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35화 (135/200)

◈ 135화

“그렇다고 하는군.”

내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까딱거리자.

데르콘과 비스겔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와 시녀를 바라봤다.

“저, 저 정신 나간 년이 지금 무슨 말을……. 그럼 지금 백스 자작이 페른을 배신하려고 한다는 겁니까?!”

“적어도 내가 시녀를 통해 느낀 바론 그랬다만?”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백스 자작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데르콘은 외려 내게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왔다.

“혹시 자네가 백스 자작을 제거하려고 계략을 펼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하지만 이걸 봐라.”

나는 두 사람에게 쪽지를 내밀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쪽지는 시녀가 준 거다. 정 믿기 어렵다면 백스 자작의 필체와 비교를 해 보면 되겠지.”

“으음…….”

데르콘이 나와 쪽지를 번갈아 가며 노려보자.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너희 왕국의 국정에 간섭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보나? 하물며 너희를 돕기 위해 군세까지 끌고 온 상황에서?”

“…….”

“나도 너희의 국정 관리에 간섭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일 처리를 좀 확실하게 해 줬으면 좋겠군.”

나의 말에 두 사람은 한참이고 말이 없었고.

비스겔이 슬며시 질문을 던져 온다.

“그런데 시녀가 계속 저 상태면 뭐든 물어봐도 되는 겁니까?”

“물어봐. 뭘 묻든 그녀가 알고 있는 선에선 진실을 이야기할 테니까.”

“…참으로 무서운 능력이군.”

데르콘이 치를 떨면서도 시녀에게 다가갔다.

“백스 자작 말고도 네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있느냐?”

“제 주인은… 오직… 백스 자작뿐이에요…….”

“좋다. 그럼 이제껏 백스 자작이 네게 어떤 일을 시켰었지?”

데르콘은 제발 아니어라 하는 표정으로 시녀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왕궁 내의 정보들과… 소문을 수집하라고… 하셨어요.”

“그 외에는? 또 없나?”

“네… 없어요…….”

시녀의 대답이 끝나자.

데르콘과 비스겔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져 갔다.

“이것 참… 이 정보들만 갖고 백스 자작을 몰아붙이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일단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일세. 그 전까진 함부로 행동하거나 움직여선 안 되네. 괜히 백스 자작의 의심만 살 테니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고.

비스겔이 머쓱해하며 내게 양해를 구해 왔다.

“이것 참…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어 참 죄송스럽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만남은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례하다 생각하겠지만 미안하게 됐네. 다음에 다시 자리를 잡도록 하세.”

데르콘까지 내게 사과한 뒤,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뭐, 저리 급하게 움직일 만도 하지.’

나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던 빈자리를 보며 나지막이 생각을 이어 갔다.

‘백스 자작이 왕실 쪽 사람이었던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문제는 역시 배신의 여부겠지.’

만약 백스 자작이 정말 페른을 배신한 것이라면.

페른 왕실도 골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배신을 했다면, 백스 자작을 쳐 내고 에스더성을 지킬 사령관을 새로 뽑아야만 할 테니까.’

이제 침략까지 2주가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사령관의 교체는 묘수가 되기보단.

악수가 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백스 자작이 배신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어느 쪽이 됐건 간에 페른 왕실에는 폭풍이 몰아치겠구나.’

내가 허공을 보며 피식 실소를 흘리던 중.

끼이익-

올밀이 슬며시 거실로 들어왔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그래. 거기다가 선물도 하나 줬지.”

내 대답에 올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표정들이 다 안 좋아 보이셨는지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네.”

“그런……. 그래도 나름 흑남께서 정성껏 준비하신 선물이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정성껏이라…….’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리곤 화제를 돌리고자 입을 뗐다.

“뭐, 그건 그렇고, 이제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잠시 왕궁 밖을 둘러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마차를 준비할까요?”

“가능한 평범한 걸로 준비해.”

* * *

몇십 분 뒤.

히히히힝-

나는 마차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가 성내를 둘러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흠… 희한한데. 뭔가 전쟁을 코앞에 둔 것치곤 생각보다 평화롭네.’

