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래요?”
‘뭐…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지.’
흑마법사도 결국 사람이다.
서로 갖고 있는 생각도 이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긴 좀 뭐하지만 제른 부탑주가 좀 더 흑마법사스럽긴 하네.’
“다른 학파의 분들도 제른 부탑주와 생각이 같은 겁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레논은 고개를 젓고는.
흑탑의 정세를 간단히 설명해 준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파멸학파는 대륙 침략, 저주학파는 중립, 악마학파는 지금처럼 평화를 추구한다 이거네?’
각 학파들이 추구하는 길은 대강 이해했다.
‘근데 부탑주들의 생각도 중요하긴 하겠지만 결국 탑주의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 아냐?’
결국 흑탑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탑주 아닌가?
“탑주님은 어느 쪽입니까? 탑주님도 중립을 지키시는 겁니까?”
나의 질문에 레논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까 왜 악마학파는 다른 왕국에 침략을 가지 않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이유는 탑주님께서 파멸학파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시기 때문입니다.”
“허… 그러니까 탑주님도 전쟁을 원하신다 이 말입니까?”
“전쟁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으셨지만 파멸학파를 밀어주시는 걸 봐선,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요.”
레논의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조만간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것 아냐?’
만약 흑마법사들이 정말 대륙으로 침략을 시작하면.
나 역시 전쟁에 참여해야 될 수도 있을 터.
‘씁… 아무리 흑마력이 좋다고 해도 전쟁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내가 고민에 잠긴 그때.
레논이 날 보며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변수가 생긴 덕에 탑주님께서도 막무가내로 전쟁을 일으키실 수는 없을 겁니다.”
“변수요?”
“그렇습니다. 흑남님이라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내가 변수라고?’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제가 어떻게 변수가 되겠습니까.”
“랄프 님께서는 베논 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대변하시는 흑남이시잖습니까. 당연히 크나큰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지요. 막말로 흑남께서 베논 님이 전쟁을 원치 않으신다고 한마디만 하셔도 상황은 달라질 겁니다.”
‘하긴… 전에 베논의 신탁을 받을 때 다들 엎드려서 그 난리를 친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어.’
흑마법사들에게 있어 베논의 뜻은 생각 이상으로 크게 작용되는 듯했다.
‘근데… 내 중요성을 그렇게 잘 아는 양반이 전에는 그렇게 행동을 했냐?’
내가 레논을 째려보자.
레논은 괜히 머쓱하게 웃으며 묻는다.
“흑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도 말이지…….’
솔직히, 전쟁? 냉정하게 봤을 때 내게는 좋은 일이다.
‘악행을 하니 흑마력도 오를 거고, 그만큼 내 힘이 강해질 테니까.’
하지만 힘이 좋다고 해도 전쟁은 반대다.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는 건 좀 그래. 적어도 뭔가 명분이 있어야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면 전 중립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전쟁을 원치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해야 하는 게 전쟁이니까요.”
“그렇습니까?”
나의 대답에 레논은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 대답이면 충분합니다.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이제 데스나이트를 제작하는 걸 보러 가시죠.”
* * *
다음 날.
‘어우…….’
묵기 황송할 정도로 커다란 방 안의 침대에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 너무 돌아다녔나.’
레논이 나를 데리고 흑탑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탓일까.
괜히 몸이 피곤한 것 같다.
‘오늘은 다른 건 제쳐 두고 흑탑 분위기나 좀 살펴야겠어.’
당분간 흑탑에서 지내기로 한 이상.
이곳의 돌아가는 흐름이나 분위기를 확실히 파악해야 할 터.
‘레논에게서 대강 들었다곤 해도, 듣는 거랑 보는 거랑은 확실한 차이가 있으니까.’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다.
‘하녀인가?’
어제도 하녀들이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겠다고 하여.
한사코 사양하느라 애를 먹지 않았던가?
‘또 들어와서 옷 갈아입혀 주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건 사절인데…….’
나는 얼른 옷을 갖춰 입고는.
비로소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
끼이익-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음?’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어째선지 내 시선 끝에는.
긴 흑발을 로브 중간 부근까지 기른 아담한 소녀, 레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웬일이긴. 아버지가 흑마법사 한 명을 붙여 준다고 하지 않으셨어?”
“…그랬었지.”
“그게 나야.”
레나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당연히 나이가 지긋한 흑마법사를 붙여 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 못 했네.’
“넌 본가로 안 돌아가?”
“가 봐야 할 것도 없어. 돌아갈 시간에 이곳에 남아서 흑마법을 익히는 게 낫지.”
