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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86화 (86/174)

86화

강화도에 서식하던 괴수들을 몰아낸 지도 석 달 여.

안정을 되찾은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강화도는 아직 사람이 살기에 많이 부족한 곳이었다.

물을 공급해 줄 상하수도와 전기, 심지어 육지와 오갈 수 있는 다리까지.

지난 백 년간 고립된 덕에 현대인들이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반 시설들이 존재하지 않는 섬에 굳이 들어와 살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수년 뒤에 신도시가 완성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지금 강화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신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빌딩들 중, 가장 먼저 완공이 끝난 세한보안 인천지사의 새로운 사옥.

“흠…….”

그곳의 지사장실에서, 진혁은 손에 들린 붉은색의 장검을 만지작거렸다.

‘독립검, 아스칼론.’

사용자에게 적룡의 힘, 적룡기를 불어넣어 주는 갑 급의 보구.

과거 독립전쟁 시절. 서가의 초대 가주가 휘둘렀던 백 년 묵은 골동품이었지만, 적색 장검의 날은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거라면…… 갑 급 괴수에게도 충분히 먹히겠지.’

검으로부터 전해지는 뜨거운 기운, 적룡기는 과거 적룡이 지녔던 힘의 일부를 봉인한 것.

갑 급 괴수가 강력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용의 힘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다.

분명, 놈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되어 주리라.

‘내가 휘두르는 것보단, 망자들에게 맡기는 게 낫겠지.’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검이라면, 검사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가치를 지닌 보물.

성준이나 자이츠에게 이 검을 내어준다면, 진혁 자신이 휘두르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터.

‘물론, 이 힘을 견딜 수 있는 육체를 먼저 쥐여 줘야겠지만.’

식귀나 스켈레톤의 몸은 한계가 뚜렷하고, 용아병은 그 효율이 좋지 않다.

‘붉은 용의 몸을 나눠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조금 아깝지.’

조만간, 아스칼론을 휘두를 수 있을 만한 그릇을 새로 구해야 하리라.

“한국을 움직이는 가문 중 하나라더니, 시설이 영 좋지는 않구나.”

백룡, 청명이 지사장실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인간의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지내는 데 썩 편하진 않겠어.”

마치 자기 방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 그녀는 진혁을 향해 담담하게 불평했다.

그 말에 진혁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말하는 것 치곤, 차림새가 너무 편해 보이는군.”

그 말대로였다.

진혁의 앞에 선 청명은 신발은커녕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

무릎까지 닿는 흰색 머리칼이 어느 정도 가려 주기는 했지만, 군데군데 하얀 살결이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눈을 둘 데가 없을 정도였다.

청명은 무심한 투로 진혁을 내려다봤다.

“마침 주변에 사기(死氣)가 가득하니, 조금 흡수할까 했을 뿐이다.”

“사기를?”

“주기적으로 사기를 흡수해 주면 내가 다루는 냉기의 효율이 더욱 높아지니까. 인간이 영양제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게, 굳이 옷까지 벗어야 할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벗지 않을 이유도 없지. 넌 개미에게도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청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고는 진혁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흥미롭구나.”

책상에 걸터앉은 그녀의 시선이, 앉아 있던 진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물론, 진혁의 몸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분명 영혼의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거늘, 어째서 이토록 진한 카르마가 묻어 있는지 모르겠어.”

“대답해 줘야 하는 건가?”

“그럴 필요는 없다.”

진혁이 이죽거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답을 알려 줘 버리면, 흥미가 사라져 버리지 않느냐. 계속 지켜보다 보면, 자연히 정답에 도달하게 될 터.”

“방해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일에 관여하진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욘 없느니라. 관여할 일도 없겠지만.”

말을 마친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두 개의 백안(白眼)이 옅게 빛났다.

덜컥.

누군가가 지사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팀장…….”

신주연.

진혁을 보좌하는 토벌 2팀의 부팀장.

하지만.

“…….”

팀장을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오던 그녀는, 두 사람을 보곤 말을 멈췄다.

지사장실의 의자에 앉은 팀장.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여인.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쾅!

들어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닫힌 문.

“……다음부터는 옷을 입고 다니도록.”

“어째서지?”

“그렇지 않으면, 같이 못 다닐 테니까.”

진혁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명을 향해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선 것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신주연 부팀장.

“무슨 일이지?”

진혁의 물음에, 주연은 평소와는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손님이……오셨다고 합니다.”

“손님이라, 난 처음 듣는 이야긴데.”

“일본의 엽사들입니다.”

일본.

“일본이라.”

주연의 말에, 진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일본.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이었지만, 실상은 이름과 달랐다.

제후국이 없으니 제국이 아니고, 영토 대부분을 괴수에게 잃었으니 대국도 아닌 나라.

허나, 타국의 지원 없이는 존속 여부조차 불투명한 섬나라에 가장 많은 지원을 퍼붓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을 이 꼴로 만든 한국과 오 대 엽사 가문이었다.

서가의 세한 역시, 그중 하나.

“들어오거라.”

