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갑 급의 괴수는 그 자체로 용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육체에 박혀 마기를 쉴 새 없이 흡수하고 내뿜는 최상급 마정석은 생체 마력 엔진이라 불리는 용심과 비교해도 출력에서 뒤지지 않았으니, 나머지 육체 역시 그 출력을 견딜 만큼 강인한 것은 당연한 일.
하늘로 날아오른 외눈박이의 왼팔 역시,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거인의 왼팔이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주인을 잃고 홀로 남은 왼팔을 움직이는 것은, 진혁의 남은 흑마력과 영혼 구슬 속 망령들의 카르마.
망자라 부르기엔 부족한 모습이었지만, 육체로 삼은 왼팔의 근력과 내구성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서무진이 펼쳐 낸 그림자의 장벽.
수많은 촉수로 꿈틀거리는 흉물을 꿰뚫기 위해선,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성준.’
진혁이 부른 것은, 왼팔이 잘린 미령과 싸우고 있던 두 망자 중 하나.
―네, 진혁님.
서걱!
성준은 대답과 함께 갑 급 보구, 아스칼론의 붉은 칼날로 날아오는 채찍을 토막 냈다.
오른 팔을 잃은 탓일까.
미령이 휘두르는 채찍의 위력은 이전에 비해 약해져 있었다.
그 덕에, 성준 역시 처음보다는 여유 있어진 모습.
진혁은 망자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검을 던져라.’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다.
언제 적의 채찍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일한 무기인 검을 버리라니.
원래의 검은 채찍에 휘감겨 두 동강 났으니, 아스칼론을 던지고 나면 남는 것은 아다만티움으로 덮인 맨손뿐이다.
그럼에도.
―네.
휙!
성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쥔 붉은 검을 하늘로 던져 올렸다.
쐐애액!
식귀의 거구에 맞게 크기를 키운 거검이 공기를 가른다.
그의 주인, 진혁이 원하는 곳을 향해 쏘아진 붉은 검을 향해 무언가가 다가온다.
갑 급 괴수, 외눈박이의 잘려 나간 왼팔.
꽈악!
순식간에 아스칼론과의 거리를 좁힌 거대한 왼팔이 공중에 떠오른 검을 낚아챈다.
우웅!
새로운 주인의 손에 들린 거검이 풍선처럼 사방으로 부풀어 오른다.
꾸드득.
자신보다 커다란 검을 한 손에 쥔 왼팔이 손목을 비틀어 검끝을 겨눈다.
파츠츠츠!
그와 함께 외눈박이의 팔과 검신을 감싸는 아스칼론의 권능, 적룡기.
쐐애애액!
피처럼 붉은 한 줄기 빛이 하늘을 가르고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서무진.
그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온 그림자의 성벽을 향해서.
푸욱!
요란한 기세와 달리, 아스칼론의 칼끝은 그림자를 두부처럼 부드럽게 관통했다.
그 순간.
콰아아앙!
붉은색의 폭발이 검과 팔뚝, 그림자를 삼켰다.
거대한 팔뚝에 쥐어진 붉은색의 검, 아스칼론이 그림자의 장벽을 파고든 순간.
‘패배인가.’
서무진은 패배를 직감했다.
단순히, 그의 평생을 바쳐 완성시킨 그림자가 꿰뚫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리 독립검의 힘을 빌렸다지만…… 설마, 정말로 뚫어 낼 줄이야.’
비릿하고 씁쓸한 맛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패배의 쓴맛 같은 비유가 아니다.
‘이거…… 엉망인데.’
그의 몸은, 기둥만 한 거검에 꿰뚫린 채 지면에 박혀 있었으니까.
무진의 몸속을 흐르는 검은 피가 입안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입술 밖으로 흘러내린다.
평범한 인간보다 회복이 빠른 마인이라도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상.
오랜 시간을 들인다면 회복이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그를 적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미령.’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무진은, 남은 힘을 쥐어짜 그의 심복에게 의지를 전했다.
‘우린 실패했다. 흑룡대와 다른 마인들을 수습해서 철수해.’
무진 자신은 실패했지만, 그의 의지를 이어 나가야 할 자들까지 죽게 놔둘 순 없었다.
‘미령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그녀라면, 모든 마인들의 숙원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으리라.
스으으!
할 말을 마친 무진은 아직 몸에 남아 있는 마기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큭.”
갑 급 보구, 아스칼론에 의해 그의 주요장기 대부분이 박살 난 상황.
망가진 몸으로 마기를 운용하는 데엔 극심한 고통이 따르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왕 끝난 거,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줘야겠지.’
그의 의지를 이어 나갈 자, 미령.
그녀의 생존률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다면, 더한 고통도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팟!
미령은 도망치는 대신, 갑자기 나타나 그의 어깨에 왼팔을 올렸다.
“……무슨 짓이야.”
“대주.”
일그러지는 무진의 얼굴과 달리, 전투 중에 달려온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대주께선 살아남으셔야합니다, 미래를 위해.”
스으으!
미령의 말과 동시에, 그녀의 왼손으로부터 순수한 마기가 전해져 왔다.
마기가 망가진 몸뚱이를 헤집으면서 극통이 몰려왔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스으으!
