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지옥의 끝에서 생환한 탓일까.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엎드리기 시작했다.
[나의 자녀들아, 나는 너희의 주신이다.]
“주신이시여!”
“제가 당신의 음성을 듣고 있나이다!”
사람들이 목놓아 그 이름을 부르짖던 중.
하늘에서 계속 온화한 음성이 울려온다.
[갈대 같은 믿음은 쉽게 부러지고 꺾이기 마련이다. 반석 같은 믿음을 세워라. 그리하면 너희의 가정에 평화가 있을 것이오, 왕국에는 무궁한 영광이 도래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하늘에선 더 이상 어떠한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아아아… 랄프 님… 제가 당신을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신님 만세!”
“만세! 주신 랄프 님 만세!”
생존했다는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진 사람들은 계속 그 이름을 부르짖었다.
“후우… 후우…….”
또한 이러한 광경을 목도하고 있던 나밀라 여왕은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곤.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여왕이시여!”
“난 괜찮다. 그저 조금… 지쳤을 뿐이다.”
손을 들어 귀족들을 제지하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밀라 여왕.
그녀 또한 조금 전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는지.
얼굴에 벅찬 감동이 가득해 있었다.
“주신께서… 우리를 지켜 주셨군. 우리를 보고 계셨어.”
“그렇습니다! 저희는… 살아 있습니다!”
귀족들이 서로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중.
엘런 백작이 그녀에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주신께서 우리를 보우하시는 한, 어떠한 환란이 와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여왕은 안도의 미소를 보이곤.
무언가 결의를 했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귀족들을 응시했다.
“주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주신께서 페이트를 보우하셨단 걸 너희가 믿느냐!”
눈앞에서 운석이 사라지는 이적을 본 덕일까.
“제가 주신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귀족들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 포효하듯 소리쳤다.
또한 이날.
페이트 왕국 곳곳에서 주신의 이름이 하늘 높이 울렸다.
* * *
한편, 같은 시각.
감옥.
‘씁… 확실히 메테오가 대마법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영향이 크네.’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나의 몸을 내려다봤다.
스슥-
메테오에 개입한 영향인지.
나의 몸에는 육안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균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 완전한 신이 된 게 아닌데도 이 정도일 줄이야.’
이 균열의 정체는 존재성의 유무에 타격을 입어 생긴, 일종의 흔적이었다.
‘만약 내가 계속 커다란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면 균열도 커질 거고, 균열이 내 몸에 가득해진다면…….’
그날로 나는 소멸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이래서 신들이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거구나.’
개입의 대가가 너무도 명확하니 그들도 선뜻 개입을 하지 못한 것이리라.
‘앞으로 나도 개입을 하더라도 일의 크기를 보고 개입하든가 해야겠어.’
개입의 대가가 어떤 건지 몸으로 체험했으니.
앞으로 함부로 개입을 하는 일은 없으리라.
내가 다짐하며 고개를 젓던 그때.
끼이이이익-
갑자기 나를 가두고 있던 쇠창살이 열리더니.
“사도시여!”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엘런 백작이 안으로 들어온다.
“표정이 밝아 보이는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우린 살았습니다! 주신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엘런 백작은 먹먹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거참, 그 노인네 목소리 엄청나네.’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곤.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사도님께서는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미 주신께서 내게 말씀을 해 주셨던 일인데, 놀랄 것도 없지.”
나의 대답에 엘런 백작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이미 주신께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하면 어째서…….”
“왜 이야기해 주지 않았냐고? 그야 그분께서 침묵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 백 번 설득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너희에게 더 와닿을 거라고 하셨다.”
“아아… 그런 깊은 뜻이……. 역시 주신님의 뜻은 깊고 또 끝이 없군요.”
엘런 백작이 감탄하며 수긍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뜻을 어찌 인간이 알까. 당연한 거다.”
“잠시나마 그분의 뜻을 믿지 못한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리려고 내게 온 건가?”
나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런 백작이 번쩍 고개를 쳐든다.
“아차, 너무 기쁜 마음에 잠시 용무를 망각했습니다.”
끼이이익-
엘런 백작이 창살을 활짝 젖히며 말한다.
“여왕께서 흑남님을 사면키로 하셨습니다. 나오시지요.”
* * *
한편, 같은 시각.
천계.
[키야아아아아악!]
[더러운 악마가 감히! 죽어라!]
악마들의 괴성과 천사들의 고성이 천계를 요동쳤고.
[아몬! 오늘이야말로 네놈을 소멸하겠다.]
[나를? 우습군.]
대천사들과 대악마들이 합을 겨눌 때마다.
콰아아아아앙-
천계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돌이 일었다.
악마들과 천사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중.
베논과 레바논은 서로를 오시한다.
[베논… 진짜로 해보자는 거지?]
[내 제의를 거부한 건 네년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지.]
[미친 새끼…….]
레바논의 욕지거리에 도리어 비웃음으로 응수하는 베논.
[내가 미쳤다고? 우습군.]
빠지직-
베논의 손에 검은 번개가 맺히더니 태산과 같은 크기로 변해 갔다.
[진정으로 미친 건 네년이다.]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은 힘껏 팔을 휘둘렀다.
우르르르릉-
그의 손을 떠난 검은 번개가 벼락처럼 레바논에게 날아들었다.
스스슥-
하나 어느새 생성된 새하얀 방패가 레바논의 몸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검은 번개는 새하얀 방패를 기어코 부수며 함께 소멸해 버렸다.
[많이 약해졌네. 예전이었으면 내 몸에까지 닿았을 텐데 말이야. 개입의 여파가 확실히 크긴 한 모양이야. 그렇지?]
