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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89화 (89/174)

89화

관서헌터성.

관서지방의 엽사들을 총괄하는 일본의 두 방위기구 중 하나.

그중에서도, 회의실 안에 모인 자들은 일본 전체에서도 일류라 불릴 만큼 강한 자들이었지만.

“…….”

그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이겨 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 위압감의 근원은, 한국의 엽사가 손에 쥔 한 자루의 붉은 장검.

“……설마.”

침묵 속에서,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일본의 엽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의 시선은 진혁이 쥔 붉은 검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어릴 적, 전쟁을 겪은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혈마검?”

한 번 휘두르면 열 명이 쓰러지고, 두 번 휘두르면 백 명을 베어 냈다는 마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떠올린 엽사의 얼굴빛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 갔다.

놀란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혈마검?”

“혈마검이라고?”

진혁 일행을 둘러싼 일본 엽사들의 시선이 붉은 검을 향해 모였다.

혈마검 아스칼론.

그 저주받을 검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직접 검을 마주했던 일본의 엽사들이 더욱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쟁을 치렀던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저주받을 마검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은 떠올렸다.

“서, 서진혁이라고 했지?”

“서문휘! 혈귀 서문휘!”

혈마검의 주인.

홀로 제국의 정예, 제국토벌대의 엽사 백 인을 베어 낸 악귀.

“그러면, 저자가 서문휘의 후예인가…….”

잊혀졌던 과거의 공포가, 그들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적이 아닌, 자신들을 도울 지원군으로.

“서문휘의 후예라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게다가, 손에 들린 건 그 혈마검이라고.”

“어째서 다섯 명만 보낸 것인지 의아했는데……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군. 모욕이 아니었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으르렁대던 엽사들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뭐예요, 이 사람들! 화를 냈다가 말았다가…… 완전 자기 맘대로네.”

갑자기 변한 회의실의 분위기에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힘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걸 보니, 역시 인간들답구나.”

옆에 서 있던 청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코웃음 쳤다.

허나 일본의 엽사들은 그녀들의 반응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혈마검 아스칼론과 그 주인인 서진혁에게로 향해 있었으니까.

‘덕분에 소란은 좀 가라앉았군.’

분위기가 완전히 변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가이스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괴수와 싸우기도 전에 피를 볼 뻔했으니까.

“그러면, 다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시오!”

곧, 가이스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회의장의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시작부터 이 정도라면……제법 어렵겠어.’

진혁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일본의 엽사들을 살피는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시모노세키.

고베와 함께 괴수로부터 관서를 방어하는 거대한 요새 도시.

온갖 술식으로 보강된 성벽과 어지간한 괴수는 일격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마력포들은 제국을 괴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는.

“키이이이!”

“크으으…….”

드높은 성벽은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도시는 폐허로 변한 지 오래.

금 간 빌딩 사이를 배회하는 수많은 괴수들의 모습만이, 도시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끊어진 성벽의 한구석.

“과연, 갑 급의 힘이란 대단하군요. 수십 년 동안 뚫지 못했던 요새 도시의 성벽을 이토록 쉽게 무너트릴 줄이야.”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무너진 성벽의 단면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당연한 일이다.

남자의 말에 답한 것은, 성벽 위의 존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벽에 ‘앉은’ 존재였다.

설마, 우리의 힘을 저 열등한 것들과 비교한 건 아니겠지.

성벽 앞으로 뻗은, 십 미터 남짓한 길이의 보라색 정강이와 그 위로 드러나 있는 거대한 상체.

그 키가 몇 미터인지 짐작조차 안 되는 거인의 이마 가운데엔 커다란 눈 하나가 주변을 쉴 새 없이 살피고 있었다.

갑 급 괴수, 외눈박이.

“그럴 리가요. 순수한 감탄이었을 뿐입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외눈박이의 거대한 눈 속, 광오한 눈빛을 마주한 여명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죠?”

여명은 괴수의 거대한 눈동자를 향해 사진 하나를 들이댔다.

정장을 몸에 걸친 채 싸늘한 표정을 지은 미청년.

서진혁의 사진이었다.

……십 년 전의 그 꼬맹이인가.

티끌만 한 사진을 내려다보며, 외눈박이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들, 괴수들을 대적하기엔 터무니없이 나약한 존재.

주제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 용기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던 하룻강아지.

그 녀석이, 십 년 만에 이렇게 강해졌다 말하려는 것이냐?

