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44화 (44/200)

44.

레나의 대악마 소환을 도운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고.

“후… 이제 겨우 다 끝났네. 어때? 잘 본 것 같아?”

“잘 보긴, 낙제점이나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오! 콘스 교수 그 개같은 년! 부패학의 역사를 어떻게 다 외우냐고!”

이 일주일 사이 학생들의 성적과 미래를 결정하는 시험이 끝났다.

“후… 점수가 잘 나와야 할 텐데…….”

“난 다음 학기 때도 흑카지노에 가야 된다고!”

“지금 가자. 이제 요 며칠간 할 것도 없잖아?”

모두 풀어진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과 달리.

“후우…….”

어째선지 교수들의 회의실 안에서는 무거운 분위기만이 흐른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예상 밖이라는 말 말고는 할 수가 없네요.”

콘스 교수가 허탈하다는 듯 웃자.

옆에 있던 파스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왜 애들 성적이 전반적으로 상향한 거죠? 이런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짐작이 가시는 분은 없으신가요?”

“허허, 그만큼 학생들이 학업에 집중했다고 봐야겠지요.”

아크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콘스 교수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본다.

“집중했다고 단기간에 이렇게 성적이 상향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허허, 안 될 건 또 뭐 있겠습니까? 편협한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콘스 교수님.”

“뭐라고요?! 그럼 제 시야가 좁다는 건가요?!”

콘스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던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볼드 학장이 안으로 들어온다.

“채점은 끝났을 테니 한 명씩 보고할 수 있도록.”

“부패학은… 하아… 일부 학업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을 빼면 거의 성적이 상향됐어요. 등급을 매기는 게 까다로울 정도로 말이죠.”

“허허, 성마법도 그렇습니다. 학생들의 열의가 높아서 그런지 다들 좋은 성적을 거뒀지요.”

교수들이 하나같이 학생들의 성적이 올랐다고 평가하자.

볼드 학장의 미간이 좌우로 꿈틀거린다.

“성적이… 올랐다고?”

“네, 저희도 희한할 정도예요. 원래 실기 수업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 성적이 높게 나온 적은 드물었으니까요.”

“이유는?”

볼드 학장의 물음에 그 어떤 교수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정신 못 차리던 놈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걸지도 모르죠.”

“아니면 가문에서 채칙찔을 가했을 수도 있고요.”

교수들이 저마다 생각한 가정을 던지던 그때.

“으허허허허, 저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달프 교수가 웃으며 소리친다.

“달프 교수님, 이유를 아신다고요?”

“아주 잘 알지요. 그건 바로 흑남님께서 만드신 매점과 흑카지노 때문입니다.”

“…네?”

교수들의 표정에 물음표가 걸리던 찰나.

콘스 교수가 얼굴을 찌푸린 채 묻는다.

“달프 교수님, 용병들이나 갈 법한 도박장 때문에 학생들의 성적이 향상됐다고요?”

“허허…….”

교수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자.

달프 교수는 단호히 소리친다.

“제 수업에서 항상 졸던 놈들이 갑자기 책을 펴고 공부를 하던 탓에 저도 궁금해서 녀석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대답이 뭔지 아십니까?”

“뭡니까?”

“그건 바로 흑카지노에서 귀족 등급 이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더군요.”

“…예? 귀족… 등급이요? 그게 뭡니까?”

도박장이라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일까.

흑카지노에 발도 딛지 않았던 일부 교수들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흑카지노에서만 통용되는 등급이라던데, 등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고 하더군요. 아, 참고로 그 등급은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바뀐다고 합니다.”

“아니… 등급이 높으면 뭐가 좋은 겁니까? 좋은 게 있긴 합니까?”

“으허허허허, 있지요!”

입을 한 번 침으로 적시곤 말을 이어 가는 달프 교수.

“듣자 하니 귀족 등급 이상부터는 매번 추첨을 통해 어마어마한 보상까지 준다고 합디다. 이번에는 흑탑 근처에 있는 저택을 보상으로 걸었다더군요.”

“…네? 아니… 저택이요? 그게 얼마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으허허허, 잘 압니다. 적어도 몇천 골드는 하지 않겠습니까?”

달프 교수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우리는 몇 년을 일해도 못 얻을 집을 그깟 보상으로 걸다니…….”

