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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22화 (22/174)

22화

콰르르릉!

고층빌딩의 숲을 푸른 번개가 가로지른다. 시린 청광이 불 꺼진 여의도를 환하게 밝힌다.

이윽고.

쿠구구궁!

검은 안개에 집어 삼켜진 빌딩이 서서히 제 모습을 잃어 간다.

서서히,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부서져 내려앉는다.

그리고.

“이야…….”

아르카나에서 멀리 떨어진 빌딩의 옥상.

“설마하니, 계획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야.”

그곳에서, 한 남자가 아르카나의 붕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은 남자의 눈은 루비처럼 붉게 빛났다.

인류의 적, 마인의 증표.

“그것도 하필, 저 녀석이라니 말야. 운명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마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아르카나는 좀 더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야 했으니까.

구름 악어가 마기 구름으로 아르카나를 봉쇄하는 동안, 경매장의 물품들과 마인들을 회수하고 가문 간의 불화를 만들어 내는 것.

그중 채 절반의 목표도 이루지 못했으니, 마인이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쉬이익!

남자의 뒤에서 검은 바람이 일렁인 것은 그때였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가죽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쓴 남색 머리의 여자.

여자는 남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주님, 철수하셔야 합니다.”

“뭐야, 벌써 돌아온 거야?”

돌아선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무급과 정급 보구 열다섯, 병급 보구 하나와 마인 일부를 회수했습니다.”

“오, 정말? 역시 미령이라니깐, 그 짧은 사이에 챙겨 올 줄이야.”

대주가 감탄하자 미령의 뺨이 조금 붉어졌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붉어진 뺨을 감췄다.

“대주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가문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도 어차피 볼 일은 다 끝났으니까.”

스으으!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쓰며 마기를 끌어모았다.

마기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는 무너진 빌딩 옆의 공원을 바라봤다.

공원 한복판에 몸을 누인 천둥비룡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두 남녀가 그의 눈에 띄었다.

오 대 엽사 가문 중 둘, 이가의 장녀와 서가의 장남.

“그럼, 또 보자꾸나.”

쉬이익!

서진혁을 바라보던 남자는, 웃음소리와 함께 검은 바람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    *

무너져 내린다.

여의도의 검은 등대, 엽사들의 성지라 불리던 묵빛의 고층 빌딩이.

콰르르릉!

산산이 조각나 지면을 향해 가라앉는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후우.”

진혁은 조금 떨어진 여의도공원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카나는 재기하기 힘들겠군.’

본사인 빌딩은 물론, 그 안의 값비싼 경매 물품들과 이제는 죽거나 마인이 되었을 사람들까지 저 돌무더기 안에 묻혀 버렸다.

그들이, 과연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내가 물어내지는 않겠지만.’

그러지도 않겠지만, 굳이 분쟁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가나 서가, 대한엽사회가 나서서 처리해 주리라.

그게 이 나라에서 오 대 엽사 가문이 가진 무형의 힘.

―주, 주인님.

아르카나…… 아니, 아르카나였던 돌무더기를 바라보는 진혁의 머릿속에 다 죽어 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몸을 돌리자, 바닥에 납작 엎드린 천둥비룡의 떨리는 눈이 그와 마주쳤다.

―몸이, 안 움직이는데요? 아우 답답해…….

천둥비룡, 멜리나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그녀의 척추를 포함한 신경계가 완전히 타 버렸으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

망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으리라.

‘곧 회복시켜 주지. 조금만 참아라.’

―으, 너무 답답하단 말이에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한 대가니,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병급의 괴수라지만, 망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육체를 통제하는 능력은 부족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억지로 제어하려 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우선은 몸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라, 그러면 달라질 것이다.’

과거 마법사였던 멜리나가 얻은 육체는 병급의 괴수.

지금은 나는 것조차 버거운 그녀였지만, 언젠가 육체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외눈박이를 만날 수 있겠지.’

자신의 마나홀을 부순 갑급의 괴수.

놈을 떠올린 서진혁의 눈이 빛났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괴수라니, 한동안 시끄럽겠네.”

상념에 빠진 그를 깨운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옮기자, 입에서 하얀 연기를 뿜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전례가 없는 일이니까.”

오 대 엽사 가문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이가와 서가.

두 가문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 제일의 안전지대에 괴수가 나타났으니, 조용하게 끝날 리 없다.

두 가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자들이라면 어떻게든 이 일을 부풀리고 드러내려 하리라.

“그래도 같이 싸운 정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당분간 몸가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나 나나, 가문을 거스를 수준은 아니잖아.”

“거스를 생각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그 근접성애자들이 네 능력을 반겨 주진 않을 것 같은데?”

직접 적과 부딪치는 것을 선호하는 세한에서, 괴수를 앞세워 싸우는 진혁의 능력은 분명 이질적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문제가 되리라.

설화가 지적하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그러나.

피식.

그녀의 말에, 진혁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뭐야, 왜 웃는 거야?”

“왜 벗어나야 하지?”

