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무명교 성전기사단의 서울지부는 용산에 위치해 있다.
주거지와 떨어진 뒷골목에 위치한 회색의 삼 층 짜리 건물.
이런 곳에 전 세계를 아우르는 무명교의 무력집단이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을 만큼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쓰읍, 후우.”
그 앞에서 심호흡을 내뱉는 소녀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명교의 고위 사제들만이 입는 주교복을 걸친 그녀, 클레어는 하나뿐인 무명교의 성녀였으니까.
“성녀님,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성녀가 한동안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위기사 렌이 그녀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렇겠죠?”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알겠어요.”
호위기사의 단호한 표정 앞에서, 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명교의 상징들로 수수하게 장식된 내부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중갑옷의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정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기사들의 시선이 클레어에게로 향한 순간.
척!
“성녀님을 뵙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기사들이 교단의 성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름 없는 신의 축복이 그대들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클레어는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무명교의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성녀였다.
그것도 잠시.
“성녀님을 뵙습니다.”
뒤쪽에서 나타나 무릎을 꿇는 사내를 바라본 클레어는 미소를 살짝 굳혔다.
‘슈헤르트, 마이어.’
이곳, 성전기사단 서울지부를 총괄하는 지부장이자 동아시아교구의 이단심판관 중 하나.
그리고.
‘날 여기까지 불러온 사람.’
갈색 머리의 사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떨려 왔지만, 슈헤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키고는 성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누추한 곳에 성녀님을 모실 수 있게 되다니,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우선 안쪽으로 드셔서 차라도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슈헤르트의 말에 클레어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에 따라 지부장의 집무실 안으로 이동했다.
“성녀님, 음료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커피로 할게요.”
평소엔 써서 잘 먹지 않는 커피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마실 생각이 없었던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
탁.
주문을 들은 지부장의 비서가 빠져나가고 집무실의 문이 닫힌 순간.
“……날, 왜 부른 거죠?”
클레어의 입이 열렸다.
“한국에 방문하신 성녀님을 모시는 건,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임무입니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게 불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슈헤르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과 반대로, 클레어의 표정은 더욱 딱딱해졌다.
지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성전기사단이 맞이할 준비를 했을 테니까.
물론, 그녀 역시 애초에 기대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허허. 아무리 성녀님께서 교단의 직계가 아니라곤 하지만, 그래도 교단의 유일한 성녀이십니다.”
슈헤르트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우려가 있다면 당연히 저희 성전기사단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험이라뇨?”
지부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자, 이상하게 여긴 클레어가 되물었다.
슈헤르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최근, 첩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한국에 새롭게 나타난 마인이 있다는 소문인데…….”
말을 멈춘 슈헤르트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게 하필, 한국의 유력가문 중 하나인 서가의 사람이라더군요.”
그 말과 함께 지부장이 사진을 탁자에 내려놓은 순간.
“이, 이건…….”
클레어의 동공이 흔들렸다.
사진 속 정장 차림의 남자는,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서진혁이라고 했던가요? 가문의 장남이라고 하니, 더욱 심각한 일입니다. 유력가문의 후계를 마인이 잇는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은 마인이 아니에요.”
서진혁의 사진을 확인한 클레어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아, 성녀님께서도 아는 사람인가 보군요.”
슈헤르트가 모르는 척 놀란 표정을 짓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한 사실이에요. 그가 마기와 비슷한 기운을 뿜어내는 건 맞지만, 마인의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어요.”
“이상하군요, 제가 들은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게다가, 이름 없는 신께서 제게 내린 주인이기도 해요.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요.”
말을 마친 그녀가 정색했다.
그럼에도 슈헤르트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계시라…… 제가 알고 있는 계시는 그런 잡다한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뭐, 뭐라고요? 지금, 성녀인 나와 이름 없는 신을 능멸하려는 건가요?”
신성모독에 가까운 지부장의 말에 클레어는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슈헤르트는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능멸이라니요, 저는 합당한 의심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방계로부터 나타난 성녀의 능력이, 직계의 그것과 과연 같을 것인가. 흥미로운 주제이지 않습니까?”