“허허… 학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학업에 매진한 이유가 그런 이유였을 줄이야…….”

교수들이 허탈하다는 듯 웃자.

달프 교수가 눈을 번뜩이며 말한다.

“으허허허, 대악마를 소환하신 것도 놀라운데 그런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하시다니! 정말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 혹시 교수도 귀족 등급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집이라… 허참…….”

교수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흑카지노가 정말 학생들의 학업에 도움이 될 줄이야…….”

볼드 학장이 씁쓸히 읊조린다.

“도무지 믿기질 않는군…….”

솔직히 흑남이 도박장이랑 매점을 차렸을 때만 해도.

그가 흑카데미에 원한을 갚으려고 그런 미친 행보를 보이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흑카데미의 발전에 이바지를 할 줄이야.

“으허허허, 흑남님께서는 정말 사려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그토록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음에도 저희 흑카데미를 위해 힘쓰시고 계시잖습니까?”

“달프 교수님, 원래 그렇게 흑남에게 호의를 갖고 계셨었나요? 저는 미처 몰랐네요.”

콘스 교수가 조롱하듯 묻자.

달프 교수가 어깨를 으쓱인다.

“저 역시 한때는 흑남님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섯 쌍의 날개… 그 압도적인 힘을 본 순간… 제 마음에 있던 옹졸한 생각은 삽시간에 사라집디다. 으허허허허허허!”

“칫…….”

달프 교수가 껄껄 웃자.

콘스 교수는 혀를 차곤 볼드 학장을 바라본다.

“학장님, 이대로 흑카지노를 놔두실 건가요? 매점은 그렇다고 쳐도 흑카지노는 분명 학생들에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 용병들이나 하찮은 농민들이 도박을 좋아하겠어요?”

“…….”

콘스 교수의 발언에 침묵을 고수하는 볼드 학장.

그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천천히 입을 뗀다.

“흑카지노는… 계속 놔둔다.”

“…네?”

“이번 학생들의 성적 향상에는 확실히 흑카지노의 존재가 컸다. 그렇기에 놔둔다.”

볼드 학장이 동의해 주지 않자.

발끈한 콘스 교수가 일어나 소리친다.

“그럼 학생들에게 그런 천박한 도박을 계속 시키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콘스 교수, 흑마법사가 뭐지? 필요하다면 뭐든 하는 게 흑마법사다.”

“그… 그렇죠.”

싸늘한 볼드 학장의 말에 기가 눌린 콘스 교수가 주춤거리며 말한다.

“흑카데미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힘과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뭐든 해야겠지. 흑카지노와 매점은 계속 운영한다.”

볼드 학장의 선포에 그 어떤 교수도 감히 반박을 하지 못했고.

조용히 앉아 있던 파스칼 교수가 슬며시 묻는다.

“그런데 학장님, 혹시 흑남님께 연구비를 지원 받을 수는 없나요? 보아하니 꽤 돈을 많이 버시는 것 같던데, 그 돈을 저희에게 좀 돌린다면 더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려해 보지.”

이윽고 회의가 끝나자.

“으음…….”

교수들이 떠나고 볼드 학장만이 홀로 남아 침음한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할 수가 없어…….”

흑남의 행보를 그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점과 도박장을 차렸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랄프가 흑카데미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복수가 아니었다라…….”

그는 5년간의 하인 생활을 했다.

복수심에 불타도 이상하지는 않을 상황.

그런데 복수를 하기는커녕 흑카데미를 발전시켜 놓는다니?

“아무리 흑남이 됐다고 해도 그렇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에게는 정녕 일말의 복수심도 없는 걸까?

“일단은 지켜봐야겠지만 만약 정말 그가 복수 대신 흑마법사의 발전을 생각하고 있다면… 나도 그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겠군…….”

* * *

일주일 뒤.

길고 길었던 시험 기간이 끝나고 흑카데미에 방학이 찾아왔다.

‘조용하네.’

모든 학생과 대부분의 교수들이 저마다의 가문으로 돌아간 터라.

흑카데미는 그 어느 때보다 적막했다.

‘나에게도 돌아갈 곳이 있으면 좋았을 것도 같은데…….’

흑카데미가 조용해진 탓일까.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지금의 내게 돌아갈 곳이라고 해 봐야… 저곳인가?’

“서둘러서 움직여! 방학 때 열심히 준비를 해 놔야 개학을 하더라도 몸이 편할 수 있다!”