“어머님이 섭섭해하실 것 같은데.”
나의 말에 그녀는 덤덤히 말한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
“아…….”
“괜찮아. 이제는 익숙하니까.”
레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 간다.
“그보다 흑탑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다 물어봐. 그래도 흑탑에 대해선 나름 잘 아는 편이니까.”
‘뭐, 그래.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안면 있는 녀석이 안내해 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럼 뭔가 특이한 건 없어?”
“특이한 거?”
“그래. 흑탑에서만 볼 수 있는 무언가.”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본다.
‘뭐, 뭐야…….’
“이제 너도 슬슬 결혼에 관심이 있을 것 같은데. 재밌는 곳이 있긴 해. 가 볼래?”
“…결혼?”
레나는 더 이상의 설명 대신.
나를 데리고 방을 나가 복도 끝에 있는 마법진 앞으로 이동했다.
“이동할게.”
‘읍…….’
마법진에 오르자.
잠시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은…….’
어느 순간 조용하던 복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10골드!”
“난 20골드!”
“30골드 간다!”
학생들의 교실 몇 개를 합친 크기의 공간 안으로.
흑마법사들의 아우성이 한가득하다.
‘뭐야, 여긴……. 경매장 같은 곳인가? 그런데 뭘 파는…….’
내가 까치발을 들고 힘껏 점프를 하자.
단상 위로 허름한 차림새를 한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흑마법사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인 건가? 근데 왜 경매를 하는 거지?’
실험체들의 숫자가 적어.
흑마법사들끼리 경쟁이 붙은 걸까?
“이 여인은 50골드에 낙찰됐습니다! 다음은 크라켄 왕국에서 온 남자 노예입니다! 이 까무잡잡한 피부에 근육 보이시죠? 제가 장담하건대 밤일도 끝내줄 겁니다! 2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로 보이는 남자가 목청을 높이자.
“20골드!”
“50! 50골드!”
이번에는 남자들이 잠잠해지고.
여자들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열을 올린다.
‘노예 경매가 왜 이렇게 인기가 높은 건데?’
나는 호기심이 들어 옆에 있던 레나에게 물었다.
“저건 그냥 노예 경매 아니야? 딱히 재밌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저건 그냥 노예 경매가 아니야. 혼인 장사지.”
“혼인… 장사?”
‘결혼을 장사한다고?’
“말 그대로야. 너도 알겠지만 흑마법사에 대한 평판이 썩 좋지만은 않잖아.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라도 결혼을 하려고 하는 거지.”
‘뭐, 흑마법사 인식이 쓰레긴 건 맞다만…….’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가질 않았다.
“정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다른 가문의 여식과 하면 되는 것 아냐?”
검증된 남자와 여자를 마다하고.
저들은 왜 굳이 노예를 사는 선택지를 택한 걸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왜 굳이 노예들과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흠…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저런 선택을 한 걸 텐데… 이유가 궁금하네.’
내가 열기에 젖어 있던 경매장 안을 훑던 그때.
‘어? 저 녀석은…….’
불현듯 금발을 가진 한 남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스칼 아니야?’
한때는 흑카데미의 학생이었던 녀석.
하나 지금은 흑탑에 취업하여 흑탑의 흑마법사가 된 모양이었다.
‘여자만 밝히던 녀석이 출세했네.’
툭하면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정신 나간 녀석이었지만.
나는 비교적 녀석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하인들에게 비교적 친절하게 굴었던 별종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아스칼의 졸업을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아스칼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거참…….’
나는 헛기침을 하곤.
슬며시 아스칼의 앞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이야, 아스칼.”
“음… 어?! 너… 아니… 흑남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그의 물음에 나는 흑탑에 오게 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고.
아스칼은 그제야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흑남께서도 결혼 때문에 여길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하… 참 결혼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스칼은 푸념하듯 말을 이어 간다.
“크라켄 왕국이 좋았는데…….”
“크라켄 왕국?”
“예, 얼마 전까지 제가 그쪽 지부에 있었거든요. 지금은 돌아왔지만…….”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말을 이어 가는 아스칼.
“따듯한 날씨도 좋았고, 살짝 까무잡잡하긴 해도 건강미 넘치는 여인들도 전부 제 취향이었죠.”
“그런데 왜 돌아온 건데?”
“…제가 그쪽 지부장 딸이랑 조금 사이가 좋았습니다.”
‘근데 흑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했다고? 조금 사이가 좋았던 게 아니라 건드린 것 아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아스칼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하, 그 여자가 유부녀만 아니었어도…….”
“아…….”
