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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8화 (8/174)

8화

1920년.

대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세계는 게이트 너머에서 찾아온 이방인과 마주했다.

요정, 난쟁이, 용.

신화나 전설 속에서나 전해져 내려오던 존재들.

괴수라는 재앙을 함께 불러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지구의 인류에게 지식과 문물을 전파하며 공존을 모색했다.

진혁의 앞에 쩍 하고 입을 벌린 무저갱, 탐욕고는 공존을 위한 수많은 노력의 결과 중 하나였다.

‘요정왕을 도와준 대가로 얻어낸 보구라고 했지.’

계단 아래의 심연을 내려다보며 탐욕고의 유래를 잠시 떠올린 진혁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호위인 주연을 바라봤다.

“금방 돌아오겠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주연이 허리를 깊게 숙이자 진혁은 손을 흔들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끈적해.’

십 년 전에도 느꼈던, 기분 나쁜 감각이 전신을 감싼다.

가슴까지 차오른 심연의 끈적임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진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곧, 심연이 진혁의 육신을 완전히 집어삼켰을 때.

‘시작인가.’

그는 어느새 계단이 아닌 대지를 밟고 있었다.

십 년 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진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탐욕고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어두컴컴함과는 반대로, 그 내부는 환하기 그지없었다.

발목 어림까지 자란 잡초들 사이로 작달막한 관목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고, 그 위로는 푸르른 하늘이 끝모르게 펼쳐졌다. 정오께의 환한 햇빛이 진혁의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두 번째 경험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여전히 신기하군요. 또 다른 세상이라니.

“요정의 보구니까.”

차원과 시공간에 관련된 비술은 요정의 전유물이다.

그것은 탐욕고 안에 펼쳐진 거대한 세상 역시 마찬가지.

일종의 아공간이라 할 수 있는 드넓은 들판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에, 요정의 손길이 녹아 있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나무였다.

‘세계수.’

물론, 진짜 세계수는 아니다.

요정의 영역을 수호하는 세계수는 지구상에 오직 한 그루.

진혁의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는, 아공간에 만들어진 복사본일 뿐이다.

동시에, 진혁이 이 들판 사이를 가로질러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우선은, 세계수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이미 탐욕고의 시험을 한 차례 통과해 본 진혁은 목적지인 세계수를 향해 나아갔다.

들판 위로 빽빽하게 자라난 잡초들을 헤치고, 밟기를 한 시간.

그의 눈앞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숲이었다.

―이제 일 층 시험의 시작이군요.

탐욕고의 시험은 서가의 엽사라면 누구나 도전하는 것.

옆을 졸졸 따라오던 성준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몇 층까지 올라갔지?”

―삼 층의 초입에서 탈락했습니다.

“제법 노력한 편이군.”

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제법이란 수식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탐욕고의 삼 층에 올랐다는 것은 서가의 엽사들 중에서도 이십 퍼센트 안에 드는 인재라는 의미였으니까.

―마나 폭주만 아니었어도, 괴수들을 원 없이 처 죽였을 겁니다.

“곧 이루어질 것이다.”

분노한 듯 떨리는 성준의 목소리에, 진혁은 짧게 답하고는 망설임 없이 어두컴컴한 숲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겉보기와는 달리 숲속은 어둡지 않았다.

듬성듬성 자라난 과일나무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숲속을 환히 비췄다.

그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세계수를 이정표 삼아 나아가던 진혁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시작이다.’

목구멍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은 갈증과 함께, 지독한 허기가 진혁을 괴롭힌다.

동시에, 주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열매에서 풍겨 오는 달콤한 향기가 그의 후각을 자극한다.

본격적인 시험의 시작이었다.

‘오랜만이군.’

탐욕고의 시험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중, 일 층의 시험은 식욕.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갈증과 허기를 이겨 내고 세계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첫 시험의 과제였다.

“후욱.”

숨을 들이켤 때마다 식도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입과 혀는 이미 바짝 말라 버렸고, 허기뿐인 뱃속은 쥐어짜는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진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 층이라면, 십 년 전에도 통과했다.’

이미 한 번 갔던 길.

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그 고통의 끝이 어디인지만 알 수 있다면 이겨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는 이미 아스칸에서 백 년 동안 수없이 많은 고통 속에서 단련해 오지 않았던가.

지금의 진혁에게 배고픔과 목마름 따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빨리 도착하시다니, 놀랐습니다.

“걷기만 했을 뿐이다.”

진혁은 목표했던 세계수의 앞에 도착했다.

마치 강남의 고층빌딩을 보는 듯,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나무의 뿌리 아래로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진혁과 성준은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숲속에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배고픔과 갈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후우.”

전신에 빠르게 차오르는 활력에 진혁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몇 시간 동안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진혁의 몸 상태는 너무나 멀쩡했다.

일 층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증거였다.

―갈림길이군요.

성준의 말에 진혁은 시선을 돌렸다.

나무 덩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 낸 세 개의 입구가 입을 쩍 벌린 채 진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탐욕고의 이 층으로 향하는 입구였다.

