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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26화 (26/174)

26화

그 힘을 감히 측정하기 힘든 일부의 괴수를 제외하면, 괴수의 등급은 갑을병정무(甲乙丙丁戊)의 다섯으로 나뉜다.

그중 아래에서 두 번째, 정급에 속하는 식귀는 평범한 엽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존재.

그렇기에, 어디서건 거대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는 식귀들에 대한 엽사들의 인식은 전투력측정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엽사 박람회에 참여한 사 품의 엽사 강준식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쾅! 콰과광!

“뭐, 뭐야, 이 자식!”

강준식이 가지고 있던 식귀에 대한 선입견은, 이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크으으으!”

식귀가 한차례 울부짖고는 손에 쥔 거검을 휘두른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크기의 무시무시한 흉기.

하지만 베테랑 엽사인 준식이 당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떻게, 식귀가 이런 검술을!’

본능에 따라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던전의 식귀와는 다르다.

머리에 은색 투구를 뒤집어쓰고 손을 새까만 금속으로 물들인 식귀의 검에 담긴 것은, 북두칠성을 연상케 하는 형(形).

그리고 형과 형 사이에서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는 식(式).

그가 아는 한, 이 두 가지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검술, 아니 무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세한의 엽사가 통제한다지만, 어떻게 식귀한테 칠성무를 가르칠 수 있는 거냐고!’

이미, 이 대련은 엽사가 정급 괴수를 일방적으로 사냥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식귀가 엽사에 버금가는 기술을 손에 넣은 순간, 엽사의 우위는 사라졌다.

‘칠성무를 펼치는 식귀라니, 그딴 걸 어떻게 이겨?’

쐐애액!

칼을 맞댈 순 없다.

거대한 덩치를 지탱하는 근육에서 비롯되는 식귀의 초인적인 근력은 마나를 다루는 엽사의 힘을 상회한다.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받아 낸다면 검이나 팔이 부러질 게 뻔하니, 답은 모조리 피해 내는 것뿐.

물론.

‘말이 쉽지, 빌어먹을!’

식귀의 몸으로 펼치는 인간의 검술을 모조리 피해 낼 수 있었다면, 그가 사 품에서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뿌드드득!

식귀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막아 낸 순간, 준식의 팔은 그대로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악!”

“쯧쯧, 식귀를 정면으로 상대해? 초보도 안 할 짓이잖아.”

“내일 던전에선 저런 놈이 없어야 하는데.”

“어이구, 쪽팔리겠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준식을 바라보는 엽사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식귀의 검을 막아 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보기엔 너무나 초보적인 실수였으니까.

“자, 이번에도 실패! 상품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저희 세한의 신제품을 쥔 식귀와 겨뤄 보실 분, 계십니까?”

덕분에 신난 것은 엽사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은 세한금속과 글리펜이었다.

본래의 목표였던 성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식귀를 구경하러 모인 엽사들 중 일부가 즉석에서 신제품 구매 계약을 체결한 덕분.

“오 분! 오 분 안에 식귀를 무릎 꿇릴 수 있는 분께 저희 세한의 신제품 풀세트를 드리겠습니다!”

“저요, 저요!”

“이번엔 내 차례라고!”

박람회의 다른 부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분위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군.’

진혁은 부스 옆에서 엽사들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 정도라면, 어르신 말대로 무명교의 관심은 끌 수 있겠어.’

실제로 무명교에 납품을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오랜만에 사람과 검을 맞대니 재밌군요, 힘 차이가 너무 난다는 게 아쉽기는 합니다만.

‘그럴 것이다. 네 현재 상태라면 삼 품의 엽사와 겨뤄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아쉬워하는 성준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 품의 엽사부터는 무기에서 오러를 내뿜을 수 있다지만, 성준의 손에 코팅되어 있는 아다만티움은 오러에도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고작해야 사오 품의 엽사 따위에게 패배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삼 품 이상의 엽사들과도 검을 맞대 보고 싶군요.