그제야 나는 대강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고.
녀석이 살아 있는 게 용하다는 생각마저 했다.
“이곳 일은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기껏 해 봐야 다른 왕국에서 오는 사신들이나 대접하는 게 전부니까요.”
“그래도 흑탑에 있으면 더 출세할 수도 있잖아?”
“제가 바라는 건 출세 따위가 아닙니다. 그저 참한 여인과 결혼하는 게 목표죠.”
아스칼의 말에 나는 계속 갖고 있던 의문을 던졌다.
“결혼을 생각한다면 노예를 찾을 게 아니라 다른 가문의 여식을 찾는 게 빠르지 않아?”
“…예? 그건 좀…….”
아스칼은 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간다.
“물론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막말로 암살자 가문의 여식과 결혼했다가 제가 자는 중에 칼침이라도 맞으면 어떡합니까?”
“도굴꾼의 여식은?”
“그건 더 싫어요.”
학을 떼며 몸서리치는 아스칼.
“그럼 툭하면 도굴을 한답시고 밖으로 나돌아 다닐 텐데, 그사이에 다른 남자와 놀아날지 어떻게 알까요. 거기다가 도굴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전 꼼짝없이 홀아비가 되는 거잖아요!”
‘흠…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아스칼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덤덤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같은 흑마법사와 결혼하면 되는 것 아냐?”
“그게 제일 무난하죠. 하지만… 먼저 결혼한 선배들이 한사코 말리더군요.”
“왜?”
“악마학파의 여식은 차라리 괜찮죠. 파멸학파에 거기다가 부패를 전문으로 배웠다? 집 안에서 썩은 내가 끊이지를 않는다고 하더군요.”
거침없이 의견을 토해 내는 아스칼.
“그렇다고 저주학파의 여식과 결혼하자니 괜히 저주에 걸리는 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도 있고요.”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흑마법사들이 서로 결혼을 꺼리는 거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그런 결혼 생활은 못 합니다!”
아스칼이 단호한 대답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이래서 흑마법사의 숫자가 적었던 건 아니겠지? 뭐, 흑마법사에게 인구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애당초 스켈레톤들을 비롯하여 온갖 마물들을 부리는 흑마법사들에게.
인구는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닐 터였다.
‘솔직히 흑마법만으로도 대륙에 악명을 자자하게 떨치는 판국인데 만약 흑마법사가 몇십만이라면…….’
어쩌면 흑탑이 대륙의 패권을 잡는 것도 가능할 터.
“근데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흑남님께서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리 잘하고 미인이거나 근육 빵빵하고 잘생긴 크라켄 왕국의 노예와 결혼할지 아니면 음침한 동업자와 결혼할지 말이죠.”
“음…….”
‘솔직히 이건 반박하기가 좀 어렵네.’
내가 속으로 수긍하던 찰나.
아스칼이 다시 푸념을 늘어놓는다.
“거기다가 흑남님도 아시겠지만 여자 흑마법사가 많이 적잖아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들 콧대가 아주 그냥 엄청 높다고요. 따지는 건 왜 그리들 많은지…….”
‘음… 그것도 그래.’
확실히 남자 흑마법사의 숫자에 비해 여자 흑마법사는 많이 적은 편이다.
당장 흑탑 안을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흑카데미가 예외인 거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아스칼에게 물었다.
“그럼 대부분은 노예와의 결혼을 선호하겠네?”
“그렇죠. 하지만 그것도 쉽지만은 않아요. 매물로 나오는 노예의 숫자도 적은 데다가 저희와 결혼하느니 실험체가 되겠다고 혀 깨무는 노예들이 워낙 많은지라…….”
우울해하는 아스칼을 보며.
‘자기가 원하는 결혼을 한다는 게 좀 쉬운 일이겠냐. 삶이 그런데.’
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가만…….’
그러던 그때.
‘가만있자… 이거… 그래…….’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을 스쳐 간다.
‘그래, 그거다!’
엄청난 악행을 벌여 나의 흑마력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그야말로 파멸적이며 악마적인 발상을 말이다.
“너, 혹시 네가 원하는 외국의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고 하면 어떡할래?”
“어떡하긴요! 너무 좋죠!”
“그렇지? 너, 나랑 일 하나 할래?”
나의 물음에 아스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이요? 흑남께서 명령하신다면야 해야죠. 근데 무슨 일을…….”
아스칼이 걱정하듯 말꼬리를 흐리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별건 아니고, 국제결혼 업체를 하나 만들어 볼까 해서. 이름은 결혼해 듀… 아니, 흑혼해 듀오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