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서강진.
진혁에게,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였다.
철인(鐵人).
무쇠로 만든 심장엔 피 대신 쇳물이 흐르고, 강철로 벼려진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인간의 형태로 빚어낸 검(劍).
그것이, 서강진이라는 인간의 본질.
그러나.
어서, 탈출하거라.
구슬 위로 보이는 남자의 표정은, 철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항거할 수 없는 적을 마주친 자의 체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표정을 마주한 진혁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진이 다음 말을 내뱉을 때까지.
윤이랑, 그놈이 용심을 이용해 정령왕을 강림시켰다.
정령왕.
일 품의 엽사,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조차도 함부로 불러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존재.
‘그래서, 그런 거였나.’
정말로 윤이랑이 정령왕을 지상에 강림시켰다면, 일 품의 엽사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탈출한다면, 살 수 있는 겁니까?”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막아 내지 못한다면, 탈출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최소한, 그에게는 그랬다.
백두산이 폭발하건, 정령의 왕이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건.
그들의 영역엔, 한반도 전체가 들어가게 될 테니까.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곧 내려가겠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조금의 가능성을 더하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무슨…….
팟!
진혁은 통신 구슬을 꺼 버리고는,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플리오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령왕이 현계에 강림했다니, 방금 들은 게 사실이냐?”
그녀는 마법과 정령을 수족처럼 다루는 요정족의 대장로.
정령왕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지구에서 그녀보다 잘 아는 존재는 없으리라.
“그래, 아버지가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니까.”
“큰일이구나. 이 땅에 정령왕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몇 되지 않을 터인데.”
그리고, 그 대부분은 대화나 접촉 자체가 불가능한 자들.
사실상, 정령왕을 막아 낼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아니, 방법은 있을 거다.”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정령왕 정도의 존재를, 그렇게 쉽게 현계에 소환하고 유지시킬 수 있을 리 없어.”
아마도, 용심과 백두산의 분화구 아래 가득한 마그마가 힘을 보탰으리라.
그렇다면.
‘둘 중 하나만 제어할 수 있다면, 승산은 있다.’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였다.
“키에에에에!”
주인, 주인!
천둥비룡의 째진 울음소리와 함께, 멜리나의 의지가 그의 영혼을 통해 전해져 온 것은.
곧.
쿵!
진혁의 발 앞에, 상자 하나가 떨어졌다.
낙하의 충격으로 입을 벌린 상자 안을 가득 채운 것은, 금빛의 가루와 그 위에 얹어진 손톱만 한 보석.
주군, 명 대로 도착했소! 적은 어디 있는 것이오!
상자 위 영혼석에서 자이츠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결국, 다른 방법은 없겠군.’
진혁은 결정을 내리고는, 에플리오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흑마력을 빌려다오.”
“흑마력이라면, 이 힘을 말하는 것이냐?”
스으으으―!
말을 마친 그녀가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녀의 몸 주변을 감싼 망자의 기운을 바라보며,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끌어 내기만 하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지.”
“……정말, 그것만으로, 정령왕을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이냐?”
에플리오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진혁은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하나가, 더 필요하다.”
광복관의 별관.
광복관을 세운 오 대 엽사 가문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엔, 다섯 채의 저택이 한데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
윤가가 소유한 저택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마력총을 든 이가 소속의 엽사들이 윤가의 저택 담장과 대문을 빙 둘러싼 모습은, 흡사 감옥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윤미르.
진혁에게 패하고 쓰러진 뒤 저택에 실려 온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리고 저 이가의 엽사들은 왜 우리 가문의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거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대문 밖으로 나가 이가에 있는 엽사들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저택에서 나오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뿐.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지만, 상황이 파악되기 전에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대체……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방으로 돌아간 미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안 되는 정황을 조합해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것뿐.
‘……우선은,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야 해.’
아버지와 연락이 닿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왜…… 연락이 되지 않는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미르의 마음속엔 불안감이 쌓여 갔다.
심지어 자신이 부리는 불의 정령 중 하나를 바깥으로 보내도 봤지만, 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보이는 것은, 수많은 괴수들과 혈전을 벌이는 오 대 가문과 엽사회, 길드의 엽사들.
거기에, 여전히 포위를 풀지 않고 있는 이가의 엽사들까지.
이건, 마치…….
‘윤가가, 배신이라도 한 것 같잖아.’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때였다.
덜컥!
“일어나 있는 걸 보니, 다 나은 모양이군.”
