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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49화 (49/174)

49화

서강진이 진혁을 회장실로 불러낸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언제나처럼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장남을 향해, 강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가와 만나고 왔다. 강화도에 대한 권한을 넘기겠다더구나.”

“잘된 일이군요.”

아버지의 말에 진혁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말이 서가의 영역이지, 사실상 그의 사유지가 될 땅.

이가의 개입이 사라진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말입니까?”

아버지의 말에 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강화도를 얻는 걸 돕는 대신, 약혼을 하자더구나.”

약혼.

십수 년 만에 듣는 말이었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진혁은 코웃음 쳤다.

예전이라면 그 두 글자를 듣는 것만으로 상처를 받았을 터.

하지만 망령군주 파슬란이 되어 백 년을 살아온 진혁에겐 사소한 일이다.

“약혼은, 이제 제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가문에 인정받기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십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진혁에게 약혼이란 새로운 족쇄일 뿐.

“도움은 받아들이겠지만, 약혼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겐 아직도 어제 일처럼 느껴져서.”

그런 마음을 숨긴 채, 진혁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래, 이가와의 은원은 저절로 처리될 테니, 네가 무리할 필요는 없지.”

강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였더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꺼려지는 게 당연했을 테니까.

“예, 그러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그의 발을 멈추게 한 것은, 서강진의 한마디였다.

“……정말, 자신 있는 게냐?”

아직도 영 미덥지 않았는지, 장남을 바라보는 강진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했다.

진혁이 지금까지 보여 준 것들은 분명 대단했지만, 괴수로 넘쳐 나는 강화도를 토벌하는 것은 그것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으니까.

오대가문에서도 여력이 부족해 하지 못한 일을 혼자서 하겠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을 수밖에.

허나.

“기다려 주시면, 곧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맞받아 내던 진혁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허.”

사라진 아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강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    *

“요즘 들어, 사장님이 좀 신나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말야, 가끔 휘파람도 불면서 다니던데.”

“뭐, 강화라도 붙은 거 아냐?”

세한금속의 직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몇 년 동안 의욕 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난쟁이 사장이, 언젠가부터 열정적으로 망치를 두드리기 시작했으니까.

과금할 돈이 모자란다는 둥,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둥.

갖가지 소문이 회사를 유령처럼 떠돌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나쁘지 않군요, 조금 작아 보이기는 하지만.”

테이블 위에 가로로 길게 늘어선 창날과 방패들.

그가 주문한 물건들의 모습을 보며, 진혁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흐하하핫. 뭐, 나름 신경 좀 썼지. 재료도 쓸 만한 것들로만 골라 왔고. 돈은 조금 썼지만 말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글리펜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슴을 쭉 폈다.

“가격은 상관없습니다.”

곡괭이 하나를 만들 때도 온갖 진귀한 재료를 사용하는 게 난쟁이들이다.

난쟁이의 입에서 쓸 만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재료라면, 못해도 상급은 될 터.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글리펜은 팔뚝만 한 창날 하나를 쥐고는 씨익 웃었다.

“병급 괴수인 가시뭉치의 뿔에 불이리 피를 약간 섞어서 마나전도율을 높였지. 모양은 이래 보여도, 성능 자체는 우리 회사 라인보다 더 잘 뽑았다고.”

묻기도 전에 자랑부터 늘어놓은 글리펜의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그런데 크기는 부탁드린 것보다 작은 것 같습니다만.”

“이거, 접이식이야. 써 보면 금방 알걸?”

그 말에, 진혁은 대답하는 대신 품에서 수정구슬을 꺼내 들었다.

낙성당에서 계약을 맺은 서가의 망령들을 봉인해 둔 보구, 영혼구슬.

‘망령이여.’

구슬을 쓰다듬으며, 진혁은 속으로 사령술의 주문을 외웠다.

망령을 새로운 육체에 불어 넣어 망자로 재탄생시키는 파슬란의 비술.

‘명계의 율법에 따라, 네 영혼을 그릇에 옮겨 담아라.’

영창과 동시에 그의 심장 속 흑마력이 끓어올랐다. 구슬 속에 잠들어 있던 망령들이 흑마력의 냄새를 맡고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육체, 육체인가?’

‘복수를!’

‘괴수들을 죽일 거야!’

곧, 봉인에서 풀려난 망령들이 구슬 밖으로 뛰쳐나가 준비된 창과 방패에 자리를 잡았다.

살아 있는 육체보다는 무기나 방패에 가까운, 조약해 보이는 형태.

하지만 괴수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망령들에게 육체의 형태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이내.

촤르륵!

영혼을 받아들인 창날과 방패가 하늘로 떠오르며 크게 부풀었다.

곧, 사장실은 서른 개의 창날과 방패로 가득 채워졌다.

망령을 불어 넣은 무기, 리빙 웨폰.

“허어…… 이거, 저번에 박람회장에서 썼던 그거지?”

