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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48화 (48/174)

48화

여의도의 밤은 화려하다.

서울 안의 서울이라는 별명처럼, 두 가문의 비호 아래 성장한 여의도의 수많은 고층 빌딩들은 한밤중에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중 하나, 세한호텔 본관 32층에 위치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

하루 숙박비만 천만 원을 넘는 최고급 객실의 소파에서, 두 남자가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 만난 지 십 년도 넘었군그래.”

클래식한 검은 정장에 외알 안경을 낀 푸른 머리의 남자.

이가의 가주, 이정은 말과 함께 천천히 찻물을 삼켰다.

“그게 누구의 잘못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 말을 듣던 서강진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이정의 표정이 조금 난처해졌다.

“어쩔 수 없었네. 딸아이가 혼례도 치르기 전에 과부가 될 판인데, 방법이 있었겠나? 자네가 여(余)의 처지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터.”

“최소한, 그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파혼하지는 않았겠지. 자기만 왕인 줄 아는 누구랑은 다르니까.”

“육백 년을 이어 온 법도에 따랐을 뿐이네.”

“할아버님이 아니었다면 경복궁에서 쫓겨났을 주제에, 육백 년은 얼어 죽을.”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여를 십 년 만에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있지 않겠나.”

마지막 말에 기분이 조금 상했는지, 이정의 푸른색 눈썹이 슬쩍 치솟았다.

“그래, 잔소리는 이쯤에서 그만해야겠지.”

그 말에 강진은 속에 남아 있던 말을 잠시 밀어 두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강화도를 넘기게. 그러면 옛일은 잊어 주지.”

“강화도?”

그 말에, 이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조소했다.

“생각보다 서가에 여유가 있었나 보군. 그 죽음의 섬을 탐낼 줄이야.”

강화도는 한강과 서해 사이에 위치한 섬이자 서울의 방패.

한때 한반도의 주인이었던 이가에서 강화도를 노리지 않았을 리 없다.

이십 년 전에는 착호갑사대를 포함한, 이가의 엽사와 고렘들 대부분이 강화도로 진격하기도 했었고.

단지, 강화도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수의 파도를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을 뿐.

“충고하겠는데, 거긴 늪이야. 잠깐 괴수들을 밀어낼 순 있어도, 점령하는 건 불가능한 땅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포기하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정은 고개를 저으며 조소했다.

강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도 여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의 입가엔 영문 모를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장남만 보낼 생각이야.”

“……장남이라면, 서진혁?”

“파혼은 쉽게 하더니, 용케 이름은 안 잊고 있었군.”

강진은 비아냥거렸지만, 이정의 눈은 동그래졌다.

“……자네, 장남을 버릴 셈인가? 그 섬에 혼자 보내는 건 미친 짓이란 걸 잘 알 텐데.”

어떤 엽사도 혼자서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괴수를 감당할 수는 없다.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거라면 모를까, 혼자서 수많은 괴수들을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녀석이 결정한 일일 뿐이야.”

그러나 강진은 그 말에 잠시 코웃음 치고는, 이정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강화도는 어떻게 할 텐가?”

그 물음에 이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서진혁이 죽는다면, 곤란하다.’

그렇게 된다면, 서가와의 연결 고리를 다시 복구하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 될 터.

약혼을 다시 추진해 보려던 그에겐 좋지 않은 일이다.

“거, 답답하구만. 어차피 못 먹을 거, 넘겨주면 될 것을.”

잠시 생각에 빠진 그를 바라보던 강진이 한소리를 하고서야, 이정은 입을 열 수 있었다.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도록 하지. 원한다면 지원해 줄 용의도 있네. 그리 많지는 않네만.”

“……지원?”

“착호갑사대에서 한 명을 보내도록 하지. 한 사람보단 두 사람이 나을 테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대신.”

허나, 이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혼례를 다시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는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거?”

“여는 허언을 입에 담지 않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정의 눈빛에, 강진의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    *

덕수궁 석조전에서 가장 거대한 방.

그곳을 통째로 사용하는 착호갑사대의 장, 이설화의 심정은 복잡했다.

“후우.”

곰방대에서 한껏 빨아낸 푸른 연기를 허공에 내뱉어 봤지만, 가슴만 답답해질 뿐 머릿속이 헝클어져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가주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직 마음이 있느냔 말이다.’

“……이제 와서 갑자기 그런 말씀이라니.”

전날의 일을 떠올린 설화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휘었다.

마음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타의로 묶인 관계였으며, 타의로 풀어진 관계였으니까.

처음부터, 그녀의 감정이 개입될 구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가 서진혁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설화가 가문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였다.

‘보구가 완성되는 대로, 에피로나로 떠야겠어.’

가문의 손이 미치는 한국을 떠나, 이계에 새 터전을 잡는 것.

그것만이 설화가 가문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역시, 아바마마껜 거절한다고 말씀드려야겠지.”

어차피 자신은 언젠가 가문을 떠날 몸.

굳이 여지를 남겨 놓을 필요는 없었다.

설화는 곰방대를 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으로 돌아가서, 아바마마께 말씀드리는 거야.’

그러면 끝날 일이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녀의 걸음이 망설임 없이 문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은 설화가 그대로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그러니 아직도 가문에 얽매여 있는 것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느닷없이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십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군.’

서진혁.

아르카나에서 그가 자신을 향해 비웃듯이 건넸던 말.

“……이제 별게 다 떠오르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지 못했다.

