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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09화 (109/174)

109화

샌프란시스코의 중심가에 위치한 미국 헌터 협회의 본부.

하루에만 수천 명의 헌터들이 무기를 메고 오가는, 금문교와 더불어 도시의 두 랜드마크 중 하나인 이곳의 지하엔 거대한 벙커가 존재했다.

유사시, 인류가 괴수에 패배하여 멸종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지하도시.

협회의 최고위층 인사가 아니면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이곳의 컨트롤타워에선, 두 여자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사실인가요?”

손에 들린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중년 여성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렸다.

사진 속에 담긴 것은, 작은 섬 만한 크기의 문어형 괴수.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협회장, 에이미 카터의 말에 제니퍼 메이슨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이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해양형 괴수, 그것도 블랙 크라켄이 다시 등장했다니.”

단순히 A급 해양형 괴수 한 마리라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백여 년 전, 미국의 수출길을 틀어막아 대공황을 불러일으킨 주범이 바로 이놈들이었으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진 회장님과 한국의 서진혁, 두 사람뿐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바깥에 퍼진다면 월가에서 뛰어내릴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테니.”

에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진이 공개된다면 미국…… 아니, 세계 경제에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비난의 화살은 괴수를 토벌하는 협회에게 향하리라.

미국 정부와 재계의 지원을 받는 그들의 입장에선 곤란한 일이었다.

“한국 측에선 이 문제를 비밀로 하자고 요청했습니다만.”

“우리가 할 말을 대신해 주다니, 고맙기도 해라. 그렇게 하자고 전해주세요.”

“네.”

“그리고.”

무테 안경을 고쳐 쓴 에이미의 시선이 사진에서 제니퍼에게로 향했다.

“오스틴 젠킨스의 유해는, 어떻게 됐죠?”

그녀에게 맡겨 둔 두 번째 임무.

실종된 회수팀을 대신해 오스틴 젠킨스의 유해를 회수하는 일의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블랙 크라켄을 토벌하던 중 놈에게 먹혀 유실되었습니다.”

“유실……이라고요? S급 괴수로 변이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S급 수준의 전투력을 보여 주지는 못했습니다, 수중에서 전투가 벌어진 데다, 기본적인 신체 능력 역시 S급보다는 떨어졌습니다. 여기, 관련한 자료들입니다.”

의아해하는 에이미의 물음에, 제니퍼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하며 몇 장의 사진과 서류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 위에 올려진 것은, 흑창문어, 블랙 크라켄을 향해 달려드는 사자와 찢긴 사체의 일부가 담긴 사진들.

“……알겠어요, 블랙 크라켄의 짓이라면 어쩔 수 없죠. 이만 돌아가도 좋아요.”

“그럼.”

아쉬운 표정으로 사진을 내려다보는 중년 여성에게 고개를 까딱, 숙인 제니퍼는 컨트롤타워를 나선 다음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기이잉!

그녀가 탑승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 순간.

‘미스터 서, 이걸로 빚은 갚았어요.’

그녀가 직접 조작한 괴수의 사진들을 떠올린 제니퍼의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갔다.

“용을 데려왔더구나.”

신궁 에플리오네.

진혁과 만난 요정족의 대장로가 건넨 첫 마디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 탐욕스러운 자들을 이곳에 들이고 싶진 않았는데.”

“내가 데려온 게 아니다. 따라온 것이지.”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도움도 주지 않을 용 따위를 일부러 데려올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 그대라면 용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사람이니. 일족들에게 미리 경고를 해야겠구나.”

그 말에 에플리오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 진혁이 타고 온 줄기를 가리켰다.

“타고 오너라.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보여 줘야 할 게 있으니.”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줄기 안으로 들어갔다.

곧.

스으윽!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진혁이 올라탄 줄기의 바닥이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나무의 꼭대기에 올라 있던 그가 땅 밑으로 깊게 뻗은 뿌리 끝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불쾌하군.”

“요정을 위해 세계수가 빌려준 것이니, 인간에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 따라오거라.”

줄기에서 나온 진혁이 먹먹한 귀를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리자, 이미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던 에플리오네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뿌리 가운데에 난 나선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의 끝까지 내려온 진혁이 도착한 곳은 거실만 한 크기의 방.

“이건…….”

방의 중간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한 진혁은 미간을 좁혔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힘으로 떠 있는 거대한 수정.

하지만, 문제는 수정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존재였다.

“요정왕인가?”

“그렇다.”

에플리오네의 말에, 진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정을 바라봤다.

요정왕, 테실리스.

차원의 틈을 열고 에피로나의 생존자들을 지구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한 구원자.

하지만, 수정 안에 잠들어 있는 테실리스의 육체는 마치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거기에.

‘흑마력이라니.’

사령술사나 망자라 해도 믿을 만큼 진한 흑마력이, 요정왕의 몸에서 느껴졌다.

“……살아 있는 건가?”

“시간 정지 마법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는. 이걸 살아있다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혁의 말에 대답하며 수정에 봉인된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멸망 앞에 놓인 일족을 구원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지.”

