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일본을 휩쓴 관서의 괴수와 관동의 마인들.
진혁과 망자들의 도움으로 그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일본이 입은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일본은 끝장이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카게에게 습격받아 왼팔을 잃은 모리 가이스케가 오른손을 내밀자, 소멸한 마인을 대신해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마모루 사토시가 코웃음 쳤다.
관서의 절반과 도쿄가 파괴되고, 수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
일본의 멸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악수한 손을 힘껏 맞잡은 두 사람의 눈에 불똥이 튀기던 사이.
“팀장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멜리나의 몸에 실은 짐들을 점검한 주연은 진혁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에휴, 몸뚱이만 용이면 뭐 해? 짐꾼 신세인 건 똑같은데.
―그런 소리나 할 거면 당장 그 몸뚱이나 내놓지 그러냐?
―내가 영감한테 이걸 왜 줘?
“그럼, 이만 가지.”
머릿속에서 두 망자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흘려보내며,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붉은 용의 꼬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토벌 2팀과 청명이 그 뒤를 따랐다.
“와…… 정말이지,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렌이랑 기사님들이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걸요?”
뒤에서 따라오던 성녀, 클레어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뒤따르던 렌은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더 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시지 않았습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아쉬운 거니까.”
다독여 주는 호위기사의 말에 렌은 애써 웃음을 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용 위에 올랐다.
팀원들과 망자들 모두가 올라탄 것을 확인한 다음, 진혁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 무혁과 특수부의 직원들.
“다시 보자꾸나.”
“그럽시다. 어차피 놈을 제거하려면 한 번은 만나야 하니까.”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혁을 바라보는 무혁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가자.’
예에.
진혁의 말에 멜리나는 맥빠지는 목소리를 내고는 거대한 날개를 움직였다.
어지간한 여객기보다 빠른 속도로 성층권을 가로지르는 붉은 용.
덕분에, 진혁과 일행들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딱딱 딱딱딱!
멜리나가 지상에 내려서자, 영지를 관리하던 스켈레톤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와서는 그녀의 몸에 묶여 있던 짐들을 하나둘씩 들어 어딘가로 옮겼다.
―휴우, 이제 좀 살겠네. 전 그럼 좀 쉴게요, 주인.
곧이어 망자들과 진혁 일행까지 몸에서 내리자,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지은 멜리나는 바닥에 배를 깔곤 편한 표정으로 엎드렸다.
―이미 죽었으면서 쉬긴 뭘 쉬어? 빨리 일어나지 못해? 아직 마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녀석이……!
―아 몰라, 몰라. 죽어서 좀 쉬겠다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옆에서 전갈사자의 몸을 뒤집어쓴 민호가 핀잔을 줬지만, 멜리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우우웅!
그녀의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 아버지.”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받아 든 진혁은, 전화를 건 아버지와 몇 마디를 나눴다.
이윽고.
‘멜리나, 일어나라.’
―왜, 왜요?
‘서울로 갈 거다.’
―힝…… 쉬고 싶은데…….
주인인 진혁의 말에, 멜리나는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AHA에서 널 찾더구나.”
회장실에서 마주한 서강진의 첫 마디는 의외의 것이었다.
“AHA 말입니까?”
그 말에, 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미국 헌터 협회.
미국에서 활동하는 엽사들, 헌터들을 총괄하는 기관.
그들이 자신을 찾을 만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오스틴 젠킨스와 관련된 일입니까?”
미국에서 일본에 파견된 S급, 일 품의 엽사.
그리고 마인의 계략에 의해 괴수가 되어 토벌당한 자.
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틴 젠킨스의 유해를 회수하고자 한다더구나.”
“그래도 일 품의 엽사였으니, 회수하려는 건 당연하겠죠.”
일 품의 엽사가 가진 힘은 국가에 필적할 정도.
그것이 이미 죽은 사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회수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쪽 말로는, 그 유해를 네가 갖고 있다던데. 사실이냐?”
“네.”
진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지만, 진혁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일 품의 엽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갑 급 괴수였습니다. 국제법상으로도 괴수의 소유권은 토벌자에게 있지 않습니까.”
“일 품의 엽사였다는 게 문제지.”
그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두 부자의 시선이 말 없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혁이 너도 알겠지만, 미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나라인 건 틀림없으니까.”
다른 나라에는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S급 헌터를 열 명 넘게 보유한 초강대국.
한국 역시 한 나라에 다섯 명의 일 품 엽사를 보유한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미국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적절한 보상을 받고 유해를 넘기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지. 빚을 지워 두는 셈이니까.”
“만족할 만한 보상이라면, 저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 급 괴수를 넘겨야 한다면, 저 역시 갑 급 괴수의 사체를 보상으로 받아야겠습니다만.”
