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칠성원의 엽사들이 생활하는 기숙사는 만족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요정들의 아공간 마법을 응용해 만들어진 넓은 거주 공간과 강남에 가깝다는 지리적 요건.
두 가지 이유로, 서가의 엽사들은 칠성원 바깥의 아파트보다 기숙사를 더 선호했다.
“후우.”
그것은, 기숙사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난 주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금 샤워를 끝낸 것인지, 곰돌이 무늬가 그려진 파자마로 갈아입은 그녀의 머리를 하얀 수건이 덮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멍한 표정으로 하얀 침대에 걸터앉은 주연의 시선이 침실의 한쪽 구석에 풀어놓은 검으로 향했다.
“……오랜만이네.”
어제까지의 그녀였다면, 이 시간에 집에 들어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업무가 없는 시간에는 지칠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며 칠성무를 수련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휴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도무지 검을 쥘 엄두가 나지 않는다.
후우.
조금 전, 진혁과 있었던 일을 생각한 주연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이미 죽어 세상에 없다면 더더욱.
그녀의 입에서 씁쓸한 미소가 번져 나간다.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죄책감과 슬픔이 의식 위로 떠올라 심장을 찌른다.
‘그때, 조금만 더 빨랐다면.’
그랬다면, 던전은 붕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게이트가 역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놈이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온다.
완전히 잊어버렸다 생각했던, 그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다.
‘주연아, 넌 살아야 해. 알았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넌…….’
갑급 괴수, 지그문트를 향해 달려든 오빠의 마지막 유언.
그것이, 삼 품의 경지에 오른 그녀가 여전히 토벌 팀이 아니라 호위 팀에 붙어 있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그라면, 할 수 있을까.’
주연의 눈앞에, 손을 내미는 진혁의 모습이 떠오른다.
과거엔 나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다시 깨어난 그의 잠재력은 그녀조차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만약, 그녀가 도와준다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지그문트를.
주연의 시선이 침실 너머의 창문으로 향한다.
칠성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인공호수.
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강남의 야경.
“……미안,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
그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환영을, 그녀는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 * *
사령술사의 힘은 망자에게서 나온다.
그들이 다루는 흑마력과 온갖 비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죽은 자들의 군대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흑마력을 많이 지니고 있다고 한들, 흑마력을 쏟아 낼 망자가 없다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마찬가지.
그것은 아스칸에서 사령술의 극에 올라 망령군주라 불렸던 파슬란 드 노미크롬, 진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병사들을 모아야겠어.’
자신을 가까이에서 지켜줄 가디언들은 준비가 되었지만, 고작 가디언 둘만으로는 군대라고 칭할 수 없다.
강력한 가디언을 보조해 줄 망자의 군세가 갖춰지고 난 후에야, 사령술의 중급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터.
‘망령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그 육체만 찾으면 되겠지.’
사람을 쓸 수는 없다.
세한의 이름을 포기하고 음지로 숨어들 것이라면 모를까, 양지에서 활동해야 할 그가 세간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진혁이 선택할 만한 방법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중, 진혁이 택한 것은 하나.
‘괴수의 뼈로 스켈레톤을 만든다.’
뼈로만 이루어져 좀비보다 가볍고 날랜 데다, 부서져도 쉽게 재생할 수 있는 망자들.
그들이라면 충분히 전투에서 가디언들을 보조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망자의 군세를 만들어 낼 대량의 뼈를 어디서 구하느냐였지만.
‘도움을 구해야겠군.’
진혁은 괴수의 뼈를, 그것도 대량으로 구할 만한 곳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뭘 시키려고 온 게야?”
진혁이 들어오자, 세한금속의 사장인 난쟁이 글리펜이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게임 중이었는지, 작달막한 양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요란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수 뼈를 구하고 싶습니다.”
“괴수 뼈?”
“세한금속에서도 괴수 뼈로 만드는 제품 라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있기야 하지, 괴수 뼈 라인은 가벼워서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근데 괴수 뼈는 뭐에다 쓰게? 집에 박제라도 할 거야?”
종종 괴수 사냥을 자랑하기 위해 집에 장식해 두는 엽사들이 있기에 꺼낸 말.
허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쓸 데가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괴수 뼈 고아 먹는다고 마나가 늘어난다는 거 다 헛소리다. 그러려고 온 거면 그냥 마정석이나 구해 봐.”
“그런 건 아닙니다. 값은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혁은 안주머니에 넣은 지갑에서 검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앞면에 북두칠성 문양이 새겨진, 토벌 3팀의 팀장 자리에 오르면서 받은 진혁만의 블랙카드.
