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날, 진혁은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선은 귀빈실로 이동하시죠.’
폐가가 초토화된 것을 보고 놀란 진혁의 호위, 주연이 그를 반 강제로 귀빈실까지 데려간 탓이다.
덕분에, 진혁은 귀빈실에 마련된 식탁에 앉아 그녀가 가져다 준 도시락을 먹었다.
‘더 머물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은 없다만.’
목적은 이미 달성한 상태.
혹시나 싶어 폐가를 좀 뒤적거리긴 했지만 쓸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추억 말고는 껍데기만 남은 폐가였으니, 나머지는 진혁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여기에 있지.’
진혁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손을 갖다 댔다.
천천히 고동하고 있는 심장 안에서, 산 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끈적하고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흑마력.’
죽은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자, 사령술사가 사령술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자원.
말하자면, 진혁은 이제야 사령술사로써의 첫발을 뗀 셈이었다.
‘아직 멀었지만.’
흑마력을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한 육체는 물론, 강력한 힘과 지식을 지닐 망령과 그 망령을 담아낼 그릇까지.
아직은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진혁은 조바심 내지 않았다.
‘곧 내 손에 들어올 것이다.’
이미 한 번 걸어 본 길.
목적지와 방향을 알고 있었으니, 두려울 것은 없었다.
알고 있는 대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될 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몸을 만든다.’
마나와 달리, 죽은 자들의 힘인 흑마력은 생명체에 부담을 준다.
그 부담을 견디기 위해선 잘 단련된 육체가 필수.
‘초렵식 전에 기틀을 잡는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행동뿐이다.
진혁은 곧장 계획 중 하나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니까, 저녁 식사를.
‘맛있군.’
서가의 음식 맛은, 십 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 * *
다음 날, 진혁은 주연을 불렀다.
“훈련을 하겠다.”
“어떤 훈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체력 훈련.”
말을 마친 진혁은 자신의 앙상한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이런 몸으로 초렵식에 나갈 수는 없지.”
“초렵식…… 말입니까?”
주연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기로, 진혁은 마나홀을 잃은 무능력자였으니까.
무능력자가 어떻게 괴수가 득실거리는 던전에 들어가 초렵식을 치른단 말인가.
하지만 진혁은 막무가내였다.
“이미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신 일, 훈련장소만 섭외하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주연은 고개를 숙이곤 방으로 나갔다.
잠시 후.
“훈련장의 3층을 대여했습니다.”
“그래?”
“훈련하시는 동안 의료팀의 의사가 상주할 예정입니다. 식사는 시간에 맞추어 훈련장까지 보내도록 지시했습니다.”
“나쁘지 않군.”
생각 외로 깔끔한 일 처리였다.
“그럼, 바로 이동하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외투를 걸치곤 주연과 함께 밖으로 나와 걸었다.
오 분쯤 걸었을까.
제법 규모 있는 돔 형태의 건물이 진혁의 눈에 들어왔다.
“진혁 님, 이쪽입니다.”
그의 짐작대로, 주연은 그 건물 안으로 진혁을 안내했다.
“음.”
공동훈련장의 삼 층에 들어선 진혁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체력 훈련용으로 쓰기엔…… 조금 크군.”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수십의 강철인형과 스미스 머신, 덤벨과 바벨.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신기한 장비들까지.
‘십 년 사이에, 많은 게 바뀐 모양이야.’
자신이 쓰러지기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진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원하신다면 체력 훈련 이외에 대 괴수용 전투 훈련이나 대련도 가능한 공간입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라도…….”
“아니, 기대 이상이다.”
주연의 설명에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감각을 되살리려면 체력 훈련만으로는 안 되지.’
이곳이라면, 굳이 새로운 훈련장을 따로 구할 필요 없이 원하는 모든 훈련을 할 수 있다.
시간을 아끼고 싶었던 진혁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였다.
“언제든지 원하실 때 들어오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혹 불편한 점이 있다면 제게 연락해 주십시오. 처리하겠습니다.”
“알았다.”
주연의 자세한 설명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훈련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훈련장의 외곽을 빙 둘러싼 경주용 트랙이었다.
총 길이가 어림잡아 일 킬로미터는 되어 보이는 우레탄 재질의 트랙.
진혁은 발끝으로 트랙의 바닥을 툭툭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심폐기능부터 향상시킨다.’
흑마력을 심장에 쌓아 두는 사령술사에게, 강인한 심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
심폐기능을 향상시키는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유산소 운동 만한 게 없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진혁의 두 다리가, 트랙의 우레탄 바닥을 힘차게 박찼다.
* * *
세한은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 역시 마찬가지.
그렇기에, 세한의 회장은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달리기?”
새로운 정보를 접한 세한의 회장, 서강진은 그의 귀를 의심했다.
“네, 벌써 일주일째라고 합니다.”
“병기 훈련도, 모의 전투도 아니고, 고작 달리기라고?”
