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망자를 이끄는 것은 명계로부터 내려온 사령술사의 의무이자 권리.
꿈속 세상에서 사령술의 극의에 올라 망령군주라는 칭호를 얻었던 진혁에게.
“망자여.”
영혼조차 남지 않은 좀비 따위를 손에 넣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거짓된 주인에게서 벗어나, 오롯이 내게 속하라.”
진혁의 명령과 함께, 검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흑마력이 그의 머리 위, 거대한 언데드를 향해 투창처럼 쏘아져 나갔다.
의지를 담은 흑마력의 창이 소리 없이 식귀의 가슴 한복판을 가르고 흑마력에 물든 심장을 꿰뚫은 순간.
“크……으으으…….”
몽둥이를 내리치려던 식귀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적을 향해 우렁차게 내지르던 포효가 서서히 잦아든다. 망자가 가진 산 자에 대한 적의도 꺼져 가는 불꽃처럼 사그라든다.
진혁이 쏘아 낸 흑마력이 식귀의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일 분.
“크아…….”
쿵.
진혁을 죽이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들던 식귀가 새로운 주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식귀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까?
“망자니까.”
놀란 듯한 성준의 물음에, 진혁은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말했다.
식귀가 제법 강력한 괴수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망자가 되었다면 자신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
놈이 살아 있었다면, 놈을 지배하기보다는 제거하거나 회피를 택했으리라.
‘흑마력을 좀 많이 잡아먹긴 했지만.’
그 거대한 덩치 때문일까.
식귀 좀비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소모된 흑마력은 진혁이 가진 것의 절반.
아직은 심장에 담긴 흑마력이 많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도, 지금의 내겐 유용한 녀석이지.’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급의 괴수라면, 못해도 사품의 엽사와 비견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을 터.
거기다, 진혁은 언데드를 강화시킬 수 있는 사령술의 비전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도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최소한, 진혁의 사령술이 더 높은 경지에 이를 때까지는 자신을 지킬 좋은 가디언이 되어 주리라.
―그나저나, 이 층 시험도 생각보다 쉽게 끝났군요. 제가 도전했을 당시엔 꽤 오래 걸렸던 것 같은데.
“운이 좋았을 뿐이다.”
성준의 감탄에 진혁은 대강 대꾸하고는, 무릎 꿇은 식귀 너머에 자리한 거대한 터널을 바라봤다.
이 층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던 진혁에게, 저 너머의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
이 자리에서, 삼 층의 시험을 경험해 본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삼 층은 어떤 곳이지?”
진혁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에 도깨비불처럼 둥둥 떠 있는 성준을 향해 물었다.
―그게…….
주군의 물음에, 성준은 잠시 어물거리다 답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진입과 동시에 탈락해 버려서…….
“흠.”
성준의 대답에, 진혁은 대답 대신 흑마력을 끌어올렸다.
“망령이여, 네 기억을 보여라.”
영혼에 남은 기억의 흔적을 읽어 내는 기초적인 사령술.
망령을 향해 뻗은 손을 타고, 성준의 생전 기억이 진혁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진혁은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들어오는 기억 중 쓸모있는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곧, 망령의 기억을 읽어 낸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이군.”
―죄송합니다.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던지라…….
진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준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번만은 용서하겠다.”
―알겠습니다.
망령의 사과에 진혁은 고개를 젓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식귀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크으…….”
한 번의 손짓에 거대한 괴수가 몸을 일으켰다.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나무 몽둥이를 어깨에 걸친 식귀가 주인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가자.”
―네, 진혁 님.
“크으으.”
진혁이 앞서자 두 망자가 뒤를 따랐다.
곧, 셋은 거대한 동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진혁과 두 망자가 세 번째 시험장소에 도착한 것은, 그들이 동굴 안에 들어선 지 오 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흠.”
동굴의 저편에 보이는 광경을 마주하자,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이었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순백의 벽과 천장, 바닥 사이를 수십의 대리석 기둥이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어머, 손님이네?”
“왔군.”
남자와 여자였다.
붉은색의 천 조각 몇 개로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린, 옷을 입었다기보단 벗었다에 더 가까운 헐벗은 차림.
어지간한 연예인이나 배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이, 진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후. 거기 손님, 잠깐 이리로 와 볼래?”
“좋은 시간이 될 거다.”
진혁을 향해 다가오던 여자가 옆으로 손을 흔들자, 허공에서 침대가 나타났다.
침대에 걸터앉은 두 남녀의 뜨거운 시선과 손짓이 진혁에게로 향한 순간.
‘흠.’
둘을 마주한 진혁의 검은 심장이 의지와 관계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준의 기억을 읽어 낸 진혁은 이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삼 층의 시험은 성욕인가.’
삼 층을 감싸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이, 진혁의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망령군주로 백 년을 살아오면서 어지간한 욕망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강력한 마법적인 무언가.
‘그러니, 성준이 그렇게 쉽게 당한 것이겠지.’
한때 전도유망한 엽사 후보생이었던 그조차도, 이 마법적 유혹 앞에선 채 일 분을 견디지 못했으니까.
“어머,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거야? 재미없게.”
“이리 와서 편하게 쉬거라.”
진혁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여자와 남자가 유혹하는 몸짓을 취했다. 그와 함께,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은 충동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흠.”
진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영안에 보이는 두 미남미녀의 모습은 겉보기와는 사뭇 달랐으니까.
‘또 망자인가.’
