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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72화 (72/174)

72화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한민족의 정신적 근원이다.

백 년 전 게이트 너머로부터 이종족과 마나, 초상 능력이 전해져 왔을 때. 이런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괴수로부터 지구로 도망쳐 온 이종족들을 조선인이 처음 마주했던 곳이, 다름 아닌 백두산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백두산은 한국 엽사들의 성지가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백두산의 천지를 덮고 그 에너지를 제어하는 데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게 끝날 때가 됐지.”

한국의 삼 대 금지 구역 중 하나.

제주도의 한라산 정상에서 눈을 감은 사내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백두산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콰아아앙―!

천지를 덮은 광복관 아래, 폭주한 용심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백두산의 모습을.

“고맙다, 진혁아.”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서진혁.

서가의 장남을 떠올린 그, 여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서진혁과 윤미르.

훈련장에서 벌어진 둘의 결투에 대한 소식이 엽사들 사이에 퍼져 나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훈련장이 엽사대회장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데다, 둘의 결투를 지켜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덕분에.

“서진혁 씨,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당신인가? 윤미르의 상급 정령을 일격에 끝장냈단 게?”

대결 다음 날.

엽사대회장으로 향하던 진혁의 앞을 두 사람이 가로막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와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방랑자 스타일의 남자.

“무슨 일이시죠?”

“죄송하지만, 비켜 주십시오. 저희는 엽사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 중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찮아 보이는 둘의 모습에, 주연과 렌은 당황하면서도 진혁과 성녀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만.”

하지만 진혁은 둘을 향해 손짓해 물리고는, 앞에 선 남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두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주가와 유가에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주소영과 유재준.

각기 주가와 유가의 후계자로 일찍이 낙점된 가문의 유망주들.

‘지금까지는 딱히 접점이 없었지.’

지난번, 청문회 때와 강화도에서 을 급 괴수를 사냥할 때를 제외하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자들.

이들이 갑자기 진혁을 찾아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제 대결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어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주소영이었다.

뒤집어쓴 로브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 진혁을 날카롭게 훑었다.

“어제 당신이 대결에서 고렘을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고렘?”

그녀의 입에서 뜬금없이 고렘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자, 진혁은 의문 섞인 눈으로 주가의 마법사를 바라봤다.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이미 어제 대결에 대한 증언과 영상은 확보해 놓은 상태니까요.”

소영은 그 말과 함께 왼손으로 빠르게 수인(手印)을 맺었다.

그러자.

팟!

허공에서 푸른색 화면이 나타남과 동시에, 어제 서진혁과 윤미르가 벌였던 대결의 영상이 처음부터 재생되었다.

소영의 가는 손가락이 영상 속, 빠르게 움직이는 황금색의 사람에게로 향했다.

“저 황금 인형, 분명히 고렘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상급 정령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거죠?”

진혁을 향해 당돌하게 묻는 그녀의 눈엔 지식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하지?”

진혁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묻자, 소영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지식의 일부를 알려 준다면 나 주소영이…… 아니, 주가가 당신의 편이 되어 줄 테니까요.”

병 급 괴수의 출력을 내는 것이 한계인 고렘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기회.

산업용 고렘의 판매를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는 주가와 그 후계자인 소영의 눈에, 진혁이 선보인 고렘은 말 그대로 시대를 초월한 기술이었으니까.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그녀에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싫다.”

하지만 진혁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어, 어째서인가요?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거기에 더해서…….”

“필요 없다.”

소영의 떨리는 눈빛을 가볍게 무시한 진혁의 눈이, 옆에 있던 유재준에게로 향했다.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별건 아니고,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밥?”

“말로만 들었지, 당신하고 말을 섞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깐.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이따 점심이나 같이하는 게 어때?”

“그래야 할 이유는?”

“같이 밥을 먹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럼, 거절하지.”

“쳇.”

거절당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옆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영과 다르게 재준은 조금 아쉬워할 뿐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할 얘기가 끝났다면, 길을 비켜 줬으면 하는데.”

말을 마친 진혁은 길을 막아 선 두 사람을 향해 비키라며 손짓했다.

“여기 있었군, 자네.”

두 사람의 뒤에서, 갓과 두루마기를 쓴 남자와 곰방대를 쥔 여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이한과 이설화.

“어제 대결 얘기는 들었네. 윤가의 장남을 이겼다면서? 미리 알았으면 내 술이라도 한 병 들고 찾아갔을 텐데, 아쉬운 일이야.”

“하루 종일 잠만 잤으면서.”

술병 속 술을 들이켜는 시늉을 하는 이한을 보며 설화가 혀를 찼다.

