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기절한 사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였다.
“여, 여긴……?”
의자에서 눈을 뜬 사내는 곧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두꺼운 밧줄 때문이었다.
‘제길, 마법 로프야.’
마나를 운용해도 끊어지지 않을 만큼 질긴 물건이었으니, 고작해야 사 품의 엽사에 불과한 그가 끊어 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탈출해야 돼.’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그는 이미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곳곳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쇠와 기름 냄새.
어제 그가 침투했던 세한금속의 공장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이곳에 묶어 둔 이유는 분명했다.
‘배후를 캐려는 걸 거야.’
물론, 자신의 뒤에 세한보안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계약서의 비밀 유지 조항을 어기는 순간, 소송의 늪에 빠진 그의 삶은 곧장 지옥으로 변할 게 분명했으니까.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 죽어도!’
소송의 늪에 빠질 바에는, 차라리 감옥에 가거나 죽는 편이 나았다.
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크으으으.”
“시, 식귀!”
물론, 그 각오는 눈앞에 식귀가 나타난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사, 살려 주세요!”
식귀는 그 이름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괴수.
실제로 잡아먹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데다 놈은 머리도 없는 상태였지만, 팔다리가 묶인 채 꿈쩍도 못 하는 상태에서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할 리 없었다.
그냥 죽으면 죽었지, 산 채로 먹히고 싶지는 않았다.
“제발, 제발…….”
목 없는 식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사내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어젯밤 여유롭게 공장의 정문을 돌파하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
지금 식귀의 앞에 묶인 것은, 그저 겁에 질린 피식자일 뿐이었다.
“살고 싶나?”
검은 식귀, 성준의 오른편에서 한 명의 남자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겁에 질린 남자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다, 당신은.”
“세한의 서진혁. 여기까지 왔다면, 내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왔겠지.”
진혁은 자신의 정체를 스스럼없이 털어놓고는, 의자에 묶인 침입자에게 다가갔다.
입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살고 싶다면, 누가 보냈는지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흑마력이 담긴 서늘한 목소리.
엽사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그것만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으리라.
‘어, 어쩌지?’
진혁의 눈빛을 마주한 침입자의 눈이 식귀와 진혁을 바쁘게 오갔다. 죽을듯한 공포가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나 혼자 한 일입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침입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당장의 죽음이 차라리 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
‘쉽지 않겠어.’
망령군주로 지내면서 이런 눈빛을 수도 없이 마주했던 진혁은 직감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면…….’
육체의 보호를 벗어던진 영혼에게서 기억을 뽑아내는 것은, 사령술을 다루는 진혁에겐 너무나 쉬운 일.
‘여기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망령군주가 살아왔던 아스칸과는 달리, 한국에서 살인은 금기였으니까.
세한의 공장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면, 뒤처리가 꽤 귀찮아질 것이다.
‘어떻게 한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침입자를 바라보며,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그는 결정을 내렸다.
“풀어 주마.”
“네?”
순간, 침입자는 진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바꾸니 쉽게 믿을 리 없다.
하지만 진혁의 말은 진심이었다.
휘리리릭!
진혁이 손에 쥐고 있던 버튼을 누르자 침입자의 몸에 감겨 있던 마법 밧줄이 스스로 풀렸다.
“헛!”
순식간에 자유의 몸이 된 남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어 자세를 취했다.
누가 보더라도 식귀와 진혁을 경계하는 모습.
“돌아가라,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허나, 진혁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지만, 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 둘 사이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을 때.
타앗!
단숨에 수십 미터를 도약한 침입자는 순식간에 공장의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진혁아, 꼭 풀어 줘야 했던 거냐?”
뒤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난쟁이, 글리펜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난쟁이의 물건에 손을 대는 놈은 손발을 잘라 버려야 하는데 말야.”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침입자가 들었다면 벌벌 떨었을 말이지만,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글리펜과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흠, 그렇다면야.”
진혁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은 글리펜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오늘은 제법 바쁠 거야, 기대해도 좋아.”
진혁의 말에 글리펜은 흥분해 벌게진 얼굴로 두 손을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진혁은 잠시 시선을 돌려, 조금 전 침입자가 탈출했던 공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곧, 알 수 있겠군.’
입구에서부터 길게 이어져 있는 흑마력의 흔적.
‘망령들이여.’
너희의 가치를 증명해라.
흔적의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불꽃을 바라보며, 진혁은 눈을 빛냈다.
* * *
“아다만티움은 오직 게이트 너머에서만 구할 수 있지. 지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원소로 이루어졌거든.”
그러니, 그 제련과 가공의 방법 역시 특별할 수밖에.
말을 마친 글리펜의 눈이, 중앙에서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마법 고로로 향했다.
“이제 삼십 분이 지나면, 고로에 새겨진 융해마법이 최고조에 다다를 게야. 그러고 나면, 저 아래에서 완전히 녹아 버린 아다만티움 쇳물이 흘러나오는 거지.”
다른 마법 금속도 마찬가지고 말야.
설명을 끝낸 글리펜의 시선이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혁에게로 향했다. 마주친 글리펜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는군요.”
“사실, 미스릴 같은 거였으면 오 분도 걸리지 않았을 거야. 아다만티움의 마법 내성이 워낙 강해서 벌어지는 일이지. 그만큼 성능도 확실하지만. 그나저나.”
