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무혁이 마인 사냥꾼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삼 년 전.
미얀마의 독재자로 활동했던 마인, ‘드라큘라’ 민 아웅 슈웨를 처단했을 때였다.
이 품. 국제 기준 A급에 불과한 실력임에도, 단신으로 미얀마의 수도인 앙곤에 침투해 마인이 된 독재자와 그 친위대를 베어 버린 괴물.
그러나.
챙!
“제법…… 하는데.”
자신의 검을 꽉 붙든 붉은 채찍을 바라보며, 무혁은 검게 물든 눈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채찍의 주인은 검은 가죽옷을 전신에 걸친 여자, 미령.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날아오는 그녀의 채찍을 막고 피해 내는 건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물론, 미령을 상대하는 건 그 혼자가 아니었지만.
서걱!
무혁의 검을 꽉 붙들고 있던 채찍의 끝이 단칼에 잘려 나갔다.
갑 급 괴수의 가죽을 꼬아 만들어 어지간한 공격에는 흠집도 안 날 만큼 질긴 재질이었지만.
“크으으으.”
투구를 쓴 식귀가 쥔 붉은 검, 아스칼론 앞에선 큰 의미가 없었다.
“땡큐.”
한때 검을 맞댔던 상대에게 감사를 표한 무혁은, 숨을 짧게 들이쉬고는 두 다리를 구부렸다.
그와 함께, 마나홀에서 하체로 흐르는 순수한 마나의 덩어리들.
쾅!
검 끝을 적에게로 향한 무혁의 다리가 용수철처럼 땅을 박찼다.
순간.
팟!
총탄처럼 쏘아져 나간 무혁의 신형이 셋으로 나뉘었다.
칠성무(七星武)
분섬격(分閃擊)
팟! 파팟!
한 개의 실체와 두 개의 잔상.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세 명의 무혁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꿔 가며 미령을 향해 검을 들이댔다.
“잔재주를!”
어느새 끊어진 채찍을 재생시킨 미령.
눈살을 찌푸린 그녀의 채찍이 종으로 휘둘러졌다.
팡!
소닉붐과 함께 채찍의 끝이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든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던 채찍은 단숨에 세 명의 무혁을 꿰뚫었다.
그러나.
‘잔상?’
셋 모두가 가짜란 사실을 눈치챈 그녀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보이는 오러의 칼날.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냥꾼의 비릿한 웃음.
미령의 본능은, 죽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콰아앙!
무혁의 체중과 오러를 실은 검이 도로에 내리꽂힌다. 도로를 덮은 검은 아스팔트가 충격으로 쩍 갈라졌다.
순식간에 땅에 박힌 검을 뽑아낸 무혁은, 검에 묻은 시커먼 흔적을 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칭찬해 주지. 지금까지 이걸 사용하고도 목숨을 부지한 마인은 한 명도 없었거든.”
“……빌어먹을 개자식이.”
하지만, 미령은 무혁의 칭찬에 욕으로 답례해 주었다.
조금 전까지 채찍을 들고 있던 그녀의 오른팔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
꾸드득!
근육으로 혈관을 조여 검은 피를 흘리는 오른 어깨를 지혈한 그녀는 남은 왼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채찍을 손에 쥐었다.
“죽여 주마.”
촤아악!
눈에 독기를 품은 미령의 채찍이 무혁을 향해 뱀처럼 달려들었지만, 오른팔을 잃은 그녀의 채찍을 피하고 막아 내는 건 한결 수월했다.
‘이쪽은 해결될 것 같은데.’
두 망자와 함께 미령의 채찍을 가볍게 쳐내며. 무혁은 검게 물든 눈, 마안으로 그녀의 옆을 곁눈질했다.
서무진.
한때 서가의 후계자로 낙점된 자였으나, 서가와 한국을 배신하고 도망친 대적.
‘십 년이 넘었다곤 하지만…… 그때랑은 비교가 안 돼.’
어린 시절이었지만, 무혁은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림자의 힘을 빌어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 도망쳤던 큰아버지.
그때와 달리, 지금의 서무진은 어떠한가.
촤촤촥!
그림자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촉수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붉은 용과 정면으로 맞싸우는 마인, 어지간한 일 품의 엽사라도 혼자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도쿄의 마인들을 빨리 정리해야 할 텐데.’
그가 직접 키워 낸 마인 사냥의 전문가들.
지금쯤 도쿄 곳곳에 나타난 마인을 사냥 중일 직원들을 떠올리며, 서무혁은 마나홀의 마나를 한껏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우웅!
‘뭐지?’
가까운 곳에서, 거대한 힘이 갑작스레 그의 기감에 걸려든 것은.
‘강력해, 아주 강력해.’
갑 급 괴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압도적인 존재감.
무혁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곁눈질했다.
그리고.
‘아니, 저건.’
그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한 무혁은 속으로 경악했다.
“크허허헝!”
조금 전까지 차갑게 식은 채 쓰러져 있던 갑 급 괴수, 전갈사자의 사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포효하고 있었으니까.
쩌저저적!
‘……어쩌면, 해 볼 만하겠어.’
전신의 털과 가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사자를 바라보며.
“그럼, 더 이상 시간 끌 필요도 없겠는데!”
파앗!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이, 푸른색 섬광을 토해냈다.
―이게, 갑 급 괴수의 힘인가!
도민호.
강철마탑의 부탑주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죽어 망령이 되어 버린 비운의 마법사.
허나, 그가 진혁이 마련한 새로운 육체를 되찾은 순간.
―써도 써도 남아도는 힘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육체야!
우우웅!
도민호는 최상급 마법사의 힘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쩌저적!
전갈사자의 피부와 발톱, 갈기가 칠흑빛으로 물든다.