여명을 내려다보는 외눈박이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거짓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외눈을 올려다보며, 마인은 씨익 웃었다.

“의심되신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그럴 것이다.

말을 마친 외눈박이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소란이 지나간 이후, 회의가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관서의 중심이 괴수들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사실상, 회의라기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을 브리핑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본섬을 일직선으로 가르는 차단선이라니…… 허무맹랑하군요.”

회의의 결과대로 지도에 선을 긋던 주연은 혀를 찼다.

남단의 고베와 오사카, 교토를 지나 북단의 쓰루가 시까지 이어진 기다란 직선.

그녀의 눈에, 가이스케가 제시한 최후방어선은 허점 투성이였다.

“방어선이 이렇게 길어선, 절대로 괴수들을 막아 낼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제법 많은 수의 엽사들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유지하려고…….”

방어선이 길어질수록, 방어선을 지키는 엽사들의 밀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괴수들을 상대로 사용하기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전술.

방어선의 어디 한 곳에 구멍이라도 뚫리는 순간, 방어선을 지키던 엽사들은 순식간에 포위당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진혁의 반응은 달랐다.

“놈들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전방위에서 몰려드는 괴수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일 순 없으니까.”

지킬 게 없다면 모를까, 방어선의 뒤에 존재하는 것은 수백만이 살아가는 대도시다.

일본 엽사들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짜낸 고육지책일 터.

한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 또한,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려는 발버둥이었으리라.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고작 다섯 명을 보낸 게 문제일 뿐.

“클레어, 성전기사단에선 아직 연락이 없나?”

“우선은 한 개 지단 규모를 보내 주기로 했어요. 금방 도착하지는 않겠지만요.”

“부팀장, 아라길드는?”

“일주일이 필요하답니다.”

“시간이 모자라.”

진혁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괴수들이 방어선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여유는 약 사흘.

그마저도 죽음을 각오한 일본의 엽사들 몇몇이 제대로 시간을 끌어 줄 때의 이야기다.

‘필요한 건, 나흘인가.’

나흘을 버텨야만,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전원이 삼 품 이상의 실력을 지닌 성기사와 아라길드의 전력이라면, 괴수를 몰아내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되어 줄 터.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렇다면…….’

지도를 내려다보는 진혁의 눈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곧, 그의 검지가 한 도시를 가리켰다.

[고베]

“우린, 여기로 간다.”

길게 이어진 차단선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

“분명, 괴수들이 가장 많이 몰려들 위치군요. 어쩌면 시고쿠의 괴수들까지 막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옆에서 지도를 바라보던 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지원이 필요한 장소를 골라야 한다면,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고베가 가장 적합했으니까.

그 말을 듣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우리가 막아 낸다면, 다른 지역에 여유가 생길 거다. 나흘 정도는 버텨 낼지도 모르지.”

순간.

“팀장님, 우리……라면.”

진혁의 말에 담긴 오묘한 뉘앙스에, 주연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상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담겨 있었다.

진혁의 답은 짧았다.

“우리가 고베 전역을 맡는다.”

“네에?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클레어가 놀라 소리를 지른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모리 가이스케.

일본의 명문가 중 하나의 당주이자, 관서엽사성의 우두머리.

자리에 어울리는 뛰어난 지략과 무력을 지닌 일본의 강자 중 하나였지만.

“겨우 다섯 명이서 고베를 방어하겠다니, 아무리 혈마검의 주인이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진혁의 제안을 들은 그의 반응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베.

인구 약 150만의 거대한 공업도시.

고작 다섯 명이 지키기엔, 그 면적이 지나치게 넓다.

‘아니, 지킨다는 말이 성립되기는 하는 건가?’

구경한다 혹은 도망친다라면 모를까, 지켜 낸다니.

그런 식이라면, 논밭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는 마지노선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가이스케가 듣기에, 진혁의 말은 문자 그대로 개소리였다.

그러나.

“아니.”

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말을 마친 진혁의 눈이 가이스케와 마주쳤다.

순간, 모리가의 당주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진짜야. 이 사람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 듯, 진혁의 눈빛은 담담했다.

‘정말…… 가능한 것인가?’

처음에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그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도움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처음과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가이스케.

그를 향해, 진혁은 미리 준비했던 요구 사항을 꺼내 들었다.

“우선은…… 보구가 좀 필요하겠어.”

그리고 괴수의 시체도.

말을 마친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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