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카게(影).
미국의 S급 헌터 집단, 센티넬(Sentinel) 중 하나인 오스틴 젠킨스가 일본에서 직접 키워 낸 헌터들.
미국에서 직접 들여온 보구와 장비 그리고 체계적인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살육 병기였지만.
“어떻게, 이렇게 쉽게.”
눈앞에서 허무하게 죽어 버린 카게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오스틴의 눈은 거세게 흔들렸다.
‘상대가 S급 헌터라도, 이들의 기척을 읽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 상대가 S급 헌터를 아득히 초월한 존재, 용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일어난 착각.
하지만, 그 사실을 오스틴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지금 보낸 서른은 전멸했다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연락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반쯤은 기정사실.
저들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더 보내 봐야 큰 쓸모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작전을 바꿔야겠어.
생각을 마친 그의 시선이 텅 빈 대로의 중앙에 박힌 검은색 수정으로 향했다.
도로를 포장한 아스팔트 사이에 숨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오스틴은 그 수정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황도 도쿄 전역을 영역으로 하는 거대한 마법진의 일부.
‘대마법진을 펼쳐야 한다.’
생각을 마친 오스틴은 수정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수정은 마법진을 가동시키는 일종의 스위치.
그처럼 자격을 부여받은 자라면, 도쿄 전역에 박혀 있는 수정 중 하나에 접촉하는 것만으로 마법진을 가동할 수 있다.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해.’
순식간에 수정과의 거리를 좁힌 오스틴은 금속 장갑으로 덮인 손을 내뻗었다.
이윽고, 그가 바닥에 박힌 수정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다음 마나를 주입한 순간.
쿠구구궁!
“지, 지진?”
대마법진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발동된다.
그렇다면, 이 진동은 대체 뭐란 말인가.
흔들리는 몸의 균형을 다잡은 오스틴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주변을 봉쇄하고 있던 경찰들 역시 갑작스런 지진에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
허나.
콰아아앙!
폭음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이 현상이 지진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
서진혁과 한국의 엽사들이 묵고 있던 호텔의 지하.
“키이이이!”
그곳을 부수고 몸을 일으킨 붉은 파충류.
“크아아아!”
딱딱! 딱딱딱!
그리고 그 뒤로 나타나는 괴수들을 바라보던 오스틴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사라져 갔다.
이내, 괴수와 용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흑청색의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 등에는 붉은 장검을 멘 검은 머리의 미청년.
“오스틴 젠킨스.”
오스틴을 부른 남자가 손짓하자, 투구를 쓴 식귀가 무언가를 던졌다.
‘……카게.’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를 마주한 오스틴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시체가 입은 검은 옷의 문양을 가리켰다.
희고 붉은 가로선을 채워 넣은 별.
미국헌터협회, AHA의 상징.
“도쿄 한복판에서 미국과 일본의 보구를 뒤집어쓴 엽사들이 야밤에 기습을 가했다…….”
‘젠장, 지웠어야 했는데!’
S급 헌터조차 기척을 찾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보구였으니, 굳이 출처를 지울 이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
그 약간의 방심이 발목을 잡을 거라곤,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해명해 줘야겠는데.”
서진혁.
오스틴을 마주한 그의 두 눈이 귀기로 시퍼렇게 타올랐다.
“이런, 생각만큼 머리가 좋은 친구는 아니었나 보네요. 교관 노릇은 잘하길래 기대했는데.”
황거의 중심, 정전(正殿).
그곳에서 천황과 함께 오스틴을 지켜보던 미령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옆의 천황을 바라봤다.
그녀와 달리, 천황은 얼굴에서 동요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러면. 다 끝장이지 않은가!”
일본의 인력과 미국의 기술이 합쳐 만들어진 무력집단이 한국의 유력 가문 후계자를 기습했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미국까지 연관된 심각한 외교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은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툭. 투툭.
긴장한 듯 얼굴에서 땀을 흘리던 천황은 지팡이로 연신 바닥을 두드려댔다.
“한 나라의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겁은 많으시네요. 직접 나설 힘도 있으시면서.”
“뭐라?”
하지만, 미령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폐하께서 가지신 그 보구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저들을 상대로 해 볼 만할 텐데요?”
이제는 삼신기보다 귀중한, 백 년 전부터 내려져 온 천황가의 보구들.
허수아비였던 천황에게 권력과 무력을 가져다 준 그 힘이라면, 혈마검의 주인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리고…… 아직, 저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
조금 진정한 듯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는 천황을 향해, 미령은 가볍게 미소 짓고는 화면 속의 오스틴과 천황이 낀 외알 안경을 번갈아 가리켰다.
“제가 그 보구에서 손댄 건, 지배의 능력만이 아니거든요.”
스으으!
말을 마친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망자들과 함께 나선 진혁이 사무라이 갑옷을 입은 오스틴과 마주했을 때.
‘저건.’
상대의 영혼을 꿰뚫어 본 그는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영혼이 더럽혀져 있어.’
망령들이 가진 카르마와는 다른 검은 기운이, 오스틴의 영혼을 반쯤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기였다.
‘마기를 비틀어서 복종의 계약과 비슷한 효과를 냈군.’
파슬란의 술법과 비교하면 저열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고, 영혼에 손을 대다니.’
영혼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천계의 신과 명계의 주인뿐.
명계의 주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사령술사의 눈에, 오스틴의 영혼에 해 놓은 짓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금기였다.
‘그 마인인가.’
총리대신의 모습으로 변장한 여자.
그 여자만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으리라.
‘우선은…… 저 더러운 마기들부터 떼어 내야겠어.’
