. 그리고 내 다리에 숨겨둔 칼을 만지작거렸다.

“느리십니다.”

요나단의 발길질이었다. 다시 차가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한동안 사고가 정지했다. 너무 아프면 생각도 멈춘다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겨우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실내에 차가운 정적이 맴돌았다.

제롬이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게 너무나도 이상해서 등 뒤를 돌아보니 그는 기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의 쇼라도 되는 듯 재미있게 관조하고 있었다.

“제롬 공작의 시대는 갔습니다.”

요나단이 킬킬 웃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여러분, 제롬 공작은 저의 동생이지 않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습니다 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제롬.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요나단이 천천히, 여유를 부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골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되듯, 나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요나단이 입을 째며 웃어보인다.

“화이트 가문을 택해서 두 번 다시없을 훌륭한 사령관으로 거듭나던지.”

“제정신이신 겁니까.”

“아. 난 꽤 진심이야.”

요나단이 이죽거렸다. 그때, 나는 발목에 묶어둔 칼을 천천히 꺼내들었다. 검집에서 칼을 빼냈다. 독을 바른 검이었다. 나는 빠르게 요나단의 뒤로 달려 그의 목을…….

“아.”

스쳤다. 그리고 순간, 요나단이 내 어깨를 가격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실리아!”

이제 되었다. 생각보다 요나단을 죽이는 것은 간단했다. 나는 실소했다. 약효가 퍼지려면, 저렇게 10분만 두면 되었다. 10분. 상처에 스며들면 금방 사람을 잡아먹는 독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너무 일렀다. 바닥을 구르는 내 검을 요나단이 집어들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는데, 요나단이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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