“성준, 너는 어느 입구로 들어갔지?”

―저는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군.”

성준의 답에 진혁은 십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지난번엔 왼쪽으로 들어갔었지.’

그리고, 들어가서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탈락해 버렸다.

십 년도 더 지난 기억이었지만, 그 흑역사는 여전히 진혁의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에야 지난번하곤 다르겠지만.’

어디로 들어가야 할까.

고민에 빠진 진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음.’

희미한 무언가가 그의 눈에 띄기 전까지는.

‘저건…….’

왼쪽 입구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색의 기운.

그 기운은, 진혁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오직 영혼을 보는 눈, 영안으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기운.

‘흑마력이라.’

다름 아닌, 진혁이 다루는 흑마력이었다.

‘어째서 요정의 보구에 흑마력이 담겨 있는 거지?’

흑마력은 망자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다.

진혁이 아는 지식 선에선, 지구에서건 게이트 너머에서건 흑마력을 다룰 줄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안에선 흑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진혁은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들어간다.’

흑마력은 그가 가진 힘의 원천.

저 너머에 뭐가 존재하고 있을지는 몰랐지만, 흑마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진혁은 곧장 왼쪽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쑤욱!

이 층으로 향하는 입구가, 진혁의 몸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    *    *

탐욕고의 이 층에 들어선 순간, 진혁은 십 년 전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의 욕망을 시험한다는 게, 설마 그런 방식일 줄은 몰랐지.’

성욕, 식욕, 수면욕.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삼대 욕구 중, 일 층에서 시험한 것은 식욕이다.

그러니, 다른 시험은 자연히 남은 두 욕망 중 하나라고 가정하는 것이 보통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니었지.’

후우웅!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몽둥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진혁은 몸을 슬쩍 옆으로 옮겼다.

콰앙!

진혁이 피한 위치로부터 정확히 한 발짝 옆.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위치를 사람보다 거대한 나무 몽둥이가 짓이겼다.

진혁은 몽둥이를 휘두른 존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식귀.’

괴수를 분류하는 다섯 단계 중 네 번째, 정(丁)급에 해당하는 거인.

본래와 달리 새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적게 잡아도 오 미터는 넘어 보이는 체구에 가득 들어찬 근육과 험상궂은 얼굴은 놈이 어째서 정급의 괴수 중에서도 상위로 평가받는지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

놈의 방망이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후웅!

대지를 짓이겼던 방망이가 그대로 공기를 횡으로 갈랐다. 낮게 수평으로 휘둘러지는 방망이의 종착점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진혁.

가만히 있었다간 곤죽이 될 게 분명하다.

“흡.”

하지만 진혁은 당황하는 대신, 줄넘기하듯 가볍게 점프해 몽둥이를 피했다.

그러면서도, 진혁의 몸은 조금씩 식귀에게로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이곳의 시험은 생존에 대한 욕망.’

다시 말해,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주변을 곁눈질하던 진혁의 눈에 천장과 주변을 감싼 반투명한 벽과도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십 년 전, 처음 들어왔을 땐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

‘저걸 넘어서면 탈락이겠지.’

식귀의 첫 몽둥이를 피하다가 그대로 탐욕고 바깥으로 튕겨 나갔던 게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럴 순 없다.’

후웅! 후웅!

식귀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해 내며, 진혁은 천천히 식귀에게로 다가갔다.

통나무 같은 두 다리 사이로, 삼 층으로 향하는 입구가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크아아아!”

쿵!

상대가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식귀는 발을 구르며 접근을 막았지만, 진혁은 식귀의 모든 방해를 한 걸음의 움직임만으로 모조리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저것인가.’

진혁의 눈은 식귀의 가슴 어림께, 정확히는 심장으로 향했다.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서 대신 고동치고 있는 검은색의 덩어리.

흑마력이었다.

―저건……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망자지.”

놀란 성준에게 대답하며, 진혁은 날아드는 식귀의 발과 몽둥이를 피해 냈다.

굳이 계열을 따지자면, 좀비라고 해야 할까.

겉보기엔 살아 있는 괴수처럼 보였지만, 영안으로 보이는 식귀의 심장 속 검은 흑마력은 저 식귀가 죽어 살아가는 자, 망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어째서 망자가 이곳에 있는 거지?’

지구에도, 게이트 너머에도 죽은 자를 되살려 내는 사령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초상 능력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세한그룹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사령술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눈앞의 식귀 좀비는 분명 사령술로 만들어 낸 망자였다.

‘영혼도 없이, 그저 약간의 흑마력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지만.’

아스칸의 파슬란이 사령술에 입문한 지 삼 년쯤 되었을 때 사용했던 저열한 방식.

하지만.

‘보존상태는 나쁘지 않군.’

그렇기에, 진혁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어째서 망자가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망자인 이상,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순 없다.

그가 판단을 내린 순간.

“망자여.”

진혁은 망설임 없이 심장의 흑마력을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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