금속계 마법을 주력으로 하는 강철마탑의 대표마법, 연금(鍊金).
다른 재료에 마나를 더해 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인 마법이었지만.
도민호가 갑 급 괴수의 육체를 재료 삼아 만들어 낸 것은 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금속이었다.
―가죽과 발톱으로 아다만티움을 연성해 낼 수 있다니, 과연 갑 급 괴수의 육체야!
“크허허헝!”
콰아앙!
초금속, 아다만티움.
오러조차 막아 낼 수 있는 기적의 금속을 전신에 두른 검은 사자가 뒷다리를 박찼다.
갑 급 괴수의 근력과 흑마력이 섞여 만들어 낸 경이로운 도약력.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쏘아져 나간 오 미터짜리 짐승의 목표는, 셀 수없이 많은 촉수들이 매달려 있는 묵빛의 장벽.
콰아아앙!
권총탄과 비슷한 속도로 발사된 수십 톤짜리 쇳덩어리는, 그림자로 만들어진 장벽과 촉수를 부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파스스스!
갑 급 괴수의 돌진에 휘말려 뜯겨 나간 촉수들이 검은 연기로 변해 흩날린다.
쩌적!
잘린 촉수의 잔해로 너덜너덜한 검은 벽에 미세한 실금이 인다.
―영감, 진짜 셌잖아?
촉수 대부분이 파괴된 덕에 한결 여유로워진 멜리나는 검은 사자를 내려다보며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수인조차 맺을 수 없는 네 발 짐승의 몸으로 이뤄 낸 성과.
―내가 질 줄 알고?
느닷없이,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파직! 파지직!
붉은 용의 짧은 앞발로 어설프게 맺은 수인.
그 주변으로 푸른색 스파크가 쉴 새 없이 튀기 시작하더니, 어둠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푸르게 빛났다.
최상급 마법을 부리는 마도사, 민호의 가르침을 이용해 재해석한 그녀의 마법.
―울어라, 굉뢰(轟雷).
콰르르릉!
건물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벼락이 검은 장벽을 강타한다.
콰릉! 콰르릉!
한 번, 두 번, 세 번.
눈 깜짝할 새, 수십 개의 번개 줄기가 장벽에 난 동전만 한 실금을 목표로 내리꽂힌다.
일점에 집중된 거대한 에너지가 드릴처럼 그림자의 틈을 파고든다.
이내.
푸스스스!
―봤어, 영감? 나도 이 정돈 할 수 있다고!
“키이이이이이!”
두꺼운 장벽에 구멍을 뚫는 데 성공한 멜리나는 기분 좋은 포효를 내질렀다.
허나.
‘부족하군.’
두 망자의 공격을 바라보던 진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디서 저런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어만큼은 완벽에 가깝다.’
갑 급 괴수와 용의 육체를 지닌 망자들이 전력으로 공격을 가했음에도, 얻어 낸 소득은 고작 동전만 한 구멍뿐.
푸슈슉!
거기에, 끊어진 촉수들도 하나둘씩 재생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은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을 것이 분명했다.
‘틈을, 조금 더 만들어야겠어.’
문제는, 부족한 흑마력.
갑 급 괴수를 새롭게 망자로 일으키면서, 영지로부터 공급되는 만큼의 흑마력이 망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고 있었다.
해 볼 만한 방법은 하나뿐.
‘남은 흑마력을 모두 이용한다.’
일격.
타격을 입은 그림자를 무너트리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공격.
스으으!
‘망자여.’
왼손에 쥔 영혼 구슬에 흑마력을 불어넣은 그가 오른손을 내뻗었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새로운 육체에 깃들어라.’
갑 급의 괴수조차도 쉽게 뚫어 내지 못한 장벽.
허나, 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만한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스으으!
—……!
진혁의 의지에 따라, 망령들이 흑마력의 향기를 쫓아 날아갔다.
반쯤 무너진 호텔의 지하를 향해.
서무진.
아니, 이제는 여명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흑룡대의 대주.
지구의 음지에 암약하고 있는 마인들 중에도 손에 꼽힐 만큼 강한 것이 그와 그가 이끄는 흑룡대였지만.
‘설마, 이렇게 오래 끌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림자의 장벽 뒤에 몸을 감춘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인이 되는 대가로 얻어 낸 그림자의 힘.
평범한 마인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희귀한 재능을 한계까지 성장시킨 무진이었지만, 진혁이 부리는 괴수들은 그와 엇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못 보던 사이…… 정말로 강해졌구나.’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꼬마 아이.
그 꼬마가 이렇게 강해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것도 여기서 끝이다.’
긴 밤과 새벽을 지나, 일출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자는 빛과 함께할 때 더욱 진해지는 법.
그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강해진 건 인정하겠다만, 결국 이기는 것은 나다.’
승리를 예상한 무진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갔다.
그러나.
콰아아앙!
무언가가 대지를 부수고 꿰뚫는 소리.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건가?’
검은 장벽 너머에서 들려온 폭음에, 무진은 마기를 눈으로 끌어올렸다.
곧, 그림자를 꿰뚫은 그가 장벽 너머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하.”
굉음의 정체를 눈치챈 무진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반쯤 무너진 호텔의 지하주차장.
그 천장을 뚫고 나온 것은, 인간의 왼팔이었다.
그 크기가 전봇대만 하다는 것이, 인간과의 차이점이긴 했지만.
‘외눈박이인가.’
갑 급 괴수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
‘우리 진혁이가 날 너무 무시한 것 같은데.’
저 장난 같지도 않은 공격이 누구의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막아 주마.’
로켓처럼 날아드는 놈의 왼팔을 마주한 무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