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시베리아의 겨울은 혹독하다.
자갈과 진흙 투성이의 척박한 토양과 영하 수십 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자랄 수 있는 생물이라곤 높디높은 침엽수와 이끼 그리고 혹한에 적응한 괴수들뿐.
그렇기에, 겨울의 시베리아는 성전기사단의 좋은 훈련장소이기도 했다.
“전방 1킬로미터 앞 괴수 서른 마리 접근 중.”
“베어도 베어도 끝도 없이 나타나는군. 벌써 서른 마리라니.”
성전기사단 중에서도 정예만을 가려 뽑은 제2기사단.
그들을 이끄는 기사단장, 모렌츠 발터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신성력으로 시력을 강화했다.
곧, 수십 배의 배율로 확대된 그의 눈에 자갈 투성이의 평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괴수 무리가 들어왔다.
“예상 등급 B에서 C, 늑대인간으로 보이는 아종. 훈련용으론 썩 좋지 않군.”
인간형 괴수보단 비인간형 괴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상대적으로 훈련의 의미가 떨어지는 상대.
하지만, 그렇다 해서 피할 이유는 없다.
“기사단, 출진 준비!”
스릉!
신성력이 섞인 모렌츠의 우렁찬 고함에, 혹한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하나같이 자신들보다 거대한 참마검, 클레이모어를 양손에 쥔 기사들의 눈은 뜨거운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출진!”
이내, 단장의 명령이 떨어진 그때.
파앗!
성기사들의 몸에서 일제히 신성력의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곧, 신성력과 마나가 섞여 만들어진 홀리오러가 그들이 쥔 2미터 길이의 참마검을 감싸 안는다.
쿵!쿵!쿵!
혹한에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중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괴수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시베리아의 괴수를 토벌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동계훈련.
이미 훈련의 중반에 들어서 전투에 익숙해진 그들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서걱!
순백의 오러가 늑대인간들의 몸뚱이를 어렵지 않게 찢어발긴다.
개개인이 못해도 B급, 삼 품에 해당하는 정기사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고안된 진형을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괴수들이 당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순식간에, 서른의 늑대인간은 육편이 되어 붉은 대지 위에 흩뿌려졌다.
“정지! 전장 정리 후 휴식한다!”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성기사들을 지켜보며, 모렌츠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 훈련은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어.’
빌어먹을 동토와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는 변함이 없지만, 마주친 괴수의 숫자가 이제까지의 훈련에 비해 약간 적었다.
‘수십 년간 일정한 개체 수를 유지했으니 훈련 때문은 아닐 테고, 요정들의 짓인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요정들의 세계수가 있으니, 그들이 사용하는 고대마법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새로운 마법을 복원하기라도 했나 보군. 본단에 알려야겠어.’
상념을 지운 모렌츠의 시선이 다시 전장 정리를 마치고 쉬고 있는 성기사들에게로 향했을 때.
“전방 1킬로미터, 괴수 한 마리 접근 중!”
주변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의 외침에, 모렌츠는 신성력을 눈에 불어넣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곧, 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 순간.
‘저건…… 뭐지?’
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늑대의 머리와 가죽을 덮은 채 두 발로 선 괴수.
손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는, 조금 전 성기사들이 토벌한 늑대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대체…… 저 덩치는.’
못해도 십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덩치.
잘 발달된 근육 사이로 흐르는 진한 마기는 일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그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최소 A급이다, 전투준비!”
단장의 고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휴식을 취하던 성기사들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다음 참마검을 손에 쥐었다.
쿵! 쿵!
거대한 늑대인간이 발을 앞으로 내밀 때마다 땅이 진동했다.
십 미터를 넘는 덩치만큼 큰 걸음걸이 덕에, 몇 걸음 걷지 않았음에도 놈은 어느새 성기사들의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단장님!”
후방을 경계하던 성기사 중 하나가 놀라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늑대인간이……!”
봐선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의아한 표정을 한 모렌츠의 눈이 진형의 뒤로 향했다.
그 순간.
“아니……!”
모렌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으으…….”
서른 마리의 늑대인간이, 어느새 그들이 쉬고 있던 진형에 모인 채 성기사들을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모렌츠가 놀란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분명, 조금 전에 토벌한 괴수일 텐데…….”
마정석과 주요 골격을 뽑아내고, 가죽까지 벗겨 내 움직일 수 없어야 정상일 늑대인간들이, 어떻게 멀쩡하게 걸어다닐 수 있단 말인가.
‘매복인가?’
허나, 늑대인간들의 가죽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참마검의 흔적들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가능성은 하나뿐.
‘……괴수가.’
되살아났다.
그의 시선이 거대한 늑대인간에게로 향했다.
스으으!
늑대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마기의 악취.
“그으으.”
능숙하게 시커먼 마기 덩어리를 모은 괴수가 마기를 쥔 앞발을 하늘로 들어 올린 순간.
“그으으으!”
“저주받은 것들을 베어라! 이름 없는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인간들을 향해, 기사단은 하얗게 빛나는 검을 힘차게 치켜들었다.