강진의 물음에 미래전략실의 실장인 조건일이 고개를 숙였다. 강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초렵식을 앞둔 놈이 할 만한 일은 아닌데…….”
마나를 다룰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일까?
허나, 강진은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갈고 닦아도, 마나의 힘을 넘어설 순 없어.’
마나는 인간을 초월하게 하는 힘이다.
맨손으로 강철을 쥐어뜯고, 허공에서 불과 얼음을 만들어 내는 힘.
아무리 육체를 단련한다 한들, 마나 없이 괴수를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알 수 없군.’
더더욱, 강진은 그의 맏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나홀이 부서진 폐인의 몸으로 초렵식을 치르겠다 한 것은 약과였다.
한 톨의 마나도 움직일 수 없는 주제에, 자신이 날린 만년필을 허공에서 멈춰 낸 알 수 없는 힘.
‘염력인가? 아니면 신성력?’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십 년 전보단 낫군.’
몇 번이고 자신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이던 아들놈이었다.
그 유약함이 싫어, 진혁이 쓰러지고 나서도 십 년 동안 녀석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가.
그 한심한 꼴과 비교하면, 지금은 그래도 봐 줄 만한 수준이다.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다만.’
강진은 머릿속에 떠오른 옛 생각을 흩어 버리고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조 실장을 바라봤다.
“초렵식은 계획대로 진행하지. 다음 주 회의 안건으로 상정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게.”
지시를 내린 회장은 고개를 숙이곤 책상 위의 서류를 살폈다.
이번 달에 잡혀 있는 던전 토벌의 일정표였다.
하지만 그가 일정표를 다시 들여다보기 전.
“아, 그리고…….”
“또 뭔가?”
조 실장의 말에, 강진은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본가의 시설 중, 진혁 님의 거처가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조만간 철거하기로 하지 않았나?”
다름 아닌, 강진이 지시한 일이었다.
십 년이나 기다려 줬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해 칠성원의 부족한 땅을 계속 놀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철거 예정 지역이라 방치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그곳의 잡초들이 모두 말라비틀어졌다고 합니다.”
“흠.”
건일의 말을 들은 강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가의 보안이 뚫렸단 말인가?”
외부의 공격.
그것 말고는, 폐가의 잡초들이 말라비틀어질 이유가 없다.
“마침 진혁 님께서 그곳에 계신 때 일어난 일이라, 전략실에서는 다른 가문이나 이적단체의 테러로 보고 그 배후를 조사 중입니다.”
“……그자의 흔적은?”
“아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
건일의 대답에, 강진은 코웃음 치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끄나풀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하게. 놈들의 소행이 확실하다면, 추적할 방법도 생각해 보고.”
“네, 알겠습니다.”
회장의 서슬 퍼런 명령에, 조 실장은 허리를 숙여 답했다.
그 모든 것이 진혁이 벌인 일일 거란 생각은, 애당초 두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 * *
진혁이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째.
“두 달 뒤라.”
훈련장에서 그의 호위, 주연으로부터 초렵식 날짜를 통보받은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초렵식을 미뤄도 된다는 회장님의 말씀입니다.”
“아니, 그대로 가지.”
주연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두 달이면 충분하다.’
그의 심장에 자리 잡은 흑마력을 제대로 다루기까지 아마도 한 달.
그리고 본격적인 초렵식 준비를 하는 데 나머지 한 달.
굳이 일정을 미룰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는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혁은 대답 대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깔끔한 일 처리는 망령군주 시절의 부하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내 사람으로 부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삼 품의 엽사인 데다 제법 눈치도 있고, 일 처리도 빠른 편이었으니 꽤나 쓸모있는 인재였다.
“그런데……계속 체력 훈련만 하시는 겁니까?”
“당분간은.”
“체력 훈련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오랫동안 실전을 경험하지 않으셨으니 모의 전투도 병행하셔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가끔 잔소리를 한다는 점만 빼면.
“거기까지.”
정론이었지만, 진혁의 계획과는 맞지 않았다.
“……네.”
“훈련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만 가 보도록.”
“알겠습니다.”
진혁이 축객령을 내리자 주연은 그대로 훈련장을 나섰다.
곧, 넓은 훈련장에 홀로 남은 진혁은 쉬면서 생각에 잠겼다.
‘흑마력은 곧 통제하에 둘 수 있을 테고.’
그의 심장에 담긴 흑마력의 양은 많다고 할 수 없다.
평범한 남성의 육체라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심장 속 흑마력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의 손에 들어오리라.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망령.’
흑마력을 받아들여, 진혁의 의지를 대행할 존재.
망령을 다루지 못하는 사령술사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가능하다면, 강력한 망령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진혁의 시선이 훈련장의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얼마 전부터 그의 영안이 보여 주는,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아무래도…….’
저 아래에, 쓸 만한 녀석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진혁의 시선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