누군가가 그의 침실을 노크도 없이 열고 들어온 것은.
“누구…….”
미르는 예고도 없이 들어온 침입자를 노려봤다.
허나,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넌…….”
미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진혁?”
며칠 전 자신을 쓰러트린 서가의 장남.
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미르가 무언가 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네가 할 일이 있다.”
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 일이라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자신을 마치 부하처럼 대하는 진혁의 태도에, 미르의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윤가가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는 일.”
진혁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뭐라고?”
순간 멈칫한 미르를 내려다보며, 진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엽사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라면, 일 품의 엽사는 엽사의 한계를 초월한 자들이다.
손짓으로 하늘을 가르고, 발 구름으로 대지를 움직이는 존재들.
하지만.
“크윽…….”
광복관의 지하에 모인 다섯의 일 품 엽사.
그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피부는 화상을 입은 듯 군데군데 붉어져 있었고, 초상 능력의 근원인 마나가 고갈된 탓인지 탈진한 그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빌어먹을…….”
한쪽 무릎을 꿇은 백색 로브의 대마법사, 주미선의 시선이 정면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이랑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뒤에 선 거대한 불꽃의 여인에게로.
“정령왕…… 이 정도일 줄이야….”
불의 정령왕, 셀리아나.
에피로나와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 소환된 기록이 열 번도 되지 않을 만큼 현계에 강림시키기 어려운 존재.
윤이랑이 그런 존재를 현계에 소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저 용심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적룡의 용심.
대전쟁이 끝나고…… 한국의 엽사들이 용에게서 얻어 낸 보상.
본디 백두산의 분화를 통제하는 제어시스템의 중심에 자리한 보물 중의 보물이었지만.
내부에 응집된 불의 마나와 지하의 마그마로부터 올라오는 거대한 기운은, 불의 정령왕을 현계에 유지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해 주었다.
“이한, 저 용심을 노려야 해.”
비틀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서 있던 서가의 가주, 서강진이 뒤쪽에서 기다란 소총을 쥐고 있던 이한을 바라봤다.
정령왕을 다시 정령계로 돌려보낼 방법은 오직 그뿐.
용심을 윤이랑의 손에서 떼어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육체를 유지할 에너지가 없어진 정령왕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이한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탄환이 다 떨어졌다.”
설사, 탄환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불의 정령왕이 가진 강력한 정령력과 마인이 된 윤이랑의 마기를 완벽하게 뚫어 버릴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탄환은 아직 이가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쪽도 마찬가지야. 령(靈)이는 이미 죽기 직전이라고.”
강진이 유가의 가주, 유시현을 바라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젤리처럼 감싼 무언가를 가리켰다.
주미선과 강진 그리고 최현 역시 여력이 남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로군.”
결국, 이 방법뿐인가.
한숨을 내쉰 강진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역천술을 준비하세.”
미래의 수명을 연료로 삼아, 현재의 한계를 돌파하는 비술.
‘일단 알려는 주겠다만, 죽을 때까지 쓸 일은 없을 게다. 우리 서가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적이 그리 쉽게 나타나지는 않을 테니.’
“젠장, 노인네 말이 맞을 리가 없지.”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의 아비를 잠시 떠올린 강진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른 엽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을 여기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다섯 목숨으로 수천만을 구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이오.”
정령왕과 윤이랑이 이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질 터.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우우웅―!
다섯 엽사들의 마나홀 바닥에 고여 있던 약간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한 다섯의 눈빛이 마지막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금단의 비술, 역천술을 발동하기 직전.
콰아앙!
지상과 천지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금속지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뚫린 구멍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 것은 그때였다.
타앗!
족히 수십 미터는 넘는 높이였지만, 분화구 위에 마련된 기다란 금속 통로를 향해 낙하한 그들은 어렵지 않게 착지에 성공했다.
“어째서…….”
인간 둘과 요정 하나.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알아본 마인, 윤이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르야.”
“……이제부터, 당신은 윤가가 아닙니다.”
슬픔, 분노, 경악, 배신감.
마인이 된 아버지를 마주한 윤미르의 얼굴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윤미르의 옆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흑청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미청년.
그의 한 손엔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이, 다른 한 손엔 손톱만 한 보석 두 개와 금빛 가루가 가득 채워진 유리병들이 쥐어져 있었다.
청년의 시선이 엽사들 중 하나, 서강진에게로 향했다.
“벌써, 포기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서진혁.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리느라 잠깐 쉬고 있었다.”
강진은 아들과 꼭 닮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