세한빌딩의 회장실에 들어온 진혁은, 아버지 서강진이 앉은 소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파엔 강진 외에도 두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검은색 단발머리 여자와 노랗게 물든 머리를 길게 땋은 남자.

두 남녀의 옆에 세워 둔 휘어진 검과 검집을 보고, 진혁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 왔다는 엽사인가.’

검을 무기로 사용하니, 그중에서도 유력가의 소속인 게 분명했다.

“장남일세.”

강진의 설명에, 고개를 돌린 두 엽사의 표정이 변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남녀가 고개를 숙였다.

“모리 마루이치입니다.”

“시마즈 카스미에요.”

“서진혁이다.”

짧은 인사를 나눈 셋의 눈빛이 교차했다.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이군.’

깊게 가라앉은 눈빛과 바깥으로 드러나는 기세는 이 품에서 삼 품 정도의 수준.

아마도, 일본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강자이리라.

“인사는 그쯤하면 됐고, 얘기나 마저 하세.”

“예.”

강진의 말에, 마루이치는 가져온 가방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곧.

우웅!

마루이치의 마나를 머금은 구슬이 빛을 내면서 허공에 화면을 쏘아 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금속의 광택으로 번쩍거리는 성벽과 그 안의 도시.

“시모노세키 시입니다. 큐슈의 괴수를 틀어막는 요새 도시죠.”

마루이치의 설명대로, 성벽 위엔 수많은 마력포와 그것을 운용하는 엽사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곧, 화면이 도시의 반대편으로 돌아갔을 때.

바다 너머의 육지에서, 검은 물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 화면이 물결을 확대했을 때.

물결은 그 정체를 드러냈다.

“크으으으…….”

“키이이…….”

괴수.

수많은 괴수들이 모여 이동하는 모습이, 마치 해안을 향하는 파도처럼 보였다.

“저게 그, 몬스터 웨이브인가 하는 현상이군.”

화면을 보던 강진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엔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매년 벌어지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저 정도면 일본의 엽사들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 아닌가?”

괴수가 아무리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지형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두 섬 사이를 가르는 간몬해협은, 좁다곤 하지만 괴수의 발을 묶어 두기엔 충분한 넓이의 바다.

바다를 건너는 괴수를 멀리서 포격하고, 상륙한 일부를 토벌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부디, 끝까지 봐 주십시오.”

영상을 켠 마루이치의 떨리는 목소리.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들은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그리고.

파앗!

몰려드는 괴수들의 뒤로, 번쩍이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우우우우!

빛으로 이루어진 창.

괴수들의 뒤쪽에서 날아든 빛의 창이 도시의 성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이내, 창과 성벽이 맞부딪친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밝은 빛이 도시와 성벽을 집어삼킨다.

온갖 방어술법과 기술이 적용된 요새 도시의 방호벽이었지만, 밝은 빛 앞에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뿐.

곧, 빛이 사라지자 시모노세키를 감싼 성벽의 일부는 사라진 것처럼 텅 비어 버렸다.

동시에.

“키이이이이!”

바다를 건너오던 괴수의 파도가 점점 높이를 키워 나갔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의 괴수들이 바다로 몰려들자, 다른 괴수를 밟고 올라간 괴수들이 파도 위에 또 다른 파도를 만들어 냈다.

이윽고.

콰아아아!

검은 파도는 도시를 감싼 성벽을 넘어 도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팟!

영상의 끝이었다.

“…...결과는?”

“시모노세키에 모여 있던 엽사들은 모두 전멸했고, 괴수들은 현재 시모노세키를 넘어 오사카 앞까지 넘어온 상태입니다. 이대로라면, 관서 전체가 괴수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침묵이 회장실을 감돌았다.

오사카는 일본의 대도시 중 하나이자 대표적인 공업도시.

오사카와 관서지방을 잃은 일본이, 과연 괴수를 제대로 막아 낼 수 있을 것인가?

“……부디,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인 두 사람의 표정은 간절했다.

그러나.

“당장은 어렵네.”

서강진은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도 여유가 많진 않아. 못해도 한 달 정도는 버텨 줘야 해.”

“한 달이라니, 그런…… 무리입니다.”

“미국에선 뭐라던가?”

“도와준다고는 했습니다만, 워낙 먼 곳이라…… 그리 적극적이진 않을 겁니다.”

“우리도 별반 다를 건 없다네. 엽사들을 모으고, 지휘 체계를 짜고, 물자를 지원하고…… 한 달도 빠듯하지.”

“그런…….”

강진의 대답을 들은 마루이치와 카스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 달.

짧은 시간이었지만, 본섬에 들어온 괴수의 무리가 수도인 도쿄까지 몰려오기엔 충분했다.

상당수의 엽사를 잃어버린 일본이, 과연 한 달이란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힘들겠지.’

‘이렇게 되면, 대피책을…….’

거기까지 생각한 둘의 얼굴이 어두워졌을 때.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진혁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타오르는 그의 눈빛이, 유리구슬 위로 떠오른 화면의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외눈박이.’

갑 급의 괴수.

그리고, 진혁의 십 년을 앗아간 적.

화면 구석에 보이는 놈의 머리를 보며,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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