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08화 (108/200)

108.

양피지를 든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아스칼.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여기 다른 여성 회원분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그럼 내가 내 배우자를 고르는 일로 장난을 칠까?”

“그건 아닙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종족 여성 회원 전원과 매칭을 하시려는 겁니까?”

아스칼의 물음에 난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다른 일들은 잠시 제쳐 두고 이번 일을 우선시해.”

“물론 그래야지요. 그런데… 랄프 님, 이종족 중에는 다크 엘프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도 있는데, 진짜 괜찮으신 거지요?”

아스칼이 어딘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의아함이 들었다.

‘저 녀석은 왜 다리를 가만 못 놔두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하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적거렸다.

“그래, 네가 엄연히 알아서 엄선했을 테니까 괜찮겠지. 매칭 다 잡아.”

* * *

5일 뒤.

화르륵-

어둠만이 도사린 숲 사이로 횃불이 하나둘 피어올라.

큼지막한 식탁 주변을 밝게 비추어 준다.

“쿠락! 마락! 크룽!”

“…….”

찌지지지직-

눈앞에 있는 거대한 오우거가 사슴을 반으로 찢어 내게 내밀자.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옆에 있던 남자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웡, 마동타 공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거지?”

“갓 잡아서 아직 따끈따끈한 상태이니 식기 전에 어서 식사를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

‘뭐? 따끈따끈? 저놈… 제대로 통역을 하고 있는 한 건가?’

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웡.

검은 대지에서 유일하게 마물들의 언어를 익힌 별종 마법사라는데.

아마 아스칼의 추천이 없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뭐… 확실히 따듯해 보이긴 하네.”

“마락!”

갑자기 공주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을 내게 내미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웡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래. 아스칼이 무능한 놈을 소개해 주진 않았을 테니까. 근데… 이건 진짜 먹어야 되는 건가?’

나는 곁눈질로 사슴을 훑다가 미소를 지으며 웡을 응시했다.

“공주의 호의에는 감사하지만 내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말이야. 내 의사를 그대로 전달해.”

“그러지요. 크뤽! 아락카! 마퉁가!”

갑자기 웡이 손발을 비롯하여 전신을 다 써 가며 괴성을 지르자.

“네륵캌? 마쿤타나…….”

어째선지 오우거의 표정이 나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무룩해져 간다.

“…공주께서 왜 저러시는 거지?”

“공주께서 직접 흑남님을 대접하기 위해 살이 통통한 사냥감을 잡아 왔는데, 흑남께서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셔서 섭섭하다고 하십니다.”

“아… 그래?”

‘아니, 그러면 적어도 익힌 거를 주든가.’

“다시 생각해 보니 허기가 좀 도는 것도 같군요. 식사를 하죠.”

“아라카! 카투나티! 도노호!”

웡이 내 말을 즉시 통역하여 마동타 공주에게 전달하자.

활짝-

풀 죽었던 공주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근데 그냥 먹기에는 불편하니 내 방식대로 간단히 조리라도 좀 해야겠어.’

나는 사슴에서 떼어 낸 고기 조각을 단도로 찍어.

옆에 자리하고 있던 횃불에 고기 조각을 올렸다.

‘그래. 이게 요리지.’

내가 흐뭇하게 익어 가는 고기를 바라보던 중.

“지,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당장 내려놓으세요! 당장이요!”

갑자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웡이 허겁지겁 나의 행동을 제지한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공주를 보십쇼.”

‘아니, 겨우 고기 한 조각 구워 먹는 것 같고 왜 저리 난리… 오…….’

“아투… 아투…….”

나와 그녀의 종족이 다른지라 그녀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알겠네.’

어째선지 당장이라도 날 묵사발 내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공주를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매칭 상대와 싸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나 나의 우려와 달리.

“나마지!”

으헝헝헝헝-

마동타 공주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구슬픈 울음소리를 흘리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마동타 공주가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중.

웡이 깊은 한숨을 토하며 입을 뗀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흑남께선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셔야 했습니다.”