감탄한 글리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무기를 공중에 띄우다니, 다시 봐도 신기하긴 하단 말야. 꼬맹아, 너 이쪽으로 안 올래? 대량생산만 할 수 있으면 세계 1위도 꿈이 아니라고.”

신기한 광경에 수염만 쓰다듬던 글리펜은 슬쩍 진혁을 찔러봤다.

하지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뭐, 싫으면 말고. 쩝.”

진혁이 거절하자 글리펜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안 될 거란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잠시.

“그래서, 강화도로 갈 거라며?”

“네.”

“강화도라, 운이 좋다면 보구들도 좀 건질 수 있겠어. 거기서 죽어 간 엽사들이 남긴 게 제법 될 테니깐 말야. 거, 쓸 만한 게 있으면, 알지? 큼, 큼.”

“있을진 모르겠지만, 기억은 해 두겠습니다.”

“무조건 있다니깐. 괴수 놈들이 보구를 처먹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이지!”

난쟁이 특유의 탐욕과 집착이 가득 담긴 눈빛 앞에서, 진혁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우우웅―!

정장의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진동한 것은.

‘이설화?’

스마트폰을 꺼내 든 진혁은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지?”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    *    *

서울의 중립지대, 여의도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인 마식정.

예약을 위해선 꼬박 세 달을 기다려야 할 만큼 유명한 한식 파인다이닝이었지만.

식당에 도착한 진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텅 비어 있는 홀뿐이었다.

중앙의 한 자리, 천천히 차를 들이켜는 이설화가 앉은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이지?”

설화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성큼 다가선 진혁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설화는 대답 대신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넓게 펼쳐진 하얀색 식탁을 가리켰다.

“일단, 밥부터 먹자. 어차피 저녁도 안 먹었을 거 아냐? 우리 가문 이름까지 써서 억지로 빌린 자리라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방 쪽에서 나타난 종업원들이 식탁 위에 접시를 올리기 시작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식재료로 구성된 전식(前食)들.

그중엔 에피로나 너머에서만 나는 이계의 생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최고의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구성.

하지만.

“이런 곳에서 밥을 먹을 만큼 한가하진 못해, 본론부터 얘기했으면 하는데.”

진혁은 젓가락을 드는 대신 팔짱을 낀 채 설화를 바라봤다.

그 말에 설화는 젓가락으로 접시 위에 놓인 접시들을 가리켰다.

“급하기는, 일단 맛이나 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니까.”

“할 말이 없다면, 먼저 일어나지.”

“……진짜, 눈치가 없네. 좋아, 얘기나 하자고.”

진혁의 말에 입맛이 떨어졌는지, 설화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강화도에 갈 거라며? 도와줄게.”

“이가에서 도움을 준다더니, 그게 너였나.”

“아바마마의 명령도 들을 겸, 너한테 진 빚도 해결하려고. 도울 수 있는 만큼은 도와줄게.”

파직!

말을 마친 그녀는 곰방대를 꺼내 손가락으로 불을 붙였다.

푸른색 연기를 길게 내뱉던 그녀의 눈꼬리가 진혁을 향해 슬쩍 휘었다.

‘진심으로 강화도에 들어갈 거라면, 한 사람이 아쉽겠지.’

당연히, 제안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곰방대를 쥔 그녀의 눈썹이 휘어졌다.

허나.

“마음대로.”

진혁의 답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랐다.

“……뭐?”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끝이라면,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좋은 저녁 되도록.”

또각또각.

당황한 설화를 내버려 둔 채, 말을 마친 진혁은 곧장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설화는 한참 동안 멍한 눈으로 진혁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파직!

“이 새끼가…….”

으드득.

어금니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불붙은 곰방대를 입에 가져갔다.

*    *    *

“다녀오셨습니까, 팀장님.”

빌딩을 나선 진혁을 맞이한 것은, 그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신주연이었다.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단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식사는 하고 오실 줄 알았는데.”

“강화도에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이런 곳에서 밥이나 먹을 만큼 내 시간이 남아돌진 않아.”

“……역시, 진심이셨군요.”

“농담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진혁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승용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설화가, 강화도 일을 돕겠다더군.”

먼저 입을 연 것은 진혁이었다.

“그런가요? 이가의 착호갑사 대장이라면 삼 품의 엽사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강화도에 대한 정보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굳이 받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전했다.”

진심이었다.

그는 이미 망자군대의 기틀을 어느 정도 잡아 놓은 상태.

이가의 도움이 방해가 되진 않겠지만, 큰 도움이 되지도 않으리라.

“역시, 팀장님답네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혁이 되물었지만 주연은 고개를 젓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의 입가는 왠지 모르게 위로 휘어져 있었다.

침묵 속에서,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났다.’

병사와 무기가 준비되었으니, 남은 건 계획을 실행하는 것뿐.

그러고 나면, 그가 부리는 망자의 군대가 진군하리라.

“그때가 기대되는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운전하던 주연이 되물었지만, 진혁은 깍지를 낀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영지가 완성되고 나면, 다음은 너다.’

외눈박이.

놈의 흉측한 생김새를 떠올린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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