그다음엔.
‘총리대신, 놈을 친다.’
두근! 두근!
결심을 세운 진혁의 검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심장에 가득 찬 흑마력이 검은 피와 섞여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하지만.
진혁이 채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
“끄, 끄으으…….”
오스틴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S급, 일 품에 이르러 엽사의 한계를 초월한 자라기엔 너무나 처절한 비명 소리.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꾸득! 꾸드득!
남자의 사지가 제멋대로 뒤틀린다.
스으으!
인간이 꺾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진 오스틴의 팔다리가 서서히 검게 물든다.
그와 동시에.
‘영혼이, 잠식되고 있다.’
그의 눈에, 오스틴의 영혼에 검댕처럼 묻어 있던 마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꾸드드득!
뒤틀린 사지는 어느새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몸집을 불려 나간다.
S급 헌터 오스틴 젠킨스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살덩이뿐.
덩치를 불려 가던 살덩이가 빠르게 주어진 형태를 갖추어 나갔을 때.
“……괴수인가.”
오스틴…… 아니, 오스틴이었던 것을 마주한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크으으.”
네 발로 걷는 짐승.
송곳니가 드러난 머리에는 사자의 황금색 갈기가 바늘처럼 뾰족하게 서 있었고, 사자의 꼬리가 있어야 할 자리엔 마치 전갈처럼 검고 뾰족한 독침이 달려 있다.
그리고 괴수의 몸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세의 마기.
“천황……폐하…….”
“갑 급인가.”
한때 일 품의 엽사였던.
하지만 지금은 갑 급의 괴수로 영락(零落)한 존재.
“만……세…….”
생전에 주입된 복종의 편린만을 내뱉는 전갈사자를 향해.
“가라.”
스릉!
진혁은 아스칼론을 뽑아 들며 눈을 빛냈다.
그 순간.
“크으으!”
딱딱딱딱!
“키이이이이!”
진혁의 뒤에 자리한 망자들이 갑 급의 괴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스으으으!
‘망령이여.’
검은 심장으로부터 끌어낸 순수한 흑마력이 사령술사의 주변을 장악한다.
이내, 망자의 기운은 그가 머물렀던 호텔을 향해 움직였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너희의 육신에 깃들어라.’
진혁이 술법의 시동어를 맺어 냈을 때.
스으으으!
그의 주변에 퍼져 있던 흑마력이, 새로운 망자를 찾아 빠르게 흩어졌다.
‘이것은 너희의 죄였으니.’
그대로 돌려주마.
콰아아앙!
전갈사자와 맞붙는 망자들을 바라보던 진혁.
타타타탓!
그의 양옆으로, 보이지 않는 발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강하긴 하네요. 보구까지 두른 갑 급의 괴수를 저기까지 몰아붙일 줄이야.”
황거에서 전갈사자와 망자의 전투를 지켜보던 미령은 놀랐다는 듯 입을 살짝 가렸다.
그녀의 말대로. 오스틴…… 아니, 오스틴이었던 괴수는 생각만큼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틴의 상대인 괴수들이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
“확실히 조금 이상하게 생겼지만…… 용은 용인가 보죠?”
그중에서도, 하늘에서 온갖 마법과 화염 그리고 번개를 쏘아대는 붉은 용의 힘은 강력했다.
머리 부분이 천둥비룡의 것인 게 조금 이상하게 보이긴 했지만, 놈의 공격은 분명 갑 급 괴수인 전갈사자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저, 저래서는. 답이 없지 않은가! 갑 급 괴수로도 상대할 수 없다니!”
여유로운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천황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래서는, 일본이…….”
자신의 대에서 무너지게 되리라.
무너지는 제국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자, 천황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때.
“크아아아아!”
쿵!
용의 입에서 쏘아져 나간 불꽃에 가슴을 관통당한 전갈사자가 단말마와 함께 지상에 쓰러졌다.
죽음.
아스팔트 위에 몸을 누인 전갈사자의 몸뚱이가 차갑게 식어 갔다.
“이, 이런…….”
괴수의 죽음을 화면으로 마주한 천황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잘게 떨렸다.
제국이 몰락하는 장면이, 손에 잡힐 듯 그의 눈앞에 일렁였다.
허나.
“잊었나요?”
이 와중에도 미령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그들에겐 믿을 구석이 남아 있었으니까.
“우리에겐 아직, 대마법진이 있다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아아아아!”
심장이 파괴된 전갈사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구멍 난 가슴을 서서히 메꾸는 것은, 대마법진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마나.
인구 천만의 거대한 도시를 발동 영역으로 하는 마법진이 제공하는 무한한 마나가, 갑 급의 괴수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봐요, 벌써 멀쩡해졌죠? 몇 번을 쓰러지더라도…….”
화면에서 눈을 뗀 미령은 옆의 천황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녀의 웃음은 곧 지워졌다.
“커, 커헉……”
고통스러워하는 천황의 목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피.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반투명한 검의 형체.
미령은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카게라.”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십.
천황과 오스틴의 수족이어야 할 자들이 반기를 든 이유는 뻔했다.
“……과연. 가만히 당하지는 않겠다는 거군요.”
스으으!
말을 마친 그녀의 몸에서 검은 기운, 마기가 퍼져 나갔다.
동시에, 미령의 몸을 덮고 있던 시즈노 마사코의 껍데기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 아래로 드러난 것은, 검은 가죽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오른손에는 채찍을 쥔 여자.
“……재밌네.”
자신을 포위한 보이지 않는 검사들을 훑어보며, 미령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