“…예의?”

저 말인즉슨, 내가 그녀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말 아닌가?

‘아니, 내가 공주를 만나서 한 일이라곤 대화랑 식사밖에 없었는… 잠깐…….’

“…설마 이것 때문인 건 아니겠지?”

내가 슬며시 단도를 가리켜 보이자.

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간다.

“그렇습니다. 마동타 공주는 방금 전 흑남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으신 모양입니다.”

“사슴 좀 구운 게… 무례라고?”

나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으나.

웡의 표정은 단호했다.

“저희에게야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동입니다만, 프렐 오우거들에게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네가 준 건 먹을 가치가 없으니 불에 태워 버리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마동타 공주가 저리 슬퍼하시며 자리를 뜨신 겁니다.”

‘아니 미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박식한 네가 좀 말리지 그랬어.”

“그게… 저도 공주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던 탓에 대처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후우… 아니다. 네가 잘못한 건 없다. 이종족에 대해 무지했던 내 잘못이지.”

만약 고기를 굽는 행동에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단 걸 알았다면.

난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동타 공주, 거참… 미안하게시리…….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공주가 사라진 자리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 * *

다음 날, 점심.

‘후… 다음 매칭 상대를 만날 때는 어제와 같은 실수는 없도록 해야겠어.’

나는 아스칼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말인가?”

“내 참, 정말이라니까? 흑남께선 이종족 여성들만 만나고 있다고! 당장 며칠 전만 해도 광장에서 흑남님이 드워프와 함께 걸어 다니시는 걸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그래?! 나도 얼마 전에 흑남님이 다크 엘프와 함께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봤었는데…….”

‘이 양반들아, 남의 연애사는 좀 작게 하든가 해.’

내가 지척까지 다가갔음에도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 흑마법사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난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단 말일세! 왜 흑남께선 멀쩡한 처자들을 놔두고 이종족 여인들만 찾으시는 건지 원…….”

“어쩌면 독특한 취향을 갖고 계시는지도 모르지. 에이씨, 이종족이면 어떻고 사람이면 또 어때? 성녀와 결혼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종족과 결혼을 하시는 게 낫지. 안 그런가?!”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크흠… 크흐흠!”

나와 눈을 마주친 흑마법사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자.

나는 걸음을 돌려 곧 아스칼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스칼, 안에 있어?”

“예, 랄프 님. 그런데 어째 표정이 편치 않아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스칼의 예리한 질문에 나는 씁쓸히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어제 마동타 공주를 만났었잖아. 그때 내가 공주에게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요?”

“…공주가 준 사슴을 불에 구워 먹었거든. 여하튼 좀 복잡해.”

내가 머쓱해하자.

아스칼의 눈가가 처진 반달을 그렸다.

“아아, 이해합니다. 이종족들은 저마다 그들만의 예법 같은 게 있어서, 그 예법을 지키는 게 참… 까다롭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이종족이라도 인간과 유사한 이종족만 만나 보려고. 그나마 생김새가 비슷하면 서로 맞는 부분도 더 많을 테니까.”

“회원분의 요청을 최대한 들어드리는 게 또 저희 흑혼해 듀오의 장점이죠.”

상자를 뒤적이던 아스칼이 양피지 한 장을 가져와 내게 내민다.

“아마 이번 매칭 상대는 랄프 님의 마음에 드실 겁니다.”

“다음은 누군데?”

“달의 일족의 수장인 로메른의 딸입니다. 수인족이라 저희와 비교했을 때 외관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요.”

‘수인족이라…….’

아스칼의 상세한 설명에 나는 만족하여 미소를 지었다.

“검은 숲에서 살다 왔다니 이종족에 대한 건 완전히 꿰찼네.”

“아하하… 그때 워낙 많은 일을 겪었…….”

아스칼이 멋쩍어하며 뒤통수에 손을 올리는데.

갑자기 녀석이 작은 미동조차 보이질 않는다.

‘음? 이건…….’

시간이 멈췄다.