‘운이 좋다면, 여기 있는 동안 만날 수도 있겠지. 안 된다면,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

―감사합니다, 진혁 님.

“크으으으.”

진혁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성준의 입에서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어?”

“뭐, 뭐야?”

부스를 빙 둘러싸고 있던 엽사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시선을 돌려 소란의 정체를 확인한 진혁은 표정을 굳혔다.

‘드디어, 왔군.’

무명교를 상징하는 회색의 신관복을 입은 금발 소녀와 그 옆에서 차가운 눈빛을 쏘아 내고 있는 은발의 기사.

‘……고작 성기사 한 명만 데려온 게 조금 이상하긴 하다만.’

분명, 무명교의 성녀와 성녀를 호위하는 성기사였다.

*    *    *

“와, 잘못 본 게 아니었네요. 오우거가 검을 휘두르다니.”

세한금속의 부스에 다가온 무명교의 성녀, 클레어는 은색 투구를 쓴 거인을 올려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호위, 렌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래 봐야 국제등급분류에선 C등급에 불과한 중하급 괴수입니다.”

“그래도, 쟤는 몽둥이가 아니라 검을 들고 있잖아요?”

“몽둥이를 들건, 검을 들건, 달라질 건 없습니다. 괴수들의 지성으로는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없으니까요.”

검은 높은 숙련도를 요하는 무기다.

검술이라고는 배운 적도 없는 오우거 따위에게 검을 쥐여 줘 봐야, 날카로운 몽둥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다섯 살 때부터 검을 잡아 온 그녀의 눈엔 오우거의 손에 들린 거검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이름 없는 신의 대행자를 뵙습니다.”

부스에서 난쟁이가 짧은 다리를 움직여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난쟁이가 성녀 앞에서 엄숙히 고개를 숙이자, 클레어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름 없는 신의 가호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당신이 이곳의 담당자이신가요?”

“예, 세한금속이라는 회사를 맡고 있는 글리펜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성녀는 손가락을 뻗어 텅 빈 무대 위에 선 거대한 식귀를 가리켰다.

“그럼, 저 오우거도 이곳에서 부리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희 세한 소속의 헌터가 직접 통제하는 것이지요.”

“신의 대적자인 괴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그렇지요. 지금은 저 오우거와 대련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인데, 아직 승리한 사람이 없습니다.”

“와, 정말요?”

“오우거 따위에게 지다니. 한국의 헌터들이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감탄하는 클레어와는 달리, 렌은 그 말을 듣고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대일이라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C등급의 괴수다.

정식으로 헌팅라이센스를 받진 않았지만, 성전기사단의 견습기사인 그녀의 실력은 C급 헌터와 B급 헌터의 사이.

오우거 따위는 훈련 과정에서 수도 없이 베어 넘겼으니, 그녀가 비웃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 렌은 저 오우거를 이길 수 있는 건가요?”

클레어는 렌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갑옷을 걸치고 있긴 하지만, 어렵진 않습니다.”

“그럼, 한번 보여 주는 건 어때요? 이름 없는 신의 검인 성전기사단의 힘을 보여 줄 기회잖아요?”

그녀의 경건한 목소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퍼지는 신성력.

하지만 렌을 바라보는 성녀의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도발이었다.

“……성전기사단의 기사는 함부로 검을 뽑아서는 안 됩니다. 성녀님의 곁에서라면 더더욱.”

클레어와 다니며 이미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해 본 터라, 렌은 그녀의 도발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헤에. 하지만 싸워 보지도 않고 넘어가면, 사람들이 성전기사단을 비웃지 않을까요?”

성녀의 천진난만한 얼굴 속, 짓궂은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성전기사단의 힘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철없는 장난인 줄 알면서도, 렌은 그녀의 술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녀로서의 마음가짐을 갖추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지.’

교단의 평범한 소녀가 성녀의 자리에 오른 지 고작 일 년.

이 정도 장난쯤은 애교로 봐 줄 수 있었다.

“어, 어?”

“기, 기사님?”

스릉!

누가 말리기도 전, 무대에 올라선 렌은 곧장 등 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철컥!