자조하듯 낮게 읊조린 에플리오네는 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설명을 시작했다.

“괴수들이 나타나고 세계가 멸망을 앞뒀을 때, 아버지께선 세계를 탈출할 방법을 찾아헤매셨다.”

요정, 용, 인간, 심지어 난쟁이들과 지워진 고대의 역사 속에 파묻힌 기록까지.

차원과 관련된 술법이나 기록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았던 테실리스가 발견한 것은, 한 차원에 대한 기록.

“아버지께선, 에피로나를 비롯한 모든 차원의 영혼들이 죽은 뒤에 또 다른 차원으로 모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명계.

현계의 수많은 세계에서 죽은 영혼들이 정화작업을 거치는 곳.

테실리스가 주목한 것은, 명계가 수많은 세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명계를 경유한다면 이미 명계와 연결되어 있는 세계들 중 하나에 도착할 수 있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지.”

멸망을 앞둔 에피로나의 모든 자원이 게이트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투입되었다.

얼마 뒤.

요정왕은 다른 차원인 지구와 연결된 게이트를 여는 데 성공했고, 멸망을 앞둔 에피로나의 지성체들은 새로운 세계로 이주했다.

“잠깐.”

에플리오네의 설명에서, 진혁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명계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를 연결하려면, 마나가 아니라 흑마력이 필요했을 텐데?”

망자들의 세상인 명계를 이루는 것은 망자의 힘인 흑마력.

하지만, 산 자가 흑마력을 다루기 위해선 명계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것이, 사령술사가 탄생한 이유였으니, 망령군주 파슬란의 기억을 가진 진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아버지께선 대가를 치렀다고.”

“……명계의 허락 없이 사용했군. 산 자가 함부로 사용하면 그 반동이 만만치 않을 텐데.”

산 자의 생기를 약하게 만드는 흑마력을 대량으로 사용했다면, 천 년을 살 만큼 강한 생기를 지닌 요정들의 왕이라 할지라도 멀쩡할 리 없다.

시간 정지 마법 속에 봉인된 요정왕의 육체가 검게 말라비틀어진 것 역시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별 효과가 없었다.”

대장로의 눈빛에 절망이 깃들었다.

“아마, 게이트의 가동을 도왔던 나도 머지않아 아버지와 같은 신세가 될 테지.”

그녀의 말을 긍정하기라도 하는 듯, 에플리오네의 심장 어림에서 검은 기운이 꿈틀거리는 게 진혁의 눈에 들어왔다.

‘침식이 꽤 진행됐군.’

처음엔 사령술을 익혔을 거라 착각했지만,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생기의 중심인 심장이 죽음의 기운에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다.

긴 수명만큼 강한 생기를 가진 요정이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었거나 망자가 되어 지상을 배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해결책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그것이, 정말이냐?”

진혁의 말에, 에플리오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인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한 줄기의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계의 허락을 받지 않고 힘을 쓴 대가이니, 지금이라도 허락을 받는다면 해결될 테지.”

“……허락을, 받는다?”

거기까지는 생각한 적 없던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곧, 진혁의 입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명계와 계약을 맺고, 명계의 대리자가 되어라.”

내가 주선해 주지.

진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사흘 정도 머무르게 될 거다. 그동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요정족의 대장로, 에플리오네를 만나고 일행들에게 돌아온 진혁은 그 말과 함께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차라리 잘됐네요. 세계수에서 요정들과 사흘을 함께한 인간이라니, 평생 술 안줏감이잖아요?”

“전 술도 안 먹는다고요.”

“성녀님, 그래도 요정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얻는 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도 이름 없는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세계수에서 머문다라. 천하의 진미라는 세계수의 열매를 맛볼 기회로구나.”

“지, 진미……라고요? 정말요?”

일행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지만, 세계수에서 사흘을 머무는 데 반대한 사람은 없었다.

“분명히 일 때문에 온 건데, 휴가라도 나온 것 같네요.”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덕분인지, 불필요한 긴장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와…… 진짜……맛있어.”

번잡하고 분주한 인간의 도시와는 다른, 고요하고 차분한 요정들의 삶과 세계수 전체에 가득 퍼져 있는 자연의 은총은 그녀들의 생각보다 더 편안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찾아왔다고요?”

사흘째 되던 날.

자신을 찾아온 요정들의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본래라면 쫓아 보냈겠지만, 대장로님의 명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상황인지라. 어떤 자들인지 성녀께서 판단해 주시지요.”

이름 없는 신의 대행자를 대하는 요정들의 태도는 정중했다.

“세계수의 열매도 곧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았어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요정의 다음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쪽입니다.”

“어서 가죠.”

반쯤 신난 표정으로, 클레어는 세계수의 뿌리를 향해 내려갔다.

그러나.

문제의 인간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모렌츠?”

“성녀……님? 어떻게…… 여기……?”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부서진 갑옷을 입은 채 피투성이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성전기사단의 제2기사단장과 성기사들.

그들의 놀란 눈빛 앞에서, 클레어는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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