‘이번에는 또 누가 찾아온 거지?’

갈라진 균열 사이로 장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허리를 숙여 그를 맞이했다.

“베논 님, 오셨습니까.”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예?”

어째선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베논의 말에서 짜증이 가득 묻어 나왔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들이 나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단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 분명 네게 성녀와 결혼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지금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거다.”

베논의 으르렁거림이 나의 전신을 울려온다.

‘씁… 이 양반이 또 지랄이네.’

“후… 이 더러운 년이 또 베논 님 행세를 하고 있네? 넌 지치지도 않냐?”

내가 눈썹을 치켜뜨자 베논이 허겁지겁 소리친다.

“나는 너의 신 베논이다!”

“개소리 집어치워! 레바논 이 더러운 년! 오늘이야말로 네 간악함을 베논 님께 증명하겠다!”

내가 고성과 욕을 퍼부으며 베논에게 주먹을 들이밀던 중.

사사사사삭-

갑자기 내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멈추더니.

“아직도 복종시키지 못한 건가요? 이래서 흑남과 성녀가 결혼하는 게 가능은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흑남이 날 네년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서 시간이 소요된 것뿐이다. 곧 해결될 일이다.”

“어쩌면 무능해도 그렇게 무능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자기 신도 하나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레바논이 신랄하게 비난을 퍼붓자.

베논은 불쾌하다는 듯 레바논을 노려보며 말한다.

“성녀와의 결혼은 됐다.”

“…뭐라고요?”

“그냥 집어치우자는 거다.”

베논의 말에 아차 싶었던 걸까.

레바논은 얼른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뗀다.

“그 말은 저번에 했던 거래도 취소하겠다는 건가요?”

“거래는 진행한다. 다만 흑남과 성녀의 결혼을 취소하자는 거다. 어차피 크게 비중이 있는 일도 아니었다.”

‘오오! 그렇지! 드디어 뜻을 꺾었구나!’

하지만 베논과 달리 레바논이 얼굴을 구긴 채 소리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전 이미 신도들에게 신탁까지 내렸다고요! 그런데 갑자기 신탁을 없던 일로 돌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네년의 체면을 내가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있나?”

“아아,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요? 그래요. 좋아요. 그럼 당신은 관둬요. 나 혼자서라도 강행할 거니까 그런 줄 알고요.”

레바논이 제 할 말만 하곤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자.

척-

나는 다시 내 몸이 움직이는 걸 확인하곤 베논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레바논!”

“하아…….”

베논은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이제 난 모르겠다. 네 멋대로 하려거든 해라.”

날 회유하는 걸 포기했는지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게 진작 포기하면 좀 좋아? 어휴, 후련하네.’

“…었지요. 아직 랄프 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랄프 님?”

* * *

1주 뒤.

레바논의 대신전 안.

“아직도 갈프 신관에게서 온 연락은 없는 건가?”

“예, 아직도 조용합니다. 혹시 갈프 신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신관의 대답에 교황이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이번 일은 갈프 신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건만…….”

어째선지 성녀와의 결혼을 준비하라는 서신을 보낸 이후로.

갈프 신관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혹시 흑마법사들에게 정체를 들켜 죽은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기야 하겠네만…….”

교황과 대신관들이 해당 사안을 두고 논의를 하던 중.

한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들어온다.

“교황님,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제이나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건가?”

“방금 검은 대지에서 온 서신을 받았습니다.”

오오오오오-

논의를 나누던 대신관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드디어 갈프 신관이 답신을 보냈나 봅니다!”

“데우스 신관장, 뭐라고 답이 왔답니까?”

“갈프 신관이 보낸 것은 아니고 그의 밑에서 활동하는 세작이 보낸 서신인데, 이게 좀… 기이합니다.”

신관장이 말꼬리를 흘리자 교황은 참지 못하고 그를 재촉한다.

“기이하다니?? 자세히 이야기를 좀 해 보게.”

“그게…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갈프 신관이 이종족 여인들을 만나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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