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39화 (39/200)

39.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흑남님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 저를 용서하십쇼……!”

‘이 늙다리… 태세 전환 봐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조롱하려고 했던 놈이.

이렇게 태도 변화가 빠를 줄이야.

‘하긴… 악마학파에 있어 대악마가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태도가 바뀔 수가 있나?’

어떻게 보면 달프 교수의 처세술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대악마는 악마학파에 몸담은 흑마법사들의 염원이자 비원일 테니까.

“하하, 일어나시지요.”

“절… 용서해 주시는 겝니까?”

“용서할 게 어디에 있습니까? 애당초 달프 교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펠기누스와의 계약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얼굴에 훈훈한 미소를 그리자.

“오오… 이렇게 관대하실 수가…….”

달프 교수는 감격하여 재차 머리를 바닥에 처박는다.

‘내 참…….’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찰나.

달프 교수가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저, 달프! 앞으로 이 늙은이의 몸이 부서질 때까지 흑남님에게 악마학을 가르치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뭐… 좋게 봐 주는 건 좋은데 이제는 좀 무섭다, 야.’

나는 번들거리는 눈빛을 뿜는 달프 교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악마들에 대해 아는 게 부족하니 교수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달프 교수가 펠기누스에 대해 좀 아는 것 같으니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는 게 좋겠네.’

“배려라니요?! 언제든 말씀만 하시지요! 이 달프, 바로 흑남님을 찾아뵙겠습니다!”

“하하…….”

“그리고 너희!”

고개를 돌려 학생들에게 소리치는 달프 교수.

“너희! 모두 오늘을 잊지 말거라! 다시는 대악마님을 뵐 일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펠기누스… 펠기누스라니……. 내가 살아생전에 그 타락한 전쟁의 신을 목도할 줄이야…….”

달프 교수가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라는 말을 던지곤.

휘청거리며 교실을 나가자.

“음… 크흠…….”

학생들은 슬쩍슬쩍 나를 바라본다.

하나 그 누구도 감히 내게 말을 붙이는 학생은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이지.’

얼마 전까지 하인 취급 하던 놈이 갑자기 흑남이 된 데 이어.

대악마 펠기누스와 계약까지 끝마쳤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할 터.

‘굳이 내가 먼저 다가갈 필요는 없지.’

나를 부려 먹던 놈들과 친구놀이 같은 걸 한다?

우스운 일이다.

‘어디 보자… 다음은 뭘 좀 배워 볼까. 확실히 겉다리로 듣는 것보다 직접 수업을 참관하는 게 더 도움이 되긴 하는데…….’

어차피 수업 시간은 꿰고 있으니.

적당히 듣고 싶은 수업이 있으면 흑남의 권위를 이용하여 참관하면 될 것이다.

‘하… 수업도 좋긴 한데, 좀 더 확실하게 힘을 키워야 하는데…….’

바알의 암살자들이 나를 공격할 것이라던 베논의 신탁.

그 경고가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베논이 내게 직접 말을 했을 정도면 보통 강한 놈들이 아니겠지.’

비록 지금은 흑카데미 안에 있다고는 해도.

이곳이 마냥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었다.

‘만약 바알의 암살자들이 날 습격해 오면 과연 교수들은 나를 지켜 주려 할까?’

아니.

다들 제 살길을 찾아 도망을 갈 게 뻔하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야.’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힘을 키워야만 할 터.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교수들의 수업은 부족했던 나의 지식을 채워 주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단기간에 힘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할 터.

‘악행을 저지르긴 해야겠는데…….’

마신 베논이 내게 준 축복.

흑카데미에서 악행을 저지르면 흑마력이 3배 상승하는 바람직한 축복을 활용해야만 할 터.

‘하지만 악행이라는 게 정말 그런 행동일 줄은 몰랐는데…….’

마신의 축복을 받은 뒤.

나는 내 나름대로 악행의 기준을 찾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고 나름의 소득을 얻었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흑카데미의 번영이라니…….’

내가 한 행동들이 흑카데미에 득이 되는 행동이라면.

흑마력이 올랐다.

‘물론 엄청 좋은 일이야. 좋은 일이지.’

남들은 흑마력을 올리기 위해 발버둥 칠 때.

나는 그저 약간의 행동만으로 흑마력을 얻을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아주 내지키는 않아.’

5년간 지옥과도 같았던 삶을 제공한 흑카데미를 이제는 내 손으로 번영시켜야 한다는 게.

솔직히 썩 내키지만은 않았다.

‘아오…….’

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은 기억은 없어도 나름 눈치를 키우고 사회생활 하는 데 도움이 됐잖아? 거기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날 지켜 주는 장소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흑카데미가 좀 번영하면 어때? 난 흑남인데.’

결국 나의 이성이 승리를 거머쥐자.

나는 냉정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확실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그래… 그런 방법은 어떨까!’

곧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볼드 학장의 집무실 안.

“그러니까… 흑남님께서는 흑카데미의 부지 일부를 원하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분명 흑카데미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머리의 학장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부지는 어디에다 사용을 하려고 하시는지…….”

“그 부지 위에 상점을 하나 설립할까 합니다.”

“상점… 말입니까?”

볼드 학장이 눈썹을 찌푸린 채 묻는다.

“상점이 어떻게 흑카데미에 도움이 된다는 겁니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애당초 학생들은 학기 중에는 바깥으로 잘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학업에서 오는 부담감을 해소할 수도 없지요.”

“학생들은 학업에만 열중하면 됩니다.”

볼드 학장의 단호한 발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게 제일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뛰는 말에게 계속 채찍질만 가하면 말이 잘 뛸 수 있겠습니까? 때에 따라 적절하게 당근도 줘야겠죠.”