세한빌딩에서 나온 진혁과 청명은 곧장 토벌 2팀과 망자들이 있는 강화도로 향했다.
망자들의 숫자가 곧 힘인 사령술사가, 망자들을 놔두고 홀로 떠날 수는 없는 일.
“시베리아로 갈 거다.”
“예?”
“요정들의 대장로에게 초청을 받았다.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가 봐야겠지.”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클레어가 왕방울처럼 눈을 크게 떴지만, 진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가기 싫으면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니…… 누가 가기 싫댔어요? 좀 춥……긴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성녀였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몸은 오한이라도 든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이 시기면, 기사단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겠군요. 운이 좋다면 마주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레어와 달리, 렌은 옛 생각이라도 났는지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준비해 두겠습니다.”
“출발은 이틀 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진혁은 언제나처럼 당연하다는 듯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주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뒤따라온 청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올 건가?”
“요정들은 어차피 한 번 볼 일이 있었지. 오랜만에 찬바람을 즐길 수 있겠구나.”
결국, 이들 중 강화도에 남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번에도 짐꾼 노릇이라니. 그것도 시베리아까지…… 아이고 내 신세야…….
옆에서 엎드린 채 그들의 말을 듣던 멜리나가 속으로 꿍얼댔다.
또, 또. 이참에 마법을 좀 배워 놓으면 편하게 움직일 것을. 머리가 나쁘니 몸이 고생하지, 쯔쯔…….
그때를 놓치지 않은 민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영감, 지금 날개 안 달린 몸이라 속으로 감사하고 있는 거 다 알거든?
그놈의 영감, 영감. 듣자 하니 수백 년 전에 죽은 거 같던데, 그럼 그쪽이 할머니 아닌가?
뭐? 할머니?
결국, 언제나처럼 시작된 둘의 말다툼.
저 둘은 여전하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자이츠와 성준은 없는 혀를 차며 멜리나와 민호의 말다툼을 구경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번엔 다른 걸 타고 갈 계획이니까.’
다른…… 거요?
‘내가 세계수를 방문할 거라고 광고할 생각은 없다.’
천둥비룡의 푸른 머리가 달린 붉은 용.
조용히 다녀오기에, 독특하게 생긴데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멜리나의 모습은 적절하지 않았다.
‘물론, 너희도 같이 가야겠지만.’
그, 그럼, 뭘 타고 가는데요?
‘조만간 올 거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멜리나 앞에서, 진혁은 눈을 빛냈다.
베르호얀스크.
겨울이 되면 뱉은 침이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극한의 땅.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엔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나무 주제에 세계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나무의 크기는 거대했다.
그 높이만 수백 미터에, 굵기는 어지간한 소도시의 면적과 비슷할 만큼 굵은 나무는 수만의 요정들을 먹이고 재우기에 충분한 수준.
그리고.
쿠우우우!
얼어붙은 세계수를 향해, 금속으로 만들어진 흑색의 거대한 비행정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쿵!
어지간한 컨테이너 상선 만한 크기와는 달리, 민첩한 움직임으로 세계수의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비행정의 날개에 새겨진 것은, 세한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문양.
극초음속수직이착륙비행정, HV-13 검독수리.
기이잉!
영화 속 우주 전함을 닮은 비행정의 아래쪽 입구가 활짝 열리자, 그 안에서 거대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용과 해골, 식귀, 전갈사자.
그 뒤를 따라, 몇 명의 사람들이 혹한의 땅에 발을 디뎠다.
“이름 없는 신이여, 당신의 종에게 따뜻한 손길을…… 엣취!”
온몸을 목도리와 패딩으로 둘둘 감싼 클레어가 신법을 시전하다 말고 기침했다.
“좀 춥긴 한데, 성녀님의 신성력 정도면 막을 수 있지 않나요?”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추위가…… 으으.”
옆에서 붉은색 코트를 걸친 주연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클레어는 콧물을 훌쩍이며 변명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그들의 옆에서, 진혁은 세계수를 자세히 살펴봤다.
탐욕고에 자리한 모조품과 달리 추위에 껍질과 이파리가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모습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모습.
하지만.
“환영합니다, 인간들이여.”
그 의심은, 안에서 나온 한 명의 요정에 의해 깨져 버렸다.
“대장로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주변에 깔린 하얀 눈처럼 흰 피부의 요정은 진혁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세계수의 뿌리 사이에 뚫린 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서진혁 님께선 이쪽으로. 대장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갈림길에 들어선 그녀는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뚫린 줄기를 가리켰다.
“대족장님이 계신 곳으로 곧장 옮겨 줄 겁니다.”
“알았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줄기 안으로 몸을 옮겼다.
순간.
스으윽!
진혁이 올라탄 줄기의 바닥이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그가 지상에서 수백 미터 높이의 나무 꼭대기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
‘평범한 사람은 타기 힘들겠군.’
줄기 밖으로 나온 진혁은 급격한 기압변화에 먹먹해진 귀를 매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왔느냐.”
그의 앞에, 한 명의 요정이 나타났다.
신궁, 에플리오네.
“오랜만이구나.”
진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투명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