“……그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마주치는 것조차 힘든 것이 갑 급의 괴수다.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갑 급 괴수의 사체를 대가로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라.
“제안을 거부한다면, 아마도 힘으로 되찾으려 하겠지. 놈들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지난 수십 년간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면, 미국은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스틴의 유해를 찾아오려 하리라.
하지만 진혁의 표정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급한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오겠죠.”
“……상대는 미국이야. 먼저 굽히고 들어올 리가 없다.”
“결국, 그렇게 될 겁니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말에, 진혁은 씨익 웃을 뿐이었다.
서해.
흙탕물 같은 색 때문에 황해라고도 불리는 얕은 바다의 밑바닥엔, 며칠 전부터 한 척의 잠수함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틸러스.
미국 헌터 협회에서 보유한 세 척의 마력 잠수함 중 하나.
동체 곳곳에 박힌 마법과 강력한 마력 엔진으로 무한에 가까운 작전능력과 정숙성을 보유한 잠수함의 내부에선, 승무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팀장님,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된 모양이군.”
부관으로부터 명령서를 받아 든 미국 헌터 협회의 회수팀장, 애덤 사무엘은 시가를 문 채 눈썹을 찡그렸다.
“오스틴 그 자식, 멀리까지 나가서는 나까지 귀찮게 하다니.”
S급 헌터만 아니었다면, 놈이 죽건 괴물이 되건 신경도 쓰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상대는 S급 헌터, 그것도 센티넬의 일원.
유해를 되찾지 못한다면 그 역시 곤란한 일이리라.
“자, 다들 준비해! 1시간 후에 작전 시작한다!”
물고 있던 시가의 타오르는 끝을 잘라 낸 애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잠수함에서 대기하고 있던 회수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원이 A급의 헌터로 이루어진 그들과 S급에 이른 애덤이 힘을 합한다면, 이번 작전 역시 어렵지 않게 끝나리라.
“애송이 녀석, 오스틴 같은 녀석을 이겼다고 기고만장하기는.”
지상에 있을 목표, 서진혁을 떠올린 애덤은 코웃음 치며 침투용 잠수복을 몸에 걸쳤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착 달라붙은 잠수복 아래로 우락부락한 근육의 굴곡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세 시간 안에 끝내고 돌아간다. 가장 먼저 오는 놈에겐 내가 한 잔 사지!”
“팀장이 웬 일로?”
“보너스라도 받았습니까? 아니, 그러면 우리가 아니라 제니한테 갖다 줬을 텐데.”
“뭐, 인마?”
팀원들이 장난스럽게 놀리자 애덤은 눈을 부라렸지만, 웃음 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몇 년 동안 호흡을 맞추며 수십, 수백 번의 임무를 성공해 낸 이들에게, 작전의 성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쿵!
잠수함 밖에서 들려온 둔탁한 소리에, 그들은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놀란 애덤의 시선이 잠수함의 시스템을 관장하는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확인 중입니다.”
마법사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
당황한 그가 급히 잠수함의 제어 시스템을 움직여 확인했지만.
“외부 시야가 먹통입니다. 무언가가 카메라를 뒤덮은 것 같습니다.”
외부를 비춰 줘야 할 화면이 시커멓게 변한 것을 확인한 마법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쿵! 쿵!
그와 함께, 노크하듯 잠수함을 두들기는 금속 소리.
“함체 피해 5%! 무언가가 함체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괴수인가.”
승무원의 말에, 애덤은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해양형 괴수는 전부 토벌된 지 오래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 말고 저걸 설명할 방법이 있나?”
애덤은 한마디로 팀원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 잠수복에 달린 산소공급용 보구를 입에 물었다.
“작전 연기. 우선은 괴수부터 처리한다.”
“네.”
그는 명령을 받은 팀원들이 일제히 잠수복을 입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수함 상층의 해치로 향했다.
‘하필 이럴 때.’
수중돌입을 위해 바닥의 해치를 닫으면서, 애덤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 미터 깊이의 뿌연 바닷속에서 괴수를 상대하는 건 S급 헌터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라면 잠수함을 곧장 수면으로 부상시켰겠지만, 이곳은 작전지역.
상대에게 정체를 드러낼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바닷속에서 처리해야 했다.
쏴아아아!
바다와 잠수함을 가로막은 해치를 열어젖히자, 수심 100미터의 차가운 해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애덤과 팀원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쏟아지는 바닷물을 거슬러 잠수함 바깥으로 이동했다.
곧, 그들의 눈앞에 잠수함을 공격한 괴수가 들어온 순간.
‘이, 이건.’
애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놈들은 죄다 토벌되었을 텐데…….’
잠수함을 집어삼키고도 한참이 남는 크기의 거대한 괴수.
놈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이 절망으로 가득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