“뭐, 뭐라고요?”
태연히 그녀를 무시하는 지부장의 말에, 클레어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방계.
정확히는 성직 가문이 아닌 그녀를 향한 차별은 제법 익숙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어 본 적은 없었으니까.
“물론, 앞으로 성녀님께서 어떤 능력을 보여 주시느냐에 따라 제 의심이 사라질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뭘 원하는 거죠?”
“일단은…… 마인을 성공적으로 감별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성녀를 향해, 슈헤르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가을의 한강은 푸르다.
장마와 태풍으로 불어난 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한강의 흐름은 인천으로, 바다로 끊임없이 나아갔다.
하지만.
스으으!
드넓은 한강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투명화의 능력을 지닌 놈을 보기 위해선, 시력이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했으니까.
그 덕분인지, 어지간한 요트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진 놈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었다.
‘자, 가서 놀다 오려무나.’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마인을 떠올린 괴수는,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서울의 중심, 여의도를 향해.
* * *
세한금속에 다녀온 이후, 진혁의 생활 대부분은 강화도에서 이루어졌다.
‘조금만 더 지나면, 어느 정도 영지의 모습을 갖추겠어.’
강화도의 사후 처리를 위해 아버지인 서강진을 몇 번 만난 것을 제외하면, 진혁의 온 신경은 강화도에 세워질 그의 새로운 영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지가 온전히 건설되어 거대한 흑마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되는 순간, 사령술사로서의 경지를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을 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망자들을 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외눈박이를 토벌하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에피로나 전체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 갑 급의 괴수.
자신의 십 년을 앗아간 놈을 마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혁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팀장님.
토벌 2팀의 부팀장, 신주연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때였다.
―렌 슈미트가 돌아왔습니다.
성녀의 호위를 맡은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무슨 일이지?”
통신 구슬로부터 들려온 주연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주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렌 슈미트라. 성녀와 같이 온 게 아닌 건가?’
진혁은 불 꺼진 통신 구슬을 품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매사에 철저한 주연이라면, 함께 온 성녀를 분명히 언급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건, 성녀 없이 호위기사만이 홀로 강화도에 왔다는 의미.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생각을 이어 나가며, 진혁은 주연이 찾아올 해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부우우웅!
저 멀리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진혁의 귀에 들려왔다.
점점 커져 가는 굉음의 주인공은, 섬에서의 간편한 이동을 위해 주연이 가져온 경주용 바이크.
끼기기긱!
렌과 주연, 두 명의 여자를 태운 바이크는 순식간에 진혁의 앞에 멈춰 섰다.
“성녀는 같이 오지 않았군.”
뒤에 탄 성녀의 호위기사, 렌의 어두운 표정을 보며 진혁이 말을 걸었다.
터벅. 터벅.
렌은 대답 대신 진혁을 향해 말 없이 다가왔다.
그녀가 진혁의 코앞에 이르렀을 때.
털썩!
렌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을, 도와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마친 렌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검게 죽어 있었다.
진혁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렌은 몇 번 심호흡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성전기사단 서울지부에서, 성녀님의 보호를 명분으로 억류당하셨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성녀라면 무명교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존재일 텐데…….”
무명교에서 성녀는 이름 없는 신의 지상 대행자.
일개 성기사 해외지부가 성녀를 억류한다는 건, 소문만으로도 파문 겸 이단심판관의 초대 손님이 되기에 충분한 일이니까.
그 말에, 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클레어 님께선 교단에서 제대로 된 성녀로 인정받고 계시지 못하니까요.”
“그게, 무슨?”
“클레어 님께선 교단의 성직 가문 출신이 아닙니다. 지구…… 아니, 무명교가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죠.”
교단을 이끌던 성직 가문의 질시와 시샘이, 렌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호위기사로 정기사가 아닌 저 같은 견습 기사를 데리고 다니신 것도, 제대로 된 의전을 받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래서 굳이 칠성원에 머문 건가.”
렌의 설명을 들은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시와 관련된 것도 있었습니다만.”
기사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성녀님을 도와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진혁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진혁의 답은 짧았다.
“거절한다.”
순간.
주변이 침묵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