왕국군이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할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최전방과 이곳까지 거리가 있어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저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은 걸까.

‘이렇게 평화로우면 포교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평화를 깨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깊이 고민에 잠겨 있다가 올밀에게 물었다.

“이곳에 빈민촌 같은 곳은 없나?”

“왜 없겠습니까? 어떤 성이건 간에 빈민은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빈민촌은 왜 찾으시는 건지…….”

“그냥 궁금해서 말이야. 일단 빈민촌 쪽으로 이동하자.”

내 말에 올밀은 의아해하면서도 마부에게 말을 돌릴 것을 명령했다.

몇십 분 뒤.

“흑남님, 도착했습니다. 이곳입니다.”

마차에서 내리니 화려한 성내와 달리.

딱 봐도 벼랑 끝의 인생들이 살 법한 구역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냄새 한번 끝내주네.’

관리가 안 된 골목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오물 냄새와 음식 썩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이곳은 관리를 안 하는 건가?”

“예. 몇 번 대대적으로 청소를 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림자가 생기는 걸 막기 어렵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근방에 병력만 배치해 두고 방치하는 실정입니다.”

“그렇군.”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올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 왔다.

“한데 빈민가는 왜 찾으신 건지…….”

“내 출신이 비천해서 그런가 아무래도 빛보단 그림자에 더 관심이 가는 걸지도 모르지. 빈민가는 그림자라며?”

“그리 말하긴 했었죠.”

올밀의 대답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묻지. 어떤 사람이 신을 찾을 것 같아?”

“…예? 신 말입니까?”

올밀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야… 돈이 많은 사람들이 신을 찾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를 할 것 같아 그리 대답해 봤습니다.”

올밀의 대답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야. 다만 그보다 더 간절하게 신을 찾는 부류가 있지.”

“그게 누굽니까?”

“절박한 사람들.”

나는 툭 대꾸하며 지저분한 골목에 발을 내디뎠다.

“넌 잠깐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예?! 빈민촌은 위험합니다! 병사들을 대동하여 가시는 게……!”

“그 발언은 좀 불쾌한데. 내가 병사들의 호위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약하다는 건가?”

나의 물음에 올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다만…….”

“그럼 잠자코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나는 올밀과 병사들을 뒤로하고 빈민촌으로 들어섰다.

스스스슥-

바알의 권능을 이용하여 신들의 시선까지 확실하게 차단한 뒤.

지저분한 길을 걷길 몇십 분.

“어이, 형씨. 가진 걸 전부 다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입고 있는 옷도 싹 다 벗어. 당장!”

추한 몰골을 한 남자들 몇이 조잡한 무기를 쥔 채 나를 위협해 왔다.

‘꽤나 시선이 따갑다 했더니, 첫 손님들이 올 징조였나.’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남자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는 신을 믿나?”

“…신을 믿냐고?”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보던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껄껄 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별 미친놈이 다 있네.”

“신이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놔뒀겠어? 어디서 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퉤!”

“주신 랄프라고 아나?”

하나 그럼에도 내가 꿋꿋이 질문을 던지자.

남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주신이건 역신이건 간에 죽기 싫으면 가진 거나 다 내놔!”

“역시 잘 모르나 보네. 좋다!”

나는 싱긋 웃으며 두 팔을 활짝 펴 보였다.

“그 이름을 잘 기억해 둬라. 오늘부터 너희가 믿어야 할 신의 이름이니까.”

“저,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야! 저 정신 나간 놈, 정신이나 좀 들게 해 줘라!”

남자들이 고성을 지르며 덤벼들자.

나는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며 생각했다.

‘말을 안 듣는 놈들한텐 몽둥이가 답이지.’

쩌어어어어억-

내 지팡이가 허공을 가른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나는 지팡이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곤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 이제 너희가 믿어야 할 신이 누구라고?”

“미, 미친놈…….”

“네가 그런다고 우리가 믿을 것 같아? 백날 같은 말을 지껄여 봐라, 우리가 믿나!”

예상 외로 남자들이 격하게 반발하자 나는 생각에 잠겼다.