진혁은 이한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랄 것까지야 있겠나. 광복관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 장본인의 얼굴도 안 보고 갈 순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

진혁의 물음에, 이한은 대답하다 말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할 이야기가 있었다만, 이 자리에서 하긴 조금 곤란하군.”

“말하기 곤란하다니,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죠?”

옆에서 듣고 있던 주소영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이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집안 간의 혼례를 두고 무슨 짓이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오라버니, 지금 무슨…….”

혼례.

그 말을 들은 설화가 오라비를 날카롭게 노려봤지만, 그는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오늘은 시기가 좋지 않은 듯하니, 다음에 다시 한번 보도록 함세.”

그 말과 함께 이한은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대회장 쪽으로 사라졌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나중에 꼭 밥이나 먹자고.”

주소영과 유재준까지 자리를 떠나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진혁과 토벌 2팀, 그리고 석상처럼 선 채로 굳어 버린 이설화뿐이었다.

“……방금 거 그냥 헛소리니까 귀담아듣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설화는 몸을 돌려 도망치듯 사라졌다.

“대체…… 저 사람들 다 뭐예요? 자기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다니.”

폭풍처럼 왔다 사라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클레어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진혁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혼례라.’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이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강화도의 이권까지 넘겨 줄 정도로 간절하다면.

그 다음 단계는 당연히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니까.

‘이 정도로 적극적일 줄은 몰랐지만.’

한 번 파혼한 가문에 다시 약혼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가문의 위신을 내려놓은 행위.

그것이 왕가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이가라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

‘우선은……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작게 멀어져 가는 이한과 설화를 바라보는 진혁의 눈이 빛났다.

“……응? 뭐지?”

뒤에 서 있던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한 것은 그때였다.

“성녀님?”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렌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느낀 건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은 그녀의 시선이, 발밑의 금속 바닥으로 향했다.

*    *    *

겉으로 보기에, 광복관은 거대한 관광도시이자 한국 엽사들의 정신적 고향이었지만.

우우웅―!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

진짜는 도시의 지하에 있었다.

지이이잉―!

윤이랑.

엿새 만에 윤가의 숙소를 박차고 나온 그는, 지하에 위치한 광복관의 통제실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시끄럽군.’

천지 아래 숨어 있는 화산의 에너지를 제어하기 위해 마련된 수많은 기계장치와 보구들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그가 탄 승강기의 소음이 한데 어우러져 이랑의 신경을 긁어댔다.

그는 주름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달라진 건 없군.’

조금 전까지, 마인이 주고 간 구슬을 쥐고 있던 손.

아들 미르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윤이랑은 망설임 없이 검은 구슬에 담긴 마기를 몸에 받아들였다.

‘겉으로일 뿐이지만.’

그의 몸속은 마나홀부터 천천히 마기에 잠식되어 가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의 정령을 상징하는 붉은 빛깔의 정령력이 검붉은색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고통은 없다니. 신기해.’

아니.

마기를 받아들인 그의 몸 상태는 오히려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마기가 섞인 정령력은 분명 이전보다 더욱 파괴적인 힘을 담고 있었고, 육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노화한 육체는 서서히 과거의 젊음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게, 마기의 힘…….’

시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윤이랑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기를 몸에 받아들인 순간, 그는 더욱 강해졌다.

‘이 힘이라면…… 그 허무맹랑한 소리도 가능할지 모르겠어.’

윤이랑이 이곳, 덥고 습한 광복관의 지하까지 내려온 이유였다.

끼기기긱―!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금속 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이군.’

그의 눈앞에, 광복관의 숨겨진 모습이 나타났다.

한때 거대한 호수였던 천지의 물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

그 아래로 검은색의 대지, 분화구가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저곳에, 용심이 있겠지.’

분화구의 중심에 박혀 있는 거대한 기둥을 유리창 너머로 흘깃 내려본 윤이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려와 본 지 수십 년이 넘었지만, 구조는 그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곧, 윤이랑은 광복관의 중심에 자리한 통제실의 문 앞에 이르렀다.

“유, 윤이랑 가주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엽사가 예고도 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내 잠시 확인할 게 있는데, 통제실에 좀 들어가 봐도 되겠는가?”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면 물었다.

허나.

“윤이랑 가주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규정대로라면 다른 가주님들과 회장님께서 함께 오셔야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엽사들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윤이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괜찮네. 이미 다른 가주들과 회장에겐 위임장을 받아 왔으니.”

“그러면, 혹시 저희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윤이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 든 위임장을 꺼내기 위해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화르르륵!

품에서 꺼낸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위임장이 아니었다.

“……결국 선을 넘었군.”

시커멓게 타 죽은 두 엽사를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윤이랑의 시선이, 통제실을 막아선 유리문으로 향했다.

‘용심.’

광복관을 유지하는 핵심.

그것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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