“예!”

덜그럭-

새로운 하인장의 주도하에 이동하는 하인들과 스켈레톤들.

손에 도끼를 쥔 걸 보니, 아마 검은 숲으로 나무를 패러 들어가는 듯했다.

‘아니. 이제는 저곳도 돌아갈 곳이 아니긴 하지.’

내가 있던 자리는 결국 새로운 누군가로 채워졌으니까.

‘에이씨…….’

나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 뒤통수를 긁적였다.

‘갈 곳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갈 곳이 없으면 내가 만들면 장땡이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매점과 흑카지노를 바라봤다.

‘어차피 흑남이 된 거… 이제는 확실하게 이곳을 내 안방으로 만들어야겠어.’

당장 대륙으로 나간들.

대륙의 공적인 흑마법사라고 멸시와 공격만 받을 터.

‘신성력으로 신관인 척 연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언제 들통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

내게는 신성력도 있으나.

나는 흑남이자 흑마법사다.

‘먼저 이곳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대륙으로 나가든가 해야지.’

돌아올 곳에 확실하게 기틀을 잡아 둬야.

적어도 대륙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매점이랑 흑카지노로도 부족해.’

지금보다 더 기반을 다져야 한다.

‘흑카데미를 발전시키면서도 흑탑에도 확실한 내 자리를 마련해야겠어. 그래야 내 미래가 짱짱…….’

내가 고민을 이어 가던 그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옆으로 슬며시 다가온 레나가 내게 묻는다.

“그냥 이것저것……. 근데 너는 방학인데 왜 집에 안 돌아간 거냐?”

“가 봐야 할 게 없으니까. 다른 가문의 자제들이랑 선을 보는 것보단 여기에 있는 게 실력을 키우기도 좋잖아?”

“교수들도 다 돌아갔는데?”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말을 이어 갔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는 네게 뭔가 알려 줄 생각 없으니까 뭔가 기대하진 말아.”

“누가 그러려고 남은 줄 알아?”

“아니었어?”

나의 물음에 그녀는 치부를 들킨 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소리친다.

“아니야!”

“그래? 아니면 말고.”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레나는 따가운 눈초리로 나를 보며 말한다.

“저번에 네가 말했던 거, 아버지께 말씀드려 봤어. 긍정적으로 검토하시겠다더라.”

“…내가 말한 거?”

‘말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뭘 말하는 거지?’

“그래. 전에 네가 말했었잖아, 흑마랜드.”

‘…음? 아니… 잠깐만……. 그걸 진짜로 부탑주한테 가서 이야기를 했다고?’

이쪽은 농담으로 말한 걸.

설마 이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줄이야.

‘근데 뭐? 부탑주는 그걸 또 긍정적으로 검토했다고?’

대체 레논 부탑주의 뇌 구조는 어떻게 돼먹은 것이란 말인가?

“하하… 농담이지?”

“음? 아니? 넌 우리 아버지가 이런 걸로 농담하실 분으로 보였어?”

“아… 그건 아니지. 아닌데…….”

‘난 모르겠다. 부탑주가 진짜 흑마랜드에 관심이 있으면 내게 연락을 취하겠지.’

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

“흑남님!”

저 멀리서 달프 교수가 헉헉거리며 내게 뛰어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헉헉, 볼드 학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급한 일이라고…….”

“급한 일이요?”

내가 의문을 표하자.

달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나가란 탑주님께서 찾으신다고 합니다.”

“…그래요?”

갑자기 탑주가 나를 찾는다?

‘탑주가 갑자기 무슨 이유로 날 찾는 거지?’

* * *

흑탑 안.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바삐 오가는 공간을 지나.

나는 탑주의 거처로 이동했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나가란 탑주.

그는 나를 푹신한 의자에 앉히곤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뭐야… 뭔가 무거운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그냥 일상 이야기나 하려고 날 부른 건 아니겠지?’

내 생각과는 달리 탑주는 그저 내게 흑카데미 생활은 어떤지.

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해 물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자네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네. 펠기누스와 계약을 했다고?”

“네.”

“허, 참으로 엄청난 일을 성공했는데도 덤덤한 모양이군.”

탑주, 나가란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자네는 우리 흑탑의 번영을 일으킬 인재가 되겠어. 지금처럼만 정진하게.”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참으로 크네.”