‘흐음… 두들겨 패면 믿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네.’

포교를 한다는 건 내 생각보다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더 타작질을 해야 생각이 바뀌려나?’

내가 다시금 지팡이 들던 그때.

“이봐, 엘리치! 큰일……!”

웬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오다가 나와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보곤 몸을 움찔거렸다.

“이, 이건 뭐여?!”

“크윽… 무슨 일인가?”

개처럼 두들겨 맞고 있던 남자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자.

어안이 벙벙해 있던 남자가 화급히 소리쳤다.

“그게, 자네 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당장 가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뭐, 뭐라고?!”

딸이 위급하다는 말에 무슨 힘이라도 난 것일까.

고슴도치처럼 웅크려 있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내게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아니, 도련님. 제가 귀하신 분을 몰라뵙고 참으로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고, 절 놔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흠…….”

‘그래. 타작질이 안 통한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동원하는 게 포교하는 데 편할지도 몰라.’

어쩌면 남자의 딸이 나의 포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자.

나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안내해.”

“예… 예?”

“네 집으로 안내하라고.”

“아, 알겠습니다.”

황급히 내달리는 남자의 뒤를 따라 골목을 휘젓길 몇 분.

나는 곧 낡고 허름한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그, 그럼……. 아린! 아린!”

황급히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남자를 따라 집에 들어서자.

어딘가 익숙한 죽음의 냄새가 내 코끝에 풍겨 왔다.

“아린!”

남자는 건초 더미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있는 여아의 손을 꽉 잡고 있었는데.

여아는 당장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야윈 상태였다.

‘질병이라도 앓고 있는 건가?’

나는 여아를 별 관심 없이 내려다보다가.

두근, 두근-

‘…음? 뭔가 이상한데?’

여아의 양쪽 가슴에서 들려오는 뚜렷한 고동 소리를 듣곤 슬며시 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 비켜 봐.”

“…예?”

나는 비탄에 젖어 있는 아비를 무심히 밀쳐 내곤 여아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이건……. 그래. 어째 고동 소리가 이상하더라니…….’

신기하게도 여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두 개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심장이 아니라 진짜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다니. 이게 가능하긴 한 거였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두 심장이 그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두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원초적인 마력을 몸이 견뎌 내질 못하고 있어.’

솔직히 이제껏 그녀가 살아 있었던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러면 나 말고도 신성력과 흑마력, 둘 다 쓸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건가. 한번 키워 보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제자로 삼기는 또 귀찮고……. 차라리 사도로 만들어서 포교나 하게 만들까?’

내가 여아를 보며 고민에 잠겨 있던 중.

“아, 아빠…….”

“아린! 아린! 정신 차리거라! 이 아빠가 금방 약을, 약을 구해 오마!”

“난… 괜찮아… 요…….”

여아의 눈빛에서 점점 생기가 사라져 갔다.

“아린! 아린! 정신 차려라! 아린!”

여아의 손을 붙잡고 흔들던 남자가 갑자기 내 앞에 넙죽 엎드렸다.

“마법사시지요? 도와주십쇼! 도와주십쇼! 뭐라도 하겠습니다! 영혼을 팔라고 하신다면 얼마든지 팔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 딸을 살려 주십쇼!”

‘음… 좋아. 일단 딸을 살리자. 이후 일은 그 뒤에 생각하고.’

마침내 나는 결단을 내리곤.

창조와 회복의 권능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악-

나의 왼손에서 흘러나오던 찬란한 빛이 집 안을 메웠다가 서서히 사그라지자.

색, 색-

“아린! 오오… 세상에, 아린… 아린…….”

남자는 아까와는 달리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는 여아의 손을 꽉 쥔 채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방금 그 빛은 뭐였지?”

“지팡이를 둔기처럼 다루는 마법사인 줄 알았더니… 신관님이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우리한테 신을 믿냐고 물어본 거였나?”

집에 따라 들어왔던 구경꾼들이 저들끼리 숙덕거리는 사이.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곤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내게 감사할 필요 없다.”

“…예?”

남자의 물음에 나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랄프께서 행하신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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