말을 끊은 글리펜이 진혁을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 찝찝함이 남아 있는 듯한 얼굴.
“확실한 거겠지?”
“믿으셔도 됩니다.”
대답하는 진혁의 표정에는 일말의 의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파슬란이 완성시킨 술법이다.’
망령군주, 파슬란 드 노미크롬이 새롭게 창안해 낸 수많은 사령술들.
자신은 그중 이미 검증되어 있는 하나를 꺼내어 쓸 뿐이다.
‘실패할 가능성은 추호도 없다.’
이윽고, 글리펜이 말했던 삼십 분이 지났을 때.
“오, 오오. 나온다!”
글리펜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마법 고로의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치 먹물처럼 시커먼 액체가 미리 준비된 작은 관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곧, 흘러내린 쇳물은 미리 파 놓은 두 개의 구덩이 안으로 모여들어 웅덩이를 이루었다.
“쇳물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열이 아니라 마법으로 녹인 거니까.”
진혁이 신기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글리펜은 짧게 대답하고는 손짓했다.
“자, 시작할 거면 빨리 하자고. 조금만 지나면 저 상태로 굳어 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뒤에 선 식귀를 바라봤다.
‘성준.’
―알겠습니다.
진혁의 지시에, 성준은 마법 고로 앞에 생겨난 아다만티움 웅덩이를 향해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곧, 식귀의 몸이 두 개의 웅덩이 앞에 섰을 때.
―시작하겠습니다.
성준은 망설임 없이 두 팔을 움직였다.
푸욱!
아다만티움 웅덩이가 식귀의 두 손을 삼켰다.
살아 있는 생물이었다면 누구든 고통에 몸부림쳤을 터.
“크으으.”
하지만 이미 망자인 성준이 고통을 느낄 리 없다.
성준의 말에, 흑마력을 한껏 끌어올린 진혁의 시선이 글리펜에게로 향했다.
흑마력 사용자 특유의 귀기 서린 눈빛을 마주한 글리펜은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는데, 일단은 그 재수 없는 눈빛 좀 어떻게 안 되겠나?”
“작업이 끝날 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
“빌어먹을.”
괜히 욕설을 내뱉고 식귀에게 향하는 글리펜을 잠시 바라보던 진혁은.
고오오오―!
검은 심장 속에 잠들어 있던 흑마력을 가득 끌어올렸다.
* * *
서상혁 전무의 집무실은 세한빌딩의 육십이 층에 위치해 있다.
삼 품의 엽사이자 세한보안 토벌본부장의 직함을 가진 상혁의 취향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집무실의 내부에는 중세시대에나 썼을 법한 장검이나 건틀렛, 방패 따위가 무기고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로 토벌에 사용되는 보구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 가치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리라.
하지만.
“으음.”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보구들 사이에 앉아 있는 상혁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앞에 팔짱을 끼고 있는 형, 진혁이었다.
“우리가 단둘이 만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다만티움을 빼앗겼던 일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일까.
‘빌어먹을 놈, 그 쉬운 걸 실패할 줄이야.’
아다만티움을 훔치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떠올린 순간, 진혁을 바라보는 상혁의 눈빛이 타오르듯 이글거렸다.
허나 진혁은 분노의 눈빛을 차분히 받아넘겼다.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나 보군.”
“그건 사깁니다. 어르신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판정만 내리지 않았어도…….”
“가문의 규율에 따랐을 뿐이다. 너 역시 동의했고.”
말을 마친 진혁은 자신의 동생을 말없이 쳐다봤다.
“……더 할 말이 없다면 나가 주시죠, 곧 회의가 있어서.”
자신의 신경을 살살 긁는 진혁을 잠시 노려보던 상혁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하긴, 동의하지 않았으니 그런 일을 벌였겠지.”
이어진 진혁의 말에, 상혁은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상혁은 시치미를 떼며 팔짱을 꼈다.
대답 대신, 진혁은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구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상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기억 재생기?’
사람의 기억을 뽑아내 기록하는 무급의 보구.
별다른 기능이 없어 일상에서도 흔하게 사용되는 보구이지만.
‘저걸, 왜 들고 나온 거지?’
그걸 들고 나온 사람이 진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상혁의 머릿속에서 의구심이 피어오를 무렵, 진혁은 구슬 아래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구슬 위로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영상에 등장한 것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전무님, 죄송합니다.
“아니, 이게 왜!”
영상 속 검은 옷의 사내가 내뱉은 첫마디에, 상혁은 눈을 부릅떴다.
영상 속 남자는 다름 아닌, 그가 아다만티움을 탈취해 달라는 의뢰를 맡긴 자였으니까.
놀란 와중에도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쇼. 그러면……전무님! 서상혁 전무님!
“이 빌어먹을 놈이…….”
영상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상황을 파악한 상혁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꼬리가 밟혔다. 대체 어디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무리 무급의 흔해 빠진 보구라고는 하지만, 사용자가 실제로 경험한 기억만을 담는 기억 재생기는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증거.
‘이게 만약, 아버지에게 넘어간다면…….’
좋은 꼴을 보기는 힘들겠지.
‘그렇다면.’
그의 형, 진혁이 기억 재생기를 여기까지 가지고 온 이유는 뻔했다.
“……형님, 뭘 바라는 겁니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당하던 상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입술을 깨문 동생을 지긋이 바라보며.
“별건 아니다.”
진혁은 천천히 자신의 요구조건을 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