검집 속에서 세 겹으로 말려 있던 검신이 펴지며 순식간에 이 미터 길이의 장검으로 탈바꿈한다.

성전기사단을 상징하는 참마검(斬魔劍), 클레이모어.

“덤벼라, 괴수여.”

마를 베는 검을 손에 쥔 소녀가, 자신보다 세 곱절은 거대한 괴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진혁 님, 어떻게 합니까?

검을 마주한 성준은 난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명교의 성기사가 뽑아낼 신성력도 위협적이었지만.

―혹시나 성기사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진혁 님께 피해가 갈지도 모릅니다.

상대는 이름 없는 신의 지상 대행자인 성녀의 호위이니, 운이 없다면 외교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

허나, 돌아온 답은 짧았다.

‘변하는 건 없다.’

전력으로 상대해라.

자신의 키보다 거대한 검을 들이댄 은발의 소녀를 바라보며, 진혁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    *    *

렌 슈미트.

태어날 때부터 교단에 맡겨져, 이름 없는 신의 검이 되기 위해 키워진 성전기사단의 일원.

‘곧, 역대 최연소 기사단원에 이름을 올리겠군. 이름 없는 신께서 기뻐하겠어!’

‘자네라면, 성녀님의 호위를 맡겨도 될 것 같네. 성녀님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경험을 쌓고 오게나. 그러고 나면 오러도 자연스럽게 꽃피울 것이니.’

나이의 문제일 뿐, 그녀가 가진 잠재력은 교단의 고위 사제와 기사단장도 관심을 가질 만큼 대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작 견습기사의 신분으로 성녀의 호위를 맡을 수는 없었으리라.

‘내 검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녀의 검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건, 평범한 오우거가 아냐.’

바위 같던 그녀의 자부심은, 동방의 조그만 나라에서 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챙! 채챙!

오 미터 가까이 되는 키의 거인과 그 거인이 휘두르는 수 미터의 장검.

그리고 괴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검술.

함께 연결되기 힘들어 보이는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지는 순간,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채채챙!

‘힘에서 밀린다.’

상대는 힘으론 B급 괴수와도 맞설 수 있는 오우거니 당연한 일.

이름 없는 신의 권능을 온몸에 가득 채웠음에도, 상대의 검을 정면에서 받아 내지 않고 흘려 냈음에도 팔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름 없는 신의 가호를 받아들인 그녀의 신체 능력은 인간을 초월했지만, 거대한 육신을 가지고 고도의 검술을 사용하는 괴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무너진다고?’

앙다문 입술 사이로 선혈이 새어 나온다. 클레이모어의 날은 이미 이가 나가 버렸다.

강철조차 베어 낼 수 있는 마나의 칼날,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녀의 패배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여기서, 꺾일 수는 없어.’

후회스럽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기사단과 이름 없는 신을 입에 담은 순간부터, 이 대련은 그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나는, 이름 없는 신의 검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렌은, 그녀는 이 자리에서 무너질 수 없었다.

“……이름 없는 신께, 바랍니다.”

그녀가 패배한다는 것은, 그녀를 검으로 택한 신이 패배한다는 것.

“당신의 검에게.”

그렇기에, 그녀는 바랐다.

“당신의 적을 멸할 힘을.”

비록, 아직은 다룰 수 없는 힘일지라도.

파아아앗!

새하얀 무대 위를 회색의 아우라가 환히 밝혔다.

그 중심에 선 것은, 성전기사단의 견습기사인 렌.

그녀의 머리칼과 닮은 은색의 불꽃이, 그녀의 검을 포함한 전신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레, 렌! 무슨 짓이야.”

기사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눈치챈 순간, 성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벗어던지고는 놀라 소리쳤다.

“이런 자리에서 그랬다간…….”

장난은, 더 이상 장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녀가 경악한 표정으로 불타오르는 호위기사를 바라보던 그때.

‘성화(聖火)를 강림시키다니, 미쳤군.’

환하게 타오르는 성기사를 바라보며,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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