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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87화 (87/174)

87화

갑 급 괴수.

에피로나를 지배한 괴수들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

에피로나를 통제할 뿐, 지구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갑 급의 괴수였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지.’

화면의 구석에 나타난 놈의 외눈과 이마 가운데의 뿔을 본 순간, 진혁은 대번에 놈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외눈박이.’

진혁의 마나홀을 부수고, 십 년의 삶을 앗아간 괴수.

놈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눈앞에 다가왔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다가온 기회를 차 버릴 만큼 겁쟁이는 아니다.

반드시, 놈을 발 아래 무릎꿇리리라.

화면 속 적을 바라보는 진혁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진혁이 너라면…… 한 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강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몇 차례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장남이다.

이기진 못한다 하더라도,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어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혼자라고요?”

다른 두 명의 반응은 달랐다.

“서진혁 씨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관서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한 명의 엽사로는…… 무리입니다.”

마루이치는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말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붉어지는 얼굴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한 명이라니.’

사실상,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강진과 진혁의 말이 모욕으로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 명이라니, 지금 농담하는 건가요?”

카스미는 조금 더 직설적이었다.

“관서에 남은 엽사가 이천 명이에요. 거기에 하나가 추가된다 해서, 상황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지원이 어렵다고 대놓고 말해 주세요, 그게 덜 모욕적이니까.”

말을 마친 카스미는 입술을 짓씹으며 진혁을 쏘아봤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진혁은 자신을 노려보는 카스미의 눈빛을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모욕이라니, 그대들이야말로 나를 모욕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당신 혼자서는…….”

그 말을 들은 카스미가 무어라 반박하려 한 그때.

스릉!

진혁은 등 뒤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장검.

검의 옆면에 새겨져 있는 기하학적 문양과 수많은 마법진들 사이로, 적색 기운이 주변 공기를 장악해 나갔다.

잠시 동안, 경악한 사람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지 그랬느냐, 독립검 아스칼론이라니.”

침묵을 깬 것은 강진이었다.

진혁이 뽑아 든 검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챈 그의 눈은 흥미로 가득했다.

“아, 아스칼론?”

그 말을 듣고 놀란 것은 옆의 마루이치와 카스미 역시 마찬가지.

그들에게, 저 붉은색의 검은 다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아스칼론이라면.”

“혈마검(血魔劍)……!”

과거, 수많은 일본의 엽사들을 베어 내고 일본을 패배시킨 검.

그 저주받을 검의 실물을 눈앞에서 목도한 순간, 둘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혁은 세 사람의 반응을 보며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는, 일본의 두 엽사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자격이 있다고 봐도 되겠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의는 없는 것으로 알지.”

침묵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라길드.

인천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닌 중립길드의 장, 성유창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엽사대회 이후로 일이 너무 늘었어. 빌어먹을.”

당시에 부상을 입은 엽사들이 제법 많다 보니, 던전을 토벌할 인원이 부족해진 탓.

그 덕분에, 길드장인 그조차도 짬을 내서 던전을 토벌해야 했다.

며칠째 토벌과 서류작업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그의 얼굴은 피로로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긴 하지만…….”

윤가의 가주가 마인이 되고, 백두산이 폭발할 뻔한 대사건.

그를 포함한 엽사들이 전멸할 뻔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사소한 일이었다.

‘어쩌면 한국 전체가 멸망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유창은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길드장님.”

길드장실 밖에 있던 비서가 그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서가의 서진혁 씨로부터 온 연락입니다.”

서진혁.

그 이름을 들은 유창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서가의 장남.

그가 아라길드의 장을 찾을 이유는, 단 하나였으니까.

‘에피로나로 갈 생각인가 보군.’

유창은 서랍에 넣어 놓은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위 사항을 충족했을 경우, 아라길드는 서진혁이 갑 급 괴수를 토벌할 때 최대한의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한다.]

“……설마, 이걸 정말로 지킬 줄이야.”

계약서의 맨 아래에 쓰여진 그와 진혁의 사인을 보며, 유창은 쓴웃음을 지었다.

‘약속을 했으니…… 어쨌든 지켜야겠지.’

“알겠네.”

유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들어 올리곤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서 팀장. 이제 결심한 모양이지?”

약속을 한 이상, 물릴 생각은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라.

그러나.

일본에서 보도록 하지.

“...…뭐?”

진혁의 대답은, 유창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일본이라니,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나.”

그와 진혁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갑 급 괴수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유창이 이해하기에, 진혁의 말은 계약과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허나.

