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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27화 (27/200)

27.

‘저 늙은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당혹감도 잠시뿐.

난 두 명의 성기사에게 붙들려 있는 아크 교수를 보며 생각을 이어 갔다.

‘꼬락서니를 보니 좋은 대접 받으면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아, 설마 아크 신관장이 흑카데미의 교수라는 사실이 까발려져서 그런가?’

고문실에 있던 두 학생들이 고문을 받으며.

아크 교수의 존재도 홀라당 내뱉었을 확률이 높았다.

‘아크 교수가 흑카데미의 교수라는 정보를 입수한 상황에서 만약 아크 교수가 신전을 방문했거나 성기사의 눈에 띄었던 거라면… 지금 상황도 말이 돼.’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허허, 내가 비록 후임에게 자리를 넘겼다곤 하나 한때는 레바논을 섬기던 신관장이었네. 그런데도 자네들은 날 가두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희는 명령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내려가시지요, 아크 신관장님.”

“허허…….”

아크 교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내 옆을 지나친다.

‘후…….’

아크 교수가 계단을 타고 고문실로 내려가자.

난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만약 방금 복면을 벗어 버렸다면… 가관이었겠네.’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신관님?”

내가 걸음을 멈췄던 탓인지.

수녀가 조심스럽게 날 부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아크 교수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난 복면을 벗은 채로 지하층을 벗어났다.

“갈프 신관, 잠시 와 보겠나?”

다시 신전 위로 올라가니.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말카 신관장이 조용히 날 부른다.

‘…뭐지?’

난 영문을 모른 채 그의 집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어쩐 일로 찾으신 건지…….”

“일단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 솔직히 자네의 말은 믿기 어려운 점이 많았어. 물론 자네가 신실한 신관이라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대거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면,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말카 신관장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뗀다.

“하지만 자네의 말은 사실이었어. 정말 큰일을 해 줬네. 자네가 없었다면 흑마법사들의 침입은 물론이고 변절자도 찾아낼 수 없었겠지.”

“…변절자요?”

“아크 신관장이라고 아나?”

말카 신관장의 물음에 난 속으로 피식 실소했다.

‘알다마다. 아침마다 그 새끼의 주도하에 예배를 드리는데 모를 수가 있나.’

하지만 난 모른 척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반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신관이신데도 불구하고 흑마법사들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레바논 님을 섬기는 신관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흑카데미에서야 순교에 미친 늙은이일 뿐이지만, 적어도 레바논 왕국에선 그렇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콘스 교수의 말에 의하면.

그는 신관이기도 했으나 흑마법사들과의 전투에도 숱하게 참전했다고 했었다.

‘신관 출신인데도 성기사 뺨치는 피지컬로 흑마법사를 때려잡았다고 그랬었지. 하긴… 이곳의 신관들이 메이스를 휘두를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 미친 늙은이가 이상한 거지.’

“맞네. 비록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했다고 해도 대단하신 분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그분은 왜 언급을… 설마…….”

내가 모른 척 말꼬리를 흘리자.

말카 신관장이 씁쓸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지금 나는 아크 신관장이 레바논을 저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네.”

“예? 그게 무슨…….”

“잡혀 온 흑마법사들은 자기들이 흑마법사 아카데미의 학생들이라 하더군. 아크 신관장은 그곳에서 교수 노릇을 하고 있었고 말이야.”

말카 신관장의 말에 난 놀란 척 크게 눈을 떴다.

“그래서 아크 신관장이 고문실로 가던 거였습니까?”

“봤었나? 잡혀 온 흑마법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그라트니 요새에 있던 것도 마냥 우연의 일치라고만은 볼 수가 없게 됐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고요.”

나의 말에 말카 신관장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솔직하게 말하면 잡혀 온 흑마법사들의 거짓말이길 바라고 있어.”

“아크 신관장의 신성력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그가 정말 레바논을 저버린 것이라면 신성력에도 문제가 생겼을 것 같은데요.”

“확인해 봤네. 그러니 더 혼란스러운 거네. 레바논 님께선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는데 그는 흑마법사들의 교수가 됐다고 하니. 후…….”

말카 신관장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더니 토해 내듯 말한다.

‘정말 아크 교수가 변절자라고 하면 납득할 수가 없겠지.’

만약 아크 교수가 정말 변절자라고 판명이 나거든.

그들이 알고 있던 상식, 변절자는 ‘신성력을 회수당한다’라는 상식이 어긋나는 셈이 될 테니까.

“조금 있다가 그를 심문하면 좋든 나쁘든 결과가 나오겠지.”

“그렇습니까?”

‘아크 교수를 심문한다고?’

그건 내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한편으론 작은 아쉬움도 들었다.

‘아크 교수 정도면 학생들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겠지. 거기다가 그놈만 이 그라트니 요새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고 있을 것 아냐?’

하지만 난 이 신전에 있어 이방인에 불과하다.

‘참관하고 싶긴 한데 부탁한다고 들어줄까? 괜히 의심만 사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물을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자네도 참관하겠나?”

말카 신관장이 나지막이 물어 온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레바논 님께서 자네에게 꿈을 보여 주신 덕에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네. 그러니 자네도 참관하는 게 맞지 않겠나?”

‘그렇게 하면 나야 좋지.’

그러나 아크 교수와 얼굴을 맞닥뜨리는 건 사절이다.

‘괜히 얼굴만 까발려지고 아크 교수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아카데미에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충분히 예상이 간다.

‘복면을 쓴 채로 참관하면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적당한 변명거리가 없으려나?’

난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참관하지요.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저는 복면을 쓴 채로 참관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요청에 말카 신관장이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본다.

“굳이 얼굴을 가릴 이유가 있나?”

