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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108화 (완결) (108/108)

<-- 빗속의 여인 [完] -->

나는 그가 선하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 잭은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원하면 내 머리에라도 관을 씌워줄 남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랬다. 이 세상의 논리를, 선악을 깨부수고 나를 제 옆에 두었다. 이 세상을 제 정원으로 만들어 그 안에 나를 숨쉬게 한다.

행복하느냐 묻는다면, 그렇다. 이 곳이 어디든. 어느 세상이든. 나는 그와 함께 있었고, 그는 나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거면 되었다. 그거면. 나는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다만 다정한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물었다.

“자세히 얘기해줘요.”

“내막은 모르셔도 좋습니다.”

“슐츠 가문은 어쩌고요?”

“슐츠 후작은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따님을 멀리 카사로 제국의 귀족에게 시집보내셨죠. 어느 백작에게라고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레이디가 모르시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내가 살던 세상의 것 같지 않다. 내가 숨쉬는 공기가 내가 마시던 것 같지 않다. 내게 다가온 이 동화 같은 현실이 내 일상을 닮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로즈 가문의 세실리아가 아니었다. 제롬의 아내이자, 화이트 가문의 안주인. 나는 그에게 이 세상을 만들도록 촉구했다. 제롬을 부러 자극했다.

그러니까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선과 악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그를 이해할 사람은 나고, 이런 나를 수호할 사람은 그다. 그만이 내게 영원한 낙원을 선물해 줄 것이다. 끝나지 않는. 지속 가능한. 나는 그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의 옆에 서. 그렇게.

내가 친절하고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서 유감이다. 그저, 그렇다.

“요나단이 옳습니다. 저는 괴물입니다.”

그를 돌아보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더라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겠죠.”

“…….”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변할 수 없으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그가 내 이마에 경건히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당신은 저의 여왕일 것입니다.”

나는 그의 볼을 어루만진다.

“제롬.”

“예.”

“보여주시기로 약속했던 것.”

이 방으로부터 왼쪽으로 세 번째에 있던 그 방.

“저는 그 방에 가보고 싶어요.”

제롬이 움찔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차분히 풀어진다.

“진심입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는다. 나를 조심스레 안아든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댄다. 그 안에 무엇이 있다는 것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내게서 숨기고 있는 그의 이상이 있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그의 작은 부분, 부분까지. 그가 무엇에 그렇게 대단한 벽을 가지고 숨기는지. 무엇이 그를 가슴떨리게 하는지. 무엇이 그를 찬미하게 하는지. 무엇이 그를 매료시키는지.

나는 다 알고 싶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복도는 한산하다. 제롬의 걸음은 무언가 확신에 차 있다. 그는 나를 문 앞에 내려주고는 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고리에 넣어 돌린다. 문이 열린다.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문 안에서 포르말린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가 내게 손을 뻗는다. 나는 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방은 그야말로 고요에 젖어 있었고, 공기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투명해 멍하니 보면 날아다니는 먼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 안은 갈색의 빛으로 고딕. 그리고 습도는 높지 않다. 낡은 발코니에서 환하게 밀려들어오는 빛에 나는 그만 눈이 부셨다. 주위를 둘러본다.

벽지에 대해서 말하기는 힘들다. 벽에는 수많은 액자들이 빼곡히 벽을 메우고 걸려있었으니까.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그저 그것에 감탄하며 반짝이는 액자 뒤에 놓인 것을 훑었다. 나비였다. 박제된 나비.

수많은 박제된 나비가 벽에 걸려 화려했다. 하지만 무작위로 걸린 것은 아니라, 그것은 일정한 빛. 일정한 흐름으로, 방향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실내를 다 헤일 듯 둘러본다.

처음에 푸른 빛으로 시작했다, 초록 빛의 날개를 가진 나비, 그리고 연해져 노란 빛. 찬란한 노란 빛. 그리고 다시 주황의 빛, 진해져 열정처럼 타오르는 빨간 빛.

그 외에는 박제된 동물도 있다. 나는 그대로 박제된 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본다. 시간이 그저 정지된 것만 같다. 나는 조용히 유리구슬같은 곰의 두 눈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몸을 기울여 호기심어린 눈을 반짝이는 내가 있다.

“수집품들입니다.”

낮은 제롬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본다. 그가 수줍게 웃어보인다.

“어릴 적부터 취미였습니다. 순간을 잡아두는 것은 항상 아름다운 일이니.”

“정성을 들이셨군요.”

“그랬습니다. 애정하지 않는 것이 없죠.”

나는 천천히 방을 걷는다. 애정을 쏟는 것 치고는 바닥에 먼지가 뒹굴기에 제롬을 바라보았다.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떼면 바닥 목재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그런 것 치고는 관리가 부실하네요.”

“저를 제외한 아무도 이곳에 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그가 내게 천천히 걸어온다. 나는 그를 올려다본다.

“그럼 제가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 첫 번째 사람이겠네요.”

“첫번째이자 마지막 사람일 겁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요.”

“아이들.”

그가 나를 품에 넣는다.

“좋습니다. 우리의 아이들.”

“제롬.”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와 있으면 늘, 그와 나뿐만이 세상에 남은 것 같다.

“계속 살아가세요. 계속, 그 자리에 굳건히 서 계셔야 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래야 당신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뛰어놀 수 있으니까. 제롬은 무너지면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내 손에 입을 맞춘다. 경건한 입맞춤.

“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도 그런 이유가 없지는 않았어요.”