한도가 무제한은 아니었지만, 괴수 뼈 한 무더기를 사기엔 부족함이 없으리라.
“뭐, 그거야 당연한 거고.”
하지만 글리펜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괴수 뼈도 종류마다 다르긴 하지만, 우리도 넉넉하진 않아. 제법 인기 있는 라인이라서.”
“그럼, 따로 원하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뭐, 그런 건 없긴 한데…… 잠깐.”
스마트폰을 놓고 머리를 긁적이던 글리펜은 무언가 생각난 듯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 식귀, 아직 데리고 있지? 저번에 아다만티움 씌운.”
“지금은 칠성원에 있습니다만.”
“그래, 그래, 그럼…….”
진혁의 대답을 들은 난쟁이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야, 꼬맹아.”
“네.”
“그 식귀, 내가 좀 빌려 가도 되냐?”
“……괴수 손까지 빌릴 만큼 바쁘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 말에 글리펜은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니고, 좀 있으면 엽사 박람회가 있잖아?”
“엽사 박람회라면.”
“거, 인천에서 매년 하는 거 있잖아.”
인천.
글리펜의 그 단어가 나온 순간, 진혁은 흥미를 느꼈다.
엽사 용품과 길드들이 모여 자신들의 신상품과 업적을 홍보하는 박람회.
그것도, 인천에서 열리는 박람회라면.
‘인천 길드들도 관심을 갖겠지.’
어쩌면, 일이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그래. 안 그래도 홍보를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복덩이가 가까운 곳에 있었구만?”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글리펜은 자신의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하며 실실 웃었다.
“어르신,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아, 별건 아냐. 그냥…….”
잠시 말을 멈춘 난쟁이는, 곧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서 있기만 하면 돼.”
* * *
송도.
인천 앞바다를 메워 만든 거대한 신도시는 만들어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피로나행 게이트와 국제공항이 가까운 덕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축에 드는 엽사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 잡은 거대한 컨벤션단지.
일 년에도 수십 개의 행사와 전시가 이루어지는 전시장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제21회 엽사 박람회]
엽사와 괴수에 관련된 모든 분야의 기업과 길드가 참여하는, 한국 최대 규모의 엽사 관련 행사.
당연히 괴수 토벌을 그룹의 기반으로 삼은 세한이 이 자리에 빠질 리 없었다.
“어떠냐, 제법 괜찮지 않아?”
“나쁘진 않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이 글리펜이 직접 손을 봤으니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글리펜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진혁은 세한금속의 부스를 둘러봤다.
전시장의 부스 중 가장 큰 곳을 할당받은 덕에, 세한금속의 넓은 부스에는 세한에서 직접 생산하는 온갖 종류의 엽사용 병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옆에는 회사의 역사와 세한의 주요 이력 등이 벽에 새겨져 있는 것이, 마치 박물관을 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근데, 저긴 뭡니까?”
부스를 찬찬히 둘러보던 진혁은, 공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공터를 가리켰다.
바닥에 하얀 타일을 깔아 두고 선을 그어 둔 것이, 마치 훈련장의 연무대와도 같은 모습.
그 말을 들은 글리펜은 뭘 그런 걸 묻냐는 투로 툴툴댔다.
“그…… 대련 이벤트 말입니까?”
세한금속의 신제품을 장착한 식귀, 성준과 대련을 벌여 이기면 신제품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
“그래. 장비를 갖춰 입은 식귀와 대련을 벌일 수 있다니, 다른 건 몰라도 주목은 확실하게 받을 것 아니냐?”
분명, 급조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계획.
“어르신 수완이 제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시군요.”
“장인은 뭐, 땅만 파 먹고 사는 줄 알아?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값도 잘 받아야지, 흐하핫!”
진혁은 호탕하게 웃는 글리펜에게 토를 다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자리에 어르신까지 나올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꼬맹이 네놈도 마찬가지 아냐? 그냥 식귀만 빌려 달라니까는.”
“저야 식귀를 통제하려면 가까이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늦잠 자면서 말대꾸만 늘어서는.”
난쟁이는 헹하고 콧방귀를 뀌곤 말을 이었다.
“그게, 올해 박람회는 좀 다르단 말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뭐냐면…… 아, 젠장. 야, 야.”
글리펜은 말을 하려다 말고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진혁을 향해 몸을 숙이라며 손짓했다.
영문도 모른 채 진혁이 몸을 숙이자, 글리펜은 주변을 두리번대고는 그의 귓가에 대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번엔, 성녀가 올 거다.’
순간.
‘……성녀라.’
진혁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