[네년을 소멸하고 힘을 흡수하면 해결될 일이다. 그리고 네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베논이 그녀의 몸에 자리한 균열을 가리키며 이죽거리자.
레바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아, 그래? 아직도 여유가 있나 보네.]
[네년을 상대하기엔 충분하다.]
스르릉-
대검을 빼 든 베논이 앞으로 한 발을 앞으로 내딛기 무섭게.
레바논의 앞에서 모습을 보인 그는 높이 든 대검을 힘껏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죽어라.]
서걱-
대검이 레바논의 몸을 찢고 들어가 두 동강을 냄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앙-
지면까지 강타한 대검의 끝부분에서 커다란 충격음이 일었다.
[음…….]
그러나 어째선지 베논의 표정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사삭-
둘로 쪼갰다고 생각했던 레바논의 잔상은 사라지고.
멀쩡한 레바논이 그에게 비웃음을 던진다.
[그깟 공격으론 날 이기긴커녕 정령신들한테도 질 것 같은데.]
[주둥이만 놀릴 건가?]
[그럴 리가.]
언제 빼 든 것인지 빛나는 검을 쥐고 있던 그녀가 베논을 향해 달려들려던 그때.
[…….]
돌연 두 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움찔거린다.
[이건…….]
[음… 하필 이때…….]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입을 떼는 두 신.
[네년도 느꼈나.]
[그래.]
신들의 신이었으나 지금은 소멸된 아가멤논의 파동을 느낀 탓일까.
두 신의 관심사는 더 이상 2차 신마전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계속하려고? 방금 정도의 힘이면 아직 우리보다 아래이긴 해도 거의 우리 힘에 필적할 정도인 것 같은데.]
[…….]
[계속하려면 하든가. 끝장을 보고 둘 다 아가멤논의 후계자한테 소멸당하든지.]
도발에 가까운 레바논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베논은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네년의 운은 여전하군.]
[운? 웃기는 소리 하네. 운이 좋은 건 네놈이지.]
으르렁거리는 레바논을 보며.
베논은 무심히 대꾸한다.
[일단은 물러가지. 하지만 아가멤논의 후계자 다음은 네년이다.]
* * *
메테오가 사라진 기적 같은 그날 후.
어느덧 3일이 지났다.
‘흐음…….’
다시 감옥에서 별관으로 돌아온 나는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네.’
바로 몇 시간 전.
페이트 왕국에서 한 가지 사안이 공표됐었는데.
공표된 것이 꽤나 재미난 것이었다.
‘주신교를 페이트의 국교로 삼겠다라……. 힘쓴 보람이 있긴 하네.’
물론 나는 이 사안을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바였으나.
이 공표가 뜻대로 이루어지긴 쉽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 페이트를 흑마법사들이 통치하게 되면 분명 핍박을 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 페이트는 명실상부 나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주신교가 페이트 왕국의 국교로 유지될 수 있게 만들어야지.’
메테오를 없앤 대가로 엄청난 수의 신도를 확보했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라고 봐도 될 터.
‘그래도 앞으로 개입은 상황을 보고 해야겠지만.’
나는 양피지를 치우곤.
내 몸에 자리하고 있는 균열을 흘끔 내려다봤다.
‘근데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가 문제네. 만약 신들이 이 균열을 본다면 분명 의심을 할 텐데.’
만약 내 몸에 자리하고 있는 균열이 두 신의 눈에 닿는다면.
두 신은 힘을 합쳐 나를 소멸하려 들지도 몰랐다.
‘음… 어떻게 없앨 방법이 없나?’
이 3일간 나름대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엘런의 도움을 받아 귀한 약재를 복용하고, 또 창조의 힘도 사용하여 자가 회복을 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균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이 균열… 평생 남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들이 이만한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개입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뭔가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할 텐데… 그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
계속 고민을 한 탓일까.
이제는 별 시답잖은 생각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뭐, 설마 다른 신을 소멸하고 그 힘으로 회복하기라도 하는 건가? 음… 가만… 꼭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나?’
정말로 신들이 신을 소멸하고 그 힘으로 회복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데……. 그럼 다른 신을 소멸해야 되나? 아니지. 그럴 필요가 없잖아?’
나는 헐레벌떡 아공간 주머니에서 오리하르콘을 꺼내어 들었다.
‘오리하르콘은 아가멤논이 소멸하면서 생긴 파편 같은 거니까, 이걸 취하면 회복될 수도 있는 것 아냐?’
어디까지나 나의 가정과 추측에 불과하긴 했어도.
시험해 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복용하면 완전한 신이 될 수 있으니까 조금만 건드려 볼까.’
나는 두 손바닥을 비비곤.
오리하르콘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웅웅웅-
오리하르콘에 담겨 있던 기운이 나의 손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 나가자.
‘…어라?’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진짜로 되네?’
단순한 가정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질 줄이야.
‘좋았어! 그럼…….’
나는 오리하르콘 몇 덩이를 더 꺼내어 계속 흡수해 나갔고.
흡수를 하면 할수록.
스스슥-
나의 몸에 자리하고 있던 희미한 균열들 또한 점차 자취를 감추어 갔다.
이윽고 균열이 나의 몸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이게 진짜로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건 다행이네.’
이로써 두 신이 나를 본다고 해도.
내가 메테오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두 신이 알 수 없을 터였다.
‘거기다가 회복 방법이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겠는데?’
이제껏 개입에 따라올 대가가 어느 정도일지 몰라 선뜻 개입하지 못했으나.
회복 방법을 알게 된 이상 앞으로는 행동하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어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진짜 대박이네. 근데 가만… 그럼 두 신도 신들을 소멸하는 게 아니라 오리하르콘으로 회복을 하나? 아니면… 혹시 두 신은 오리하르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