“저 역시 아크 신관장이 변절자가 아닐 거라 믿고 또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크 교수가 정말 레바논 님의 뜻을 저버렸을 경우도 대비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가 변절자임에도 신전에서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크 신관장을 풀어 준다면 내가 그의 위협을 받게 되리라는 걸 돌려서 말하자.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자네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일 테지.”

말카 신관장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 자네는 복면을 쓰고 참관하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 *

그날 저녁.

그라트니 신전의 지하 고문실 안.

‘전직 신관장이어서 조금은 봐줄 줄 알았는데 얄짤없구나.’

나는 넝마자락이 된 아크 신관장을 보며.

기분이 좋으면서도 새삼 레바논교가 냉정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사실입니까?”

“허허, 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건가?”

아크 교수의 굳은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간다.

“선배님께서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모종의 의식을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의 물음에 아크 교수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젓는다.

“만약 그랬다면 레바논 님께서 날 가만 놔두셨을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무고하네.”

“음…….”

‘무고하긴. 그런 놈이 좋다고 흑마법사들에게 성마법을 가르치고 순교시킨답시고 하인들을 학살하냐?’

나도 그렇지만 아크 교수의 낯짝도 어지간히 두터운 모양이다.

“선배님, 한번 고문이 시작되면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요.”

“허허, 내게 고문을 가한다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네.”

말카 신관장이 쉽사리 반문하지 못하자.

‘가만히 놔두면 당연히 거짓말만 늘어놓겠지. 뭘 망설이고 있어? 그냥 고문해!’

난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바라봤다.

‘어우 이 답답한 놈아. 신관들에겐 마인드 브레이커 같은 마법이 없는 건가?’

“할 수 없지요. 진실을 말하시기 전까지는 계속 이 방에 머무르셔야 할 겁니다.”

말카 신관장이 이단 심문관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고문 도구를 든 채 고개를 좌우로 투둑 꺾는다.

“저도 이런 상황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배님께서 고집을 부리시니 어쩔 수…….”

“자네는 레바논 님을 위해 산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아크 신관장의 물음에 말카 신관장이 천천히 입술을 뗀다.

“그야 레바논 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그 뜻에 반하는 악의 종자들을 소멸하는 것이겠지요.”

“허허, 맞네. 그럼 하나 더 묻지. 만약 악의 종자들이 전부 소멸되고 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당연히 평화가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말카 신관장의 대답이 끝나자.

“으허허허허허허허!”

아크 신관장은 재미있다는 듯 폭소한다.

“뭐가 그렇게 우스우신 겁니까?”

“정말 평화가 도래할 것 같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카 신관장의 대답에 아크 교수가 고개를 젓는다.

“자네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어.”

“제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요?”

“자네 말대로 정말 검은 대지에 살고 있는 극악무도한 존재들을 모두 처리했다고 치세. 그럼 정말 평화가 찾아올 것 같나?”

말카 신관장이 선뜻 답하지 못하자.

아크 교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그럼 평화가 찾아왔다고 가정해 보지. 그럼 우리 레바논 왕국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사람들이 과연 레바논을 믿으려고 할까? 시련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겠나?”

“고통을 겪지 않아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레바논 왕국은 어떨까? 사람들이 전부 행복한데 과연 누가 레바논을 찾을까. 누가 레바논을 부르짖으며 그를 필요로 하겠냐 이 말이네.”

아크 신관장이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툭 한마디를 던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레바논을 찾지 않게 될 거네. 자기가 필요할 때만 부르짖고 조금만 편안해져도 그의 사랑을 외면하는 게 사람이고, 사람이란 그런 존재야.”

“그건…….”

“말카 신관장, 어둠이 있어야 빛도 존재할 수 있는 거네.”

아크 교수의 말이 끝나자.

‘뭐… 그래도 신관장 출신이라 그런지 아주 틀린 말을 하진 않네.’

흑마법사들이 존재하기에 레바논 왕국이라는 구심점이 생겼을 테니까.

‘순교에 미친 놈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하지만 아크 교수는 내게 있어 그저 미친 신관장일 뿐이었다.

‘그보다 아크 신관장이 저런 말을 했다는 건… 자기가 흑마법사와 결탁했다는 걸 스스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내가 의문을 감추지 못하던 사이.

말카 신관장이 처연하게 웃는다.

“그래서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으신 겁니까?”

“허허, 정확힌 어둠을 키우려고 했지. 그래야 빛도 더 강해질 테니까.”

“선배님은… 틀리셨습니다. 옳지 못한 방법을 이용해 왕국과 교단의 세력을 확장한다고 한들, 레바논 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보십니까?”

아크 교수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린다.

“그분의 감정을 한낱 사람일 뿐인 내가 알 수는 없네. 하지만 아직 내 몸에 있는 신성력이 뭘 의미하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겠나?”

“…….”

말카 신관장이 답하지 않자 고문실 안에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던 그때.

아크 교수가 뜬금없는 질문을 툭 던진다.

“그보다 아직 그라트니 신전에 정화의 성배는 잘 있나?”

“그건… 선배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잠깐이지만 말카 신관장이 망설임을 보이고 답하자.

어째선지 아크 교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허허, 대답이 됐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이제 돌아가야겠어.”

“그게 무슨…….”

“흡!”

투득-

갑자기 아크 신관장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힘없이 끊어지고.

‘…미친?’

“무슨…….”

말카 신관장과 이단 심문관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크 교수가 고문용으로 놔둔 것으로 보이는 작은 단검을 들었다.

서걱-

“어… 어어…….”

“레바논 님께서 내게 참으로 무거운 짐을 지우셨구나…….”

말카 신관장이 목을 부여잡고 천천히 쓰러지는 가운데.

아크 신관장이 씁쓸히 웃으며 나지막이 말한다.

“자네를 기억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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