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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29화 (29/174)

29화

[……송도의 엽사 박람회는 큰 문제 없이 막을 내렸다.

행사 도중 세한금속의 부스에서 부상자가 제법 나오기는 했지만, 세한그룹의 빠른 대처 덕분에…….]

“그래서 주는 거니까,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구.”

텅! 텅!

왼손에 신문을 쥔 글리펜이 다른 손으로 1톤 트럭의 적재함을 치면서 씨익 웃었다.

난쟁이의 키를 훌쩍 넘기는 트럭의 적재함을 가득 채운 것은, 세한금속에서 무구의 재료로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괴수용 뼈.

“녹요정, 비늘걸이에 식귀, 각다귀, 비룡…… 종류별로 담아 놨으니까 필요한 대로 쓰면 돼.”

“제법 양이 많군요.”

적재함 위로 하얗게 쌓인 뼈 무더기를 보며, 진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양이면, 망자들을 만드는 데에는 충분하겠어.’

아니, 충분하고도 남아서 예비용으로도 쓸 수 있을 정도.

“근데, 꼬맹아. 이 뼈는 진짜 뭐에다 쓰려는 건데?”

생각에 잠긴 진혁을 바라보던 글리펜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괴수 토벌에 사용할 겁니다.”

“그럼, 차라리 내가 무기로 만들어 주랴? 저게 보기엔 많아 보이지만, 여기저기 깎아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고. 그럴 바엔 그냥 여기서 만들고 가는 게 낫잖아.”

“무기를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그래?”

“그보다.”

잠시 말을 멈춘 진혁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걸 봐 주십시오.”

“으잉? 이건 또 뭔데?”

서류 봉투를 받아 든 글리펜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봉투 안에 든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흐음, 이건…….”

서류를 보던 글리펜은 곧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종이 안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음미했다.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만드는 거야 어렵진 않지만, 그래도 규모가 있으니까 시간은 제법 걸릴 거야. 근데.”

글리펜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건 거의 백 년 전에나 쓰던 건데, 뭐에다 쓰려는 거야? 유람이라도 다니려고 그래?”

글리펜은 다 읽은 서류를 접어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진혁을 이상한 놈처럼 바라봤다.

그러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토벌에 사용할 겁니다.”

“이런 걸, 요즘 시대에?”

“네.”

글리펜의 눈동자는 의구심으로 가득했지만,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이것이, 새 시대를 열 겁니다.”

*    *    *

“대체, 성녀가 왜 형님 옆에 붙어 있는 거야?”

서상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정보 같은 건 없어? 성녀건, 형님이건, 뭐건 간에.”

“죄송합니다. 아직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만, 이미 알려져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은…….”

“쓸모없는 것들.”

터질 것 같은 상사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 낸 세한보안 토벌사업부의 이인자, 전필용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상혁은, 곧 한숨을 푹 쉬었다.

“성녀가 왔으니, 당연히 형님을 끌어내릴 줄 알았는데…….”

상혁은 한국에 무명교의 성녀가 방문한 이유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가 무명교에서 빌려 온 다음, 형에게 빼앗긴 보물.

‘초금속 아다만티움.’

결국, 빌려 간 자신이 되찾아오는 데 실패했으니 무명교가 직접 손을 쓰러 온 게 아닐까?

성녀와 그 호위가 입국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엽사 박람회 전까지는.’

박람회장에서 사고가 일어난 뒤로, 일은 그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상처를 입은 성녀의 호위기사가 세한의료원에서 퇴원한 뒤, 둘은 진혁과 행동을 함께했다.

성기사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 다름 아닌 진혁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상혁이 알고 있는 정보는 극히 일부다.

드문드문 끊겨 있는 정보들 사이의 빈틈을 채운 것은 끝없는 의심과 비약, 그리고 왜곡.

“……설마.”

의심으로 가득 찬 그의 머릿속에, 최악의 결론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형님이, 무명교와 손을 잡은 건가?”

무명교가 큰형의 뒤를 봐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자, 상혁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무명교가 서가의 일에 직접 간섭할 수야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명교는 세계 최대의 종교 집단이다.

간접적인 영향만으로도 그의 형에겐 충분한 도움이 되리라.

‘내 영향력은 그만큼 약해질 거고.’

한쪽이 얻으면 한쪽은 잃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게임.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줄 알아?’

상대를 압도하진 못할지라도, 동등해질 필요는 있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잡아먹힐 뿐이니까.

“……인천에 연락해.”

“예? 하지만 지난번에는…….”

“아직도 모르겠어? 상황이 뒤집혔다고! 조금만 더 지나면 너랑 내 목에 칼이 들어올 거란 말야!”

“아, 알겠습니다.”

상혁이 내지르는 고함을 차마 이기지 못한 필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형님, 어디 해봅시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

뿌드득.

얼굴을 일그러뜨린 상혁의 턱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빙 둘러싼 황토색 돌담.

챙! 채챙!

그 너머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크으으으!”

“하앗!”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것은, 괴수 특유의 흉포한 울부짖음과 여자의 날카로운 기합 소리.

식귀 성준과 성기사 렌이 칼을 맞대는 소리였다.

채채챙!

둘의 검이 순식간에 몇 번이고 서로를 스친다.