나가란은 껄껄 웃더니 슬며시 내게 묻는다.

“그보다 베논 님께서 또 다른 신탁을 내리시진 않으셨나?”

“저번에 신탁을 내리신 이후로는 아직 별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런가……. 알겠네.”

몇 번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어 가는 나가란.

“그보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흑카데미가 방학을 맞이했으니 당분간은 흑탑에서 생활하는 게 어떨까 하고 부른 거네.”

“흑탑에서 생활을 하라고요?”

“그렇다네. 지금 그쪽의 교수들은 방학이라 전부 나간 상태잖나? 그러니 적어도 방학 동안만큼은 이곳에서 지식을 키우는 게 어떨까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흠… 나쁘지는 않은데…….’

흑카데미의 교수진도 뛰어나긴 했으나.

이 흑탑은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들만 모인 곳.

‘이곳에 머물면 확실히 배울 게 많긴 하겠지. 덤으로 흑탑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정세도 살필 수 있을 거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나의 대답에 나가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잘 생각했네. 그럼 학파를 하나 선택하겠나? 자네가 선택을 하면 해당 학파의 부탑주에게 내 연락을 취해 놓지.”

“학파를 선택하라고요?”

“물론이네. 그 짧은 기간 동안 모든 학파의 지식을 습득할 순 없잖은가? 하나를 선택하여 집중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하긴… 그것도 그렇지.’

흑마법이라는 지식의 끝은 없는 반면.

방학은 짧았다.

하나의 지식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될 터.

“알겠습니다. 학파를 하나 정하죠.”

“생각해 둔 학파가 있나? 이미 펠기누스와 계약을 했으니 파멸학파나 저주학파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난 아직 악마들에 대해 아는 게 적어.’

오히려 펠기누스와 계약을 한 만큼.

악마학파를 선택하여 펠기누스를 효과적으로 부리는 방법을 익히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다른 학파의 지식도 좋긴 하지만 악마학부터 최대한 배우고 돌아가자.’

“저는 악마학파로 하겠습니다.”

“흠…….”

낮게 침음하는 나가란 탑주.

‘뭐야. 왜 저래?’

“잘 생각하고 결정하게.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결정이 자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네.”

나지막이 경고를 하는 나가란 탑주를 보며.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학파를 정하는 것 갖고 왜 저렇게 심각해?’

이미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딱히 그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같은 값이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파를 가는 게 맞지.’

악마학파에는 레논 부탑주가 있으니 말이다.

“제 선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악마학파로 하겠습니다.”

“흠… 그런가……. 좋네. 그럼 레논 부탑주에게 연락을 취해 놓지.”

* * *

흑탑의 내부.

레논의 집무실 안.

‘바빠 보이네.’

흑카데미는 방학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레논은 양피지 더미에 둘러싸여 한창 씨름 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부탑주님.”

나의 인사에 양피지를 한쪽으로 밀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논 부탑주.

“오셨습니까? 자, 앉으시지요.”

그는 내게 앉기를 권하더니.

“페이크 왕국의 설산에서만 자라는 잎으로 끓인 찹니다.”

곧 웃으며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해졌어? 레나가 또 무슨 말을 했나?’

“아, 예. 감사합니다.”

“딸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몬 님을 완전히 소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다고요.”

‘아, 역시 그것 때문이었어?’

아무래도 레나가 아몬과의 계약 당시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언급한 모양이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부탑주님께서 배려를 해 주셨으니 저 또한 배려를 해 드려야지요.”

“크흠…….”

내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건지.

레논은 멋쩍게 헛기침을 하곤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간다.

“펠기누스와 계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고요? 하하하,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제 딸도 운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레논은 씁쓸히 웃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계속 말한다.

“탑주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내일부터 방학이 끝날 때까지 저희 악마학파에 소속되어 일하시면 됩니다.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 흑마법사 한 명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레논이 나를 보며 입술을 뗀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혹시 새로운 일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다른 의도는 없고 그냥 개인적인 질문일 뿐입니다.”

부탑주의 물음에 나는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새로운 일이요?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새로운 일이야 항상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레논 부탑주는 잠시간 찻잔 언저리를 빙글빙글 쓰다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곤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흑마랜드 말입니다……. 혹시 제가 도움을 드릴 건 없습니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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