한쪽 팔을 잃은 미령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 지금 무슨!”
“이미 늦었어요.”
분노한 무진의 말에, 미령은 고개를 젓고는 무진의 몸에 불어넣은 마기를 움직였다.
이내, 무진이 박힌 아스팔트 바닥 위로 검은색의 원이 생겨났다.
마인들이 이동용으로 사용하는 차원의 틈.
“너어어어어!”
“안녕히.”
미끄러지듯 차원의 틈으로 떨어져 내리는 무진을 내려다보며, 미령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푹! 푸푹!
그녀의 몸에, 오러와 냉기로 뒤덮인 날붙이가 박혀 들 때까지.
남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도망친 것 같습니다.
“그런가.”
성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혁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올려다봤다.
마인의 육체를 이루던 연기 사이로, 산산조각 난 영혼이 눈처럼 흩뿌려졌다.
서무진을 탈출시킨 여자 마인이 소멸하면서 남긴 흔적.
그녀가 아니었다면, 치명상을 입은 무진은 진혁과 무혁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으리라.
“빌어먹을……!”
다 잡은 목표를 놓쳤다는 사실에, 무혁은 주먹을 쥔 채 이를 갈았다.
‘겨우, 한 걸음이었는데.’
첫 조우까지 팔 년이 걸렸다.
다음 기회를 얻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인가.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처럼 날려 버린 허무감이, 무혁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진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네?”
뜬금없는 형의 한마디.
무혁은 영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봤지만, 진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다시 한 번 만나게 되겠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셀 수 없이 넘나들면서 얻게 된 일종의 직관.
녀석이, 진혁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때를 준비해라. 두 번 놓칠 수는 없으니.”
이번엔 그들이 먼저 찾아왔지만.
다음엔 진혁 자신이 직접 찾아가리라.
도로에 깊숙이 박힌 아스칼론을 내려다보며, 진혁은 다짐하고는 고개를 들어 무혁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그만 움직이도록 하지.”
아직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도쿄에 침투한 마인들과 늘어난 던전들을 제거하고, 불타는 도시를 다시 정상화시켜야 했다.
그것이, 엽사로서 해야 할 의무.
“그러죠, 형님. 그럼 전 먼저.”
타탓!
조금 전과 달리, 무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몸을 날렸다.
‘우리도 가지. 아직 마인은 많이 남아 있다.’
―알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반갑기는, 귀찮아 죽겠는데.
―육체의 한계를 시험해 볼 기회구려, 흘흘.
빠르게 멀어지는 동생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의 명령에, 망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쐐애애액!
용의 등에 올라탄 채 하늘을 나는 진혁의 뒤로, 붉은 여명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피로나의 자연은 지구와 매우 흡사하다.
마법과 과학이 뒤섞인 찬란한 문명으로 뒤덮인 지구와는 달리, 문명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는 게 다른 점이었지만.
짹짹짹!
빛조차 잘 들지 않는 검은 숲.
이곳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평범한 생명체들이 아니었다.
새와 토끼 같은 짐승부터 풀과 나무 같은 식물들까지.
그 모든 것이, 마기를 받아들여 변질된 괴수의 일종.
“여긴…….”
중상을 입은 서무진이 깨어난 곳은, 그 마경의 한복판이었다.
“……에피로나군, 좌표 고정 없이 던져 버린 건가.”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을 둘러보던 그는 금세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도.
“미령…….”
목숨을 던져 가며 자신을 탈출시킨 심복.
그녀의 마지막 얼굴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누군가를 애도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 여기라면 당분간 추격은 없겠어.”
그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마인이 되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숙원.
그곳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스으으!
무진은 숲에 가득한 마기를 조금씩 빨아들였다.
상처 부위를 송곳으로 후비는 고통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지만, 죽어 가는 육체의 재생을 가속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아주 천천히, 조금씩 아물어 가는 상체의 흉측한 상처를 내려다봤다.
‘우선은, 몸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회복이 끝난 다음에는.
‘놈을 다시 찾아가야겠어.’
외눈박이.
에피로나를 지배하는 갑 급의 괴수 중 하나.
‘언젠가…… 다시 만나자꾸나.’
서진혁.
그의 얼굴을 떠올린 무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샌프란시스코의 한복판에 위치한 미국 헌터 협회(America Hunter Association, AHA)의 본부.
“오스틴 젠킨스가 사망했습니다.”
“확인된 사실인가요?”
“현지 정보원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S급 괴수로 변이한 이후, 토벌된 것으로 보입니다.”
“쯧, 귀중한 인력이 죽었어. S급 헌터는 어디서 구해 올 수도 없는데.”
남자의 보고에,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자는 눈살을 슬며시 찌푸렸다.
“그러면, 시신이라도 수습해 오세요. 일본에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그것이,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말이죠?”
“한국의 헌터가, 오스틴이 변이한 괴수의 사체를 전투에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괴수의…… 사체를?”
괴수의 가죽이나 뼈도 아니고, 죽은 괴수의 사체를 전투에 활용한다니.
비서의 말에 그녀는 잠시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러면.”
“한국에 연락하고, 회수팀을 보내도록 해요.”
말을 마친 여자의 입꼬리가, 묘하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