직접 부딪치지 않고 흘려 낼 뿐이었지만, 철과 철이 충돌할 때마다 만들어지는 충격파가 마당 한구석에 자리 잡은 사령수를 흔들어 댔다.

그렇게, 서로가 수십 번의 검격을 교환한 끝에.

“헉, 허억.”

체력을 모두 써 버린 성기사는 무릎을 꿇었다.

“레, 렌!”

그 순간, 대청마루 위에서 숨죽이며 대련을 지켜보던 클레어가 놀라서 뛰쳐나왔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예요? 빨리 봐 봐요.”

하지만 렌은 손을 들어 성녀를 멈춰 세웠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성녀님. 조금, 지쳤을 뿐입니다.”

그 말대로, 렌은 남아 있는 힘을 다 쓴 것일 뿐이었다.

그녀가 걸친 성전기사단의 회색 정복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고,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은 격렬한 대련에 헝클어졌다.

정신없이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피한 팔다리는 온통 흙먼지투성이.

마당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렌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고맙……다.”

“크으으으.”

이름 없는 신의 검인 성기사가 그 대적인 괴수에게 고개를 숙이는,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

하지만 기사는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신의 검이 되고자 한다면, 스승을 따져서는 안 된다.’

신성기사단의 견습기사답게, 그녀는 기사단의 이념에 충실했다.

“기다려요, 렌. 금방 회복시켜 줄 테니까. 이름 없는 신이시여…….”

신성력을 끌어 올린 클레어가 기도를 올리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렌의 몸에 활력이 돌아온다.

“성녀님, 신법을 너무 자주 쓰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헤헤, 괜찮아요. 이름 없는 신께 받은 선물을 묵혀만 둘 수는 없잖아요?”

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녀를 바라봤지만, 클레어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필요할 땐 써야죠. 그게 이름 없는 신께서 절 성녀로 지목한 이유니까요.”

과거의, 성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철부지였다면 입에 담지 않았을 이야기.

분명, 클레어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헤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렌이 고개를 숙이자, 성녀는 바보처럼 웃었다.

부우우웅!

담벼락 너머에서 우렁찬 엔진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당에 자리하고 있던 두 사람과 식귀 하나, 천둥비룡 하나가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셨군요, 진혁 님.

―오셨다, 오셨어!

“크으으.”

대문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트럭의 조수석에 탄 것은, 다름 아닌 서진혁.

주인을 확인한 식귀와 천둥비룡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른 둘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저게 뭐, 뭐.”

“……뼈?”

그녀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트럭의 적재함 위에 가득 쌓여 있는 뼈 무더기들.

“아니, 저 뼈들은 다 뭐예요? 수프라도 끓여 먹으려고요?”

클레어는 뼈 무더기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진혁의 대답은 짧았다.

“간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간섭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그게 간섭이다.”

“아니, 진짜.”

성녀의 물음을 한 귀로 흘린 진혁은, 짐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순식간에, 열린 틈으로 해골 더미들이 마당에 와르르 쏟아졌다.

“이만하면 얼추 맞겠군.”

마당 위에 야트막이 쌓인 뼈 무덤을 보며 그 수량을 가늠하던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령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으으!

진혁의 인지에 따라, 사령수의 줄기 속에 녹아 있던 흑마력이 그의 전신 모공으로 파고든다. 피부 아래 모세혈관을 가득 채운 검은 피가 일시에 가슴 한가운데 위치한 검은 심장으로 모여든다.

두근! 두근! 두근!

백 퍼센트, 아니 그 이상의 흑마력을 빨아들인 심장이 빠르게 고동친다. 새롭게 모여든 흑마력이 심장에 남아 있던 흑마력과 섞여 새로운 힘으로 변모한다.

“이게 대체…… 뭐야?”

흑마력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클레어는 진혁과 나무 사이를 오가는 기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마나도, 신성력도, 마기도 아냐.’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에너지.

이를 느낀 것은 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 검에서 나오던…….’

이미 흑마력과 한번 마주쳤던 그녀는, 기운을 느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근! 두근!

그 순간에도, 진혁을 감싼 흑마력은 심장과 함께 맥동했다.

어느새 새까맣게 물든 그의 오른손 위엔, 낙성당의 망령들을 담은 주먹만 한 수정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망령이여.”

흑마력을 머금은 사령술사의 목소리가 수정구슬에 담긴 영혼을 진동시킨다. 명계의 이름으로 맺은 계약의 힘이 내부의 망령을 강제한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체내의 흑마력이 수십, 수백 갈래로 뻗어 나간다. 뼈 무더기로 파고든 흑마력의 실이 그물처럼 얽히고설킨다.

이윽고.

“네 영혼을 그릇에 옮겨 담아라.”

진혁의 입에서, 계약의 발동을 알리는 마지막 언령이 구축된 순간.

―육체!

―괴수를 죽일 육체다!

―육체에!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정구슬 속 망령들이 밖으로 뛰쳐나간다.

괴수에게 죽임을 당해 지상을 떠돌던 엽사의 영혼들이, 한을 품은 채 적의 시체를 파고든다.

딸깍! 딸까닥!

망령을 받아들인 뼈 무더기들이 저마다 형태를 갖춰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진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준비되었군.’

괴수를 도륙할 망자의 군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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