‘가문을 손에 넣는다면, 날 거스를 사람도 없을 것을. 안 그런가?’

뒤이어 떠오른 서진혁의 말이,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던 미련을 붙잡았다.

‘가문을, 손에 넣는다라.’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행해 왔다.

육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가에서 여인의 몸으로 지존의 자리를 차지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가문을 얻는 대신 떠나는 것을 택했다.

허나.

‘……정말로, 불가능한 거야?’

삼 품의 엽사.

이가의 최정예, 착호갑사대의 장이자 가주의 첫째 자식.

엄밀히 말하면, 그 외의 결격사유는 없다.

단지.

이가의 여인들 중 아무도 가주라는 자리를 노리지도, 노릴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

“……가문에 끌려다니는 것보단, 가문을 끌고 다니는 게 낫긴 해. 틀린 말은 아냐.”

그렇다면.

약혼을 거절할 필요가 있는가?

‘……서진혁을, 서가를 내 힘으로 만들 수 있다면 가주가 되는 데 도움은 되겠지.’

서진혁은 이미 삼 품의 엽사이자 서가의 장남.

수려한 외모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능력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될 존재다.

가능하다면 데릴사위로 데려와야겠지만, 그의 존재만으로 그녀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리라.

“……서진혁 그 자식 생각이 문제긴 한데…….”

그건, 가서 부딪쳐 봐야겠지.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간 설화의 손엔, 어느새 통신용 마법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구슬에 뇌전의 마나를 불어 넣기도 전.

우우웅―!

손에 쥐고 있던 통신구슬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구슬 뒤로 보이는 가주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그녀는 통신구슬을 활성화시켰다.

*    *    *

망령군주 파슬란 드 노미크롬에게서 전해받은 진혁의 사령술은 어느덧 중급에 이르렀다.

아스칸의 망령군주, 파슬란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의 성취였지만.

‘아직은 부족해.’

특히 부족한 것은 흑마력.

그리고 흑마력으로 움직일 망자의 숫자였다.

진혁의 심장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것은 사실.

하지만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흑마력의 최대치엔 결국 한계가 있다.

몸이 버틸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흑마력을 끌어모은다면, 역류한 흑마력은 진혁의 몸에 남아 있는 생기를 몽땅 빨아들일 터.

‘내 몸을 망자로 만든다면 상관없겠지만…….’

죽은 시체의 몸으로 세상에 나섰다간 괴수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니, 그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

‘강화도에 영지(靈地)를 건설한다.’

빼곡히 심어진 사령수들은 마르지 않는 흑마력을 제공할 것이고, 영지를 넓히면서 죽인 괴수들은 망자 군단의 신병으로 합류하게 되리라.

과거, 수만의 망자 군단을 이끌었던 망령군주와 마찬가지로.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겠지.’

진혁이 세한금속까지 찾아온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뭐야, 또 왔어? 연락도 없이 여긴 웬일이야?”

진혁이 사장실에 들어서자,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난쟁이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르신을 찾아올 만한 일이 그리 많지는 않지요.”

“왜, 또 이 늙은이를 부려 먹으려고? 지난번에 갖다 준 뼈 무더기는 생각도 안 나냐, 이놈아?”

글리펜은 툴툴대며 입을 비쭉 내밀었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자리에서 내려와 진혁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은 품에서 설계도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번엔 별것 아닙니다, 수량이 조금 많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그래, 별거 아닌 것 같긴 하네. 이 정도면 며칠이면 뽑겠는데?”

진혁이 건넨 설계도를 펼쳐 본 글리펜은 슥 훑어보더니 콧김을 슥 하고 뱉었다.

“이건 송곳이고, 요건 원판인가? 뭐, 괴수들한테 집어 던지기라도 하려고?”

“비슷한 셈이죠.”

“네가 던지기엔 치수가 커 보이는데, 손잡이도 안 달려 있고.”

그 말대로, 도면에 그려진 송곳과 원판의 치수는 어지간한 사람의 몸통만 한 수준이었다.

그 크기를 생각하면 송곳과 원판이 아니라 창과 방패라고 불러야 할 판.

물론, 무언가 잡을 부분이 있을 때에나 그렇게 불러 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꼬맹아, 이런 건 그 식귀도 못 쓰겠다. 혹시 그리다 만 거 아냐? 최소한 손잡이는 달아야 할 거 아냐.”

글리펜이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재료는 괴수의 뼈로, 피를 섞어 주시면 더 좋습니다. 수량은 각각 열 개.”

“이런 걸 대체 뭐에 쓰려는 건지 모르겠네, 허 참.”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 물론 돈은 받아야겠지만.”

“저도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글리펜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세한의 블랙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어르신.”

“오, 카드째로 넘기겠다고? 미리 말해 두는데, 이거 환불 안 된다. 알지?”

카드를 받아 든 난쟁이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지만, 진혁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라면 필요한 만큼 쓰셔도 됩니다.”

필요한 자금은 이미 인천에서 던전을 토벌하면서 충분히 마련해 둔 상태.

글리펜이 얼마를 쓰건, 진혁에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르신도 망치의 맹세를 하셨잖습니까.”

“……에잉, 재미없는 놈.”

글리펜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망치의 맹세 얘기까지 꺼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나중에 영수증 보고 울지나 마, 욘석아.”

난쟁이가 볼멘소리로 툴툴댔지만, 진혁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영지를 얻는 데까지, 앞으로 단 한 걸음.

진혁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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