진혁의 영안에 뚜렷하게 보이는, 두 남녀의 영혼과 그 안에 얼룩처럼 묻어 있는 흑마력.
자신을 유혹하는 두 사람의 정체는, 분명 망자였다.
‘정상은 아닌 것 같다만.’
영혼에 얼룩처럼 묻어 있는 흑마력 덩어리들이 망령을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는 너무나 또렷하게 보였다.
아마, 저 망자들 역시 본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리라.
‘어째서 탐욕고 안에 망자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망령이여.”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네 사슬을 벗어던져라.”
진혁의 입으로부터, 명계로부터 내려받은 사령술의 일부가 펼쳐진다. 검은 심장이 토해 낸 흑마력이 진혁의 손바닥을 통해 연기의 형태로 뿜어져 나간다.
망령에게 달라붙어 있는 흑마력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한 연기가 두 영혼을 감싸 안은 순간.
스으으!
마치 영혼을 해킹이라도 하듯, 검은 연기가 영혼과 흑마력 조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곧, 두 영혼이 완전히 진혁의 흑마력에 잠식당한 순간.
쩌적!
금 가는 소리와 함께, 두 남녀의 영혼을 담고 있던 육체가 유리처럼 바스라졌다.
가루처럼 흩날리는 껍데기 사이로 남은 것은, 두 개의 검은 도깨비불뿐.
―아…… 아?
―이건…… 여긴 어디요? 당신은 누구고?
정신을 차린 두 망령이 진혁을 향해 물었다.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지, 망령들의 목소리에선 당황함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망령이여.”
진혁은 대답 대신 두 망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리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진혁은, 망령군주는.
망령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희는 지금부터 말하되 말할 수 없으며, 생각하되 생각할 수 없으리라.”
자신의 손에 들어온 망령의 자유의지를 제압하는 사령술.
진혁의 주문이 맺어짐과 동시에, 두 망령은 일순 침묵에 빠졌다.
진혁이 금제를 풀기 전까지, 두 망령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
‘이쪽은 해결되었고.’
침묵한 두 망령을 잠시 지켜보던 진혁은, 거대한 방 너머로 보이는 금색의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인가.”
삼 층의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문.
저 너머에, 탐욕고의 수많은 보구들이 진혁을 기다리고 있다.
진혁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문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짓고는, 앞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문 앞에 도착한 그가 길쭉하게 생긴 손잡이를 잡아당긴 순간.
파아아앗!
강한 빛이 그의 시야를 삼켰다.
* * *
탐욕고의 시험은 총 셋으로 나뉜다.
그리고, 각 층의 시험에서 탈락한 자들은 탈락한 층에 걸맞는 보구를 탐욕고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서가에게 탐욕고를 넘긴 요정왕이 자신들의 새 보금자리로 떠나며 내건 조건.
그렇기에.
“보상……이라.”
자신의 앞에 줄지어 진열된 보구들을 바라보며, 진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삼 층의 보상이군요. 이 층에서 본 거랑은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다.
성준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
그와 진혁이 얻었던 보상과는 질에서도, 양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흠.”
진혁은 자신의 앞에 정렬되어 있는 수많은 유리 기둥들 중 하나로 다가갔다.
마치 백화점의 숍에 진열된 상품들처럼, 검은 목걸이 형태의 보구를 품고 있는 유리 기둥.
그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여명의 종언」
「최초의 블랙드래곤, 베르키스가 용사를 위해 자신의 하트 일부를 깎아 만들어 낸 목걸이. 강력한 마나 증폭 기능을 탑재했다.」
“……허.”
기둥에 적힌 설명을 읽은 진혁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베르키스가 누구인지는 그 역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드래곤 하트, 용심(龍心)의 가치는 잘 알고 있다.
‘다이아몬드보다 열 배는 비싸지.’
아무리 일부라고는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사용해 만든 보구가 귀하지 않을 리 없다.
―용심으로 만든 보구라니, 이런 게 정말 탐욕고에 존재했군요.
“탐욕고의 삼 층에서 나온 사람들이 들고나온 보구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
그중엔, 자신의 아버지 서강진도 포함되어 있다.
진혁은 유리 기둥 안에 봉인되어 있는 목걸이를 눈으로 찬찬히 뜯어봤다.
흑룡의 용심이 가진 특유의 검은 기운이 목걸이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진품이 틀림없었다.
‘다른 건…….’
그의 눈이 옆에 있던 다른 기둥들로 향했다.
[성광검]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 자신의 대리인에게 맡긴 검. 쥐고 있으면 신이 가진 힘을 사용할 수 있다.]
[마나의 별]
[마법진을 이용해 마나를 응집, 압축해 고체화시켜 만들어 낸 보석. 지니고 있으면 마나 감응력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다.]
“흠.”
하나하나가 도시 하나쯤은 사고도 남는 가치를 지닌 보물들.
‘일 층에선 상상도 못 할 물건들이다.’
고작해야 약간의 마법이 걸린 검이나 방어구가 전부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뭘 골라야 할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물론 마나홀을 잃은 진혁이 사용할 수 있는 보구는 제한적이었지만, 굳이 직접 사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정 쓰기 어렵다면, 괜찮은 조건으로 거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탐욕고의 수많은 보구들 중,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수많은 보구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진혁은 개중 가장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그때였다.
‘이건…….’
수많은 보구들 사이에서, 진혁이 강한 흑마력의 냄새를 맡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