나는 뒤를 돌아 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나비를 발견한다. 푸른 날개를 가진, 아주 아름다운 나비. 나는 매료되어 그 액자 위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본다.

“아름답습니까?”

“그래요.”

투명한 액자가 반짝인다. 그 반짝임에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제롬의 잔상이 있다.

“저는 이곳을 ‘생명의 방’ 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빼앗긴 것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모아놓는 방이죠.”

“그 흔적들이 당신을 기쁘게 하나요?”

“아닙니다.”

그는 도리어 쓰게 웃었다.

“잊지 않게 해 줍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완강하다.

“불의 언어는 위험합니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소멸하는 마법이니 말입니다. 저는 이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제게 귀속된 화염이라는 마귀를.”

그의 눈에는 쓰디쓴 과거의 흔적이 묻어있다. 숨이라도 멎은 것 같이, 나는 그를 바라본다.

“삶은 생동하고, 수많은 가능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 자체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이 나비는 아름답지만 살아숨쉴 수 없습니다. 그게 이 나비에게 닥친 가장 큰 비극이죠.”

벽에 걸린 나비를 보는 그의 눈이 애틋하게 일그러진다.

“그래서 이 나비는 흙이 묻은 나비보다도, 날개가 찢겨 볼품없게 된 나비보다도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박제된 나비는 더 이상 생동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가 낮게 웃는다.

“비참한 삶, 성공한 삶, 실패해 넘어지는 삶,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 모두 생명입니다. 기쁘고 슬프고 사랑하고 기쁘기 때문에 그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고독과 비극 속에서도 숭고하다 불리는 작품이 태어났죠. 저는 그 사실을 존중합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내 두 손을 꼭 잡는다.

“그래서 저는 이 방에 올 때마다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게 된다고. 그리고 반성합니다.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래서 그가 강경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조심스레 제 힘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괴물이라는 제 형의 평가에서, 세상의 평가에서 멀어지려 노력했던 것이었다.

그 사상이 그에게로 하여금 디어뮈르 전쟁에서의 제 모습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고통스럽게 했던 모양이었다.

“제 힘을 남용한 것이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 신념을 넘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마워요.”

“당신만이 제 행복입니다. 찬란한 빛입니다.”

그가 내 이마에, 볼에, 목에. 그리고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춘다. 나는 마음 속에 무언가가 충족되는 기분을 느끼며 그의 목에 두 팔을 감는다.

그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을 훑는다. 우리의 눈빛이 마주친다.

“제 생의 빛깔을 채워 주신 건 당신입니다.”

그가 미소짓는다.

“제 생에 색채가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울고 있었다. 저 남자라면, 저 남자의 품에서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의 옆에서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다. 서로의 공백을 파고들어 서로에게 지독하게 스며들기에 우리는 완전하다.

“이 방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바로 특별한 보석입니다. 저희 선조는 그걸 피처럼 붉어 ‘드래곤블러드’라 이름지었습니다.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제롬이 단정하게 미소짓는다.

“보석의 뜻은, 불의 힘이 모든 것을 파괴할지라도 그 속에 삶이 있을지라. 그야말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화염의 마법이 통하지 않게끔 하는 특별한 보석입니다.”

그가 구석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그런 특별한 보석을 눈으로 직접 볼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제롬이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는 비어 있었다.

“……상자가 비어 있어요.”

“그렇습니다.”

“잃어버리신 것 같은데…….”

제롬이 웃는다.

“당신이 끼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내려 내 손을 바라본다. 손에 끼워진 새빨간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 반지. 노아가 탐내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노아는 마르사의 궁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 반지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었다.

“당신이 물의 언어술사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언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반지 위에 입을 맞춘다.

“지켜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번 결혼식이 성대하지 못했기에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레이디.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거 프로포즈인가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세 번째 프로포즈죠.”

“좋아요.”

나는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그가 미소로 화답했다. 우리는 발코니로 걸어간다. 그와 내가 보는 것은 탁 트인, 웨스트체셔의 전경이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제롬.”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지어보인다.

“이거 봐요. 당신한테 보여줄 게 있어요.”

내가 다시 마른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이 끼고 천천히 공기가 싸늘해진다. 제롬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정신을 하늘에 집중했다. 내가 눈을 감자 빗내음이 콧 속으로 밀려든다. 그리고 다시 눈이 떴을 때, 하늘에서 비가 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와 함께 비가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쥔 그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잡았다. 체온이 전해져온다.

어쩌면 결혼은 인생 2막이라는 말도 있다. 특히 율러 왕국에서는 더 그렇다. 제 소녀시절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새로운 가문의 사람이 되어 그 규범과 격식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니까.

나는 그리고 이 사람을 택했다. 이 사람은 나를 택했다.

그는 삶이 생동하기에 그 자체로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한다. 그러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함께 이겨낼 것이다. 그리고 함께. 하나 되어 서로의 삶의 등불이 되어줄 것이었다.

새 삶. 새로운 선택. 새로운 일들. 변화와 모험.

내일이 있기에, 다양한 빛깔의 내일이 있기에 오늘이 이렇게 특별해지는 것일까. 항상 귀를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며 내일의 삶을 찾아나가자. 왜냐하면.

당신도 당신의 삶이라는 어느 이야기의 주인공이니까.

그저 그것을 여태껏 모르고만 있었는지도 모르니까.

〈FIN.〉

========== 작품 후기 ==========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주인공들께 바칩니다.

-작가 바람닮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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