설화가 발끈했지만, 진혁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가문을 내 손에 넣는다면, 날 거스를 사람도 없을 것을. 안 그런가?”

“……재수 없는 자식.”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녀는,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성격이 보통이 아닌 처자로구려.

―그래도 능력은 확실하던데? 마나가 얼마나 진한지, 하마터면 시체도 못 남길 뻔했다고.

―이미 죽은 사람이 말은 잘하는군.

옆에서 두 망령이 설화를 보며 조잘댔지만, 진혁의 시선은 설화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진혁 님!”

세한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문양이 가슴에 박힌 보호구를 입은 자들.

세한보안의 호위 3팀이었다.

“진혁 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들 중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주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몸을 살폈다.

“전혀.”

“그러면 다행입니다만, 혹시 모르니 우선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진혁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를 세세히 살피는 주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마인이 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마기는 접촉한 것만으로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그 대상이 세한의 장남이라면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전에.”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젓고는, 그의 뒤쪽에 힘없이 누워 있는 천둥비룡을 가리켰다.

“저 녀석부터 옮겨 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주연은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번개로 빌딩을 무너뜨린 천둥비룡과 그 등에 서 있던 진혁의 모습.

주연은 뒤쪽의 괴수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진혁 님, 그러고 보니 대체 어디서 천둥비룡을…….”

“샀다.”

진혁의 답은 짧았다.

*    *    *

여의도에 병급 괴수가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서울…… 아니, 나라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한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다른 것도 아닌 괴수가 헤집어 놓았으니 당연한 일.

[여의도 사태, 두 가문의 대립이 만들어 낸 인재!]

[엽사들의 세력 다툼, 이대로 괜찮은가?]

[이제는 손을 잡고 화합해야 할 때.]

신문과 방송, 인터넷.

수많은 매체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되어 있는 이가와 서가를 공격했다.

수십 년간 반석 위에 세워져 있던 두 가문이 오랜만에 드러낸 빈틈.

그들을 부러워하던 엽사 가문과 길드의 합작이었다.

하지만.

“후우.”

여의도 사태의 중심에 선 진혁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에겐, 바깥의 쥐새끼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드디어 끝났군.”

마당 한복판에 뿌리를 내린, 어른 허리만 한 둘레의 보라색 나무.

사령수였다.

스으으―.

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색을 제외하면 평범한 나무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진혁과 망자들에게 질 좋은 흑마력을 공급해 주리라.

‘이제, 기초는 다진 셈이군.’

영지의 근간인 사령수를 심었으니, 초급의 경지는 넘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몇 그루를 더 심게 된다면, 그의 사령술은 금세 중급에 다다를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진혁 님.

―이 나무, 뭐야? 나무 주제에 무슨 힘이 이렇게 강해요?

―이런 건 생전 처음 보는구려.

진혁이 심은 사령수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망령들이 떠들어댔다.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 줄 녀석이다.’

진혁은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사령수를 심기 위해 사용한 흑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진혁 님.”

누군가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진.

“무슨 일이지?”

정신을 집중하던 진혁이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양복 차림의 사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진혁 님을 회장실로 데려오라는 명령입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두 손으로 그의 뒤쪽에 자리한 검은 세단을 가리켰다.

“지금 나가지.”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벗어 둔 외투를 대강 챙겨 입고 곧장 자동차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고 있나?”

“따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진혁은 출발하는 차 안에서 물었지만, 원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별수 없지.’

알고 싶다면, 아버지를 마주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푹신한 좌석에 기댄 진혁은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사이, 빠르게 칠성원을 벗어난 세단은 다리 건너 세한빌딩에 도착했다. 회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책상에 앉은 아버지, 서강진의 모습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진혁이 고개를 슬쩍 숙이자, 자리에 앉아 있던 강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진혁을 향해 다가왔다.

“여의도에서 큰일을 했더구나, 덕분에 가문 체면이 말이 아니야.”

“혹시, 제가 잘못했단 이야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강진은 고개를 저었다.

“세한을 시샘하는 피라미들이 달려드는 거야 항상 있던 일이지.”

“그럼…….”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휙!

말을 마친 강진은 책상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무언가를 무심코 받아 든 진혁의 시선이 손에 들린 물건으로 향했다.

[토벌 3팀]

[팀장 서진혁]

그의 이름이 적힌, 명찰이었다.

“진혁이 네가 원하는 대로, 토벌팀을 하나 더 창설할 거다. 이 시간부로 널 토벌 3팀의 팀장으로 임명하겠다.”

“감사합니다.”

“할 말은 그게 다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쯧, 십 년 만에 깨어나더니 성격만 버렸어.”

말과는 달리, 강진의 눈빛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것도 잠시, 그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바뀌었다.

“서 팀장.”

“네.”

조금 전과는 달라진 분위기.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 아니, 토벌 3팀의 팀장에게.

강진은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토벌 3팀은 인천을 담당구역으로 한다.”

“인천 말입니까?”

“그래.”

강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혁은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왜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거긴.”

“세한의 영역이 아니지.”

아들을 바라보며, 강진은 장난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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