“흑남님의 말씀은… 그 상점이 학생들에게 당근이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저는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의 단호한 발언 때문일까.

볼드 학장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응시한다.

“흑남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수락하시는…….”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널리고 널린 게 땅인데 문제가 될 게 있다고?’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겁니까?”

“제가 흑카데미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고는 있습니다만, 흑카데미는 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아?’

“하하, 그렇겠지요. 결국 흑카데미는 흑탑에 소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기도 합니다만, 애당초 흑카데미가 건립될 당시 이 땅을 빌려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실질적으로 흑카데미의 주인이라 봐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관리인이니 땅을 쓰고 싶거든 땅 주인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이게 무슨 신박한 개소리인지 웃음만 나온다.

“그렇습니까? 그럼 한 가지 묻지요. 흑카데미에 건물을 올릴 때마다 그 주인이라는 사람에게 허락을 맡고 올리는 거였습니까?”

“예, 모두 그분께 보고를 올린 뒤 일을 진행했습니다.”

‘정말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거짓말인지 가늠이 안 되네.’

“…정말입니까?”

“믿기 어려우시다면 여기 양피지를 보시겠습니까? 제가 그분께 보고했던 것들입니다.”

볼드 학장이 내게 양피지 몇 장을 내밀자.

나는 그것을 낚아채어 안을 살폈다.

‘허… 이게 진짜라고?’

나는 조금은 연민이 담긴 눈으로 볼드 학장을 바라봤다.

‘하인 생활을 할 때는 그래도 네가 최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도 관리인이었구나?’

내가 양피지들을 넘기던 그때.

‘이건…….’

난 양피지 구석에서 비교적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부지를 빌려준 사람이라고?’

“학장님, 부지를 빌려준 사람이… 부탑주님이었습니까?”

“예, 레논 부탑주님께서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음…….”

레논 부탑주.

세 명의 부탑주 중 한 명이자 악마학파의 거두인 남자였다.

‘이곳에선 레나의 아버지로 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즉, 부지를 사용하려면 부탑주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어지간하면 수락을 하실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그럼 한번 양피지를 작성해서 부탑주님께 전달해 보겠습니다. 아마 내일이면 답이 올 겁니다.”

* * *

다음 날.

“흑남님, 부탑주님의 서신이 왔습니다.”

“오, 빨리 왔군요.”

나는 볼드 학장이 내민 양피지를 받아 내용을 살폈다.

‘음…….’

꽤나 잡설이 길긴 했으나 서신이 말하는 바는 딱 한 가지였다.

‘불가능하다고?’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볼드 학장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거절당하신 겁니까?”

“네.”

“웬만하면 전부 허락을 하시는 분인데……. 한 번 더 서신을 보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불가.’

허락할 수 없다는 서신이 내 앞으로 전달됐을 뿐이었다.

‘아니… 대체 안 된다는 이유가 뭔데? 그 양반… 날 싫어하나?’

나를 싫어할 건수를 만든 기억이 없다.

근데 날 싫어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아무래도 레논 부탑주님께서 절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모양인데, 이유를 아십니까?”

“그건… 아무래도 레나가 흑남이 되지 못한 것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설마 이 늙다리가… 자기 딸이 흑남이 되지 못해서 꼬장을 부리는 건가?’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예, 여태껏 그렇게 해 왔던지라…….”

다른 방법은 없다는 학장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흠…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 * *

다음 날.

“…그들이 만든 키메라도 결국 어디서 파생된 거죠? 우리가 만든 언데드들에서 파생된 거랍니다. 가지만 다를 뿐이지 결국 백마법사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어요. 그들은 굉장히 역겨운 종자들이랍니다. 아시겠나요?”

역사학, 개중에서도 ‘백마법사들의 이중적인 생활’을 가르치는 파스칼 교수.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고들 했어요.”

파스칼 교수가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낀 채 교실을 빠져나간다.

‘어떻게 해야 부탑주에게서 땅을 빌릴 수 있을까…….’

내가 역사학 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어제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레나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는다.

‘어제 그거라면… 대악마를 소환한 것 말인가? 악마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

아무래도 악마학파의 거두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였다.

‘그보다… 학생에게까지 존칭을 사용할 필요는 없겠지?’

교수야 나이도 지긋하니 나름대로 존칭을 사용했다지만.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지위적으로 낮은 녀석들에게 더 이상 존칭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터.

“뭐가?”

“…….”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어떻게 아무런 피해도 안 입고 대악마와의 계약을 성공할 수 있었던 거냐고!”

힘겹게 질문을 내뱉는다.

‘그냥 하니까 되던데? 하지만 내가 사실을 말해도 안 믿겠지.’

“운이 좋았지.”

그렇기에 나는 적당히 에둘러 말하곤 자리를 뜨려 했으나.

“잠깐 기다려!”

그녀는 한사코 내 앞을 막더니 힘겹게 입을 뗀다.

“…나 좀 도와줘.”

“뭐?”

“내가 아몬과 계약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아몬의 팔만 꺼낸 이후로 발전이 없었던 건가?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거지? 펠기누스를 보고 눈이 돌아갔나?’

설마 내가 엄청난 비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뭐, 설령 내가 뭔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알려 줄 생각도 없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대차게 깐 판국에 내가 그녀를 도와줘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는데?”

“…뭐?”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그녀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건… 작은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아니. 네게는 작은 조언조차 아까워.”

“…….”

나의 매몰찬 거절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진다.

“네놈! 레나 님께 그게 무슨 무례한 발언이냐!”

옆에 있던 남학생이 내게 쏘아붙이듯 묻자.

“무례? 애당초 무례는 저쪽에서 저질렀는데?”

나는 레나를 가리키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례를 저질렀다고?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너는 잘 모르겠지만 레논 부탑주님은 아마 답을 아실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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