외눈박이가 나타났다.

수화기로부터 진혁의 다음 한마디가 들려온 순간.

툭.

성유창은 손에 든 수화기를 떨어트렸다.

회장실에서 나온 진혁은 곧장 자신의 영지가 위치한 강화도로 향했다.

임시로 설치된 다리를 건넌 검은색 세단은 곧 다리 맞은편에 위치한 인천지사의 새 사옥에 멈춰 섰다.

“왔느냐.”

뒷좌석에서 내린 진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청명이었다.

“불청객을 데려왔구나.”

하얀색 코트 위로 긴 백발을 늘어트린 그녀의 눈이 뒤이어 내린 마루이치와 카스미에게로 향했다.

“흡.”

“이건…….”

순간, 용의 시선에 담긴 광기를 느낀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진한 광기가 둘의 심장을 서서히 조여 나갔다.

“불청객이 아니라 손님이다.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지.”

보다못한 진혁이 말을 건네자, 청명은 둘에게서 눈을 뗐다.

“헉, 허억…….”

심장을 조이는 매서운 기운이 거두어지자, 두 사람은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저 사람은…….’

청명을 바라보는 둘의 눈엔 약간의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의 시선은 오롯이 진혁에게로 향해 있었다.

“바다 건너라면, 일본인 게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를 받았지. 늦어도 내일이면 출발하게 될 거다.”

“그러면, 나도 감시자의 의무를 다해야겠군.”

결국, 진혁을 따라 일본에 가겠다는 의미.

“마음대로 해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어붙어 있던 일본의 두 엽사들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이에요? 손님까지 데려와서는.”

진혁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을 발견한 클레어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답은 짧았다.

“일본에 갈 거다.”

“일……본이요? 그 위험한 곳을요?”

클레어는 당황한 듯 두 눈을 끔뻑였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나 보군.”

“이래 봬도 무명교의 성녀니까요. 이제 그 정도 소식통은 갖고 있다고요.”

“서, 성녀?”

“무명교의 성녀라면…….”

흘리듯 내뱉은 클레어의 말에, 일본의 엽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사제복을 입은 금발 소녀를 자세히 살폈다.

곧, 클레어는 당황한 표정을 풀고는 으스대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미 성전기사단에 파견을 요청했어요.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정말로 일본이 멸망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것도 할 줄 알았나?”

“강신을 해낸 이후엔 분위기가 좀 바뀌었으니까요.”

조금 놀란 듯한 진혁의 말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절 빼놓고 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겁이 난다면, 가지 않아도 좋아.”

“설마요.”

예전과 달리 제법 여유가 생겼는지, 클레어는 진혁의 말에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상관없겠군.”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도 어이가 벙벙한 듯 눈을 끔뻑이는 두 엽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출발은 내일. 혹시 문제 있나?”

“없……습니다.”

“……괜찮아요.”

간신히 대답을 해내긴 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이렇게 부족했나?’

‘아까 그 여자도 그렇고, 무명교의 성녀도 그렇고. 어째서, 이 조그마한 섬에 이런 강자들이 있는 거지?’

둘 모두 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타국의 정보에도 밝은 편이긴 했지만, 한국 땅을 밟은 이후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로 전락해 버렸다.

곤란한 일이었다.

‘한국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

‘돌아가서 가주님께 전하지 않으면…….’

둘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그럼, 그대들도 내일 함께 가는 것으로 알겠다.”

진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진혁의 말에, 두 사람은 시선 교환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희 쪽에서 전용기를 준비해 뒀습니다. 시간만 말씀해 주시면 바로 이륙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전용기는 괴수들에게 격추당할 위험이 큽니다. 차라리, 저희 가문의 전용 호위함을 타고 가시죠.”

마루이치와 카스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말을 마친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하지만.

“필요 없다.”

진혁은 둘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예?”

“내일 아침, 여기서 바로 출발한다.”

“그, 비행기가 뜰 만한 공간은 없어 보입니다만.”

활주로는커녕, 평지 하나 없이 울퉁불퉁한 섬.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마루이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희 호위함을 이용하시면 되겠군요. 지금 당장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와 반대로, 카스미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둘 다 필요 없다.”

진혁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대답과 함께 손가락으로 바깥의 창문을 가리켰다.

그들의 시선이 진혁의 손가락 끝을 따라 창문 밖으로 향한 순간.

“저, 저건…….”

둘은 그제야 진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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