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진혁이 주가와 이가에 고렘 제작을 의뢰한 지 일 주일 여.
당연히,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뽑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나도 직접 관여한 건 아니라 전해만 들었지만, 아직 자료분석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들었어. 주가도 마찬가지일걸?”
“주가는 동력계통을 담당하니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가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는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 동력계통의 힘을 버텨 낼 수 있는 껍데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나 봐.”
의아해하는 진혁의 말에 설화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곰방대를 물었다.
밀폐된 카페 안에서도 거침없는 그녀의 행동에 진혁은 순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 이거 담배 아냐. 마정석에 약초를 섞은 거라고.”
“이가의 비전인가?”
“뭐, 그런 셈이지. 집중력과 순발력, 마나 제어력을 어느 정도 상승시켜 주는 효과도 있으니까.”
말을 마친 그녀의 입에서 연한 푸른색 연기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어쨌든, 우리 쪽은 그 정도. 마탑 쪽은 그쪽에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는데?”
“알겠다.”
설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벌써 가는 거야?”
다짜고짜 일어선 그를 향해 그녀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휘어졌다.
“더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은데. 있다 만찬 때 보도록 하지.”
하지만 진혁은 당연하다는 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카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제복을 입은 홍콩의 경찰이 한 남자와 실랑이를 하는 장면.
허나, 진혁의 눈을 끄는 곳은 따로 있었다.
‘마기?’
얼핏 봤다면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갔을만큼 옅은 기운.
경찰과 말다툼을 벌이는 남자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기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몸을 돌려 설화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뭐야, 간다더니? 할 말이라도 남았나 봐?”
진혁이 나가다 말고 자리로 돌아오자 앉아 있던 설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그러나.
“마기가 느껴진다. 전투를 준비하는 게 좋겠군.”
“뭐?”
진혁의 대답과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의 오른손이 천천히 허리춤의 세총통을 향해 내려갔다.
그때였다.
스으으!
남자의 몸에서 은은하게 새어 나오던 마기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뭐, 뭐야?”
순식간에 변한 남자의 기세에 당황한 경찰이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몸이 두꺼운 옷 아래서 제멋대로 꿈틀거리면서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입고 있던 가죽점퍼를 찢고 튀어나온 몸뚱이가 인간의 형태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
정급 괴수, 두 머리 늑대의 모습으로.
“괴, 괴수다!”
“도망쳐!”
도심 한복판에서 나타난 거대한 늑대.
평온한 일상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붉게 물든 두 쌍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희생자를 찾던 두 머리 늑대의 뒷다리가 앞으로 달려나가기 위해 굽혀졌다.
하지만.
굽혀진 놈의 뒷다리가 다시 펴지는 일은 없었다.
피융! 피융!
공기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진혁의 등 뒤에서 쏘아진 백색의 광선 두 줄기가 괴수의 두 머리를 차례대로 뚫고 지나갔다.
눈 한 번 깜짝할 새에 급소를 관통당한 두 머리 늑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절명했다.
“대체 어떻게 돼 먹은 도시야? 사람이 갑자기 괴수로 변하다니…….”
진혁의 옆으로 다가온 설화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세총통을 쥔 채 툴툴댔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수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건 모르겠지만…… 저게 끝은 아닌 것 같은데.”
도시의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마기의 악취에, 진혁은 중얼거렸다.
“뭐?”
그 말을 듣고 설화가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한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진혁과 설화의 시선이 폭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군.”
폭발의 위치를 확인한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층 규모의 남색으로 빛나는 고층빌딩.
수호룡의 레어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레어의 근처에 있던 진혁과 설화는 금새 불타오르는 레어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타오르는 빌딩의 입구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레어의 주인, 청명.
푸르게 타오르는 레어와 달리, 그녀의 광기 서린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이 빌딩의 벽면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으로 향했다.
“꺼져라.”
그녀의 분노한 목소리와 함께, 용심의 마나가 언령에 따라 배열되었다.
곧.
푸시시!
언제 그랬냐는 듯, 빌딩을 집어삼킬 기세로 타오르던 불꽃은 죽은 듯 꺼져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감히…….”
청명은 분노한 목소리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들어 올린 손으로부터, 다시금 푸른색의 마나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이내.
“파괴하라.”
그녀의 명령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마나 덩어리가 수십 개로 쪼개져 흩어졌다.
곧.
쿠구궁!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함께, 혼란에 빠졌던 도시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무슨 일이지?”
“마인의 짓이다. 인간을 괴수로 만드는 건 놈들의 장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분노한 청명에게 다가간 진혁이 묻자,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진한 살기가, 그녀의 분노를 전해 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대담하군. 수호룡의 영역에서 일을 벌이다니.”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중원에 자리 잡지 않았을 터이다. 내 레어에까지 손을 댈 거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만.”
“그럼, 만찬은 취소하는 것으로 알겠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이런 분위기에서 만찬을 여는 것도 웃기는 일.
상황을 대강 파악한 진혁은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누나,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의 걸음은 앞을 가로막은 남자아이에게 막혔다.
진혁의 허리춤에나 올 만한 키의 어린아이.
하지만.
‘사람이 아니군.’
아이의 눈을 내려다본 순간, 진혁은 상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천진난만한 눈 뒤로 깊게 가라앉아 있는 광기.
눈 앞의 아이는 분명, 용이었다.
“아니, 놈들이 어떻게 레어를 건드린거예요? 대체 이게…….”
아이 모습을 한 용은 진혁을 그대로 지나치고는 청명에게로 달려나갔다.
‘역시, 용은 용인가.’
완벽한 무시였지만,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던 진혁은 화를 내는 대신 청명을 바라봤다.
“뭐야, 저 꼬마는?”
진혁에게 슬쩍 다가온 설화가 슬며시 물었다.
진혁은 짧게 답했다.
“용이다.”
“뭐? 저 꼬마가?”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진혁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놈들이 미쳤다지만 용의 레어를 건드린다고요?”
“그래, 장로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 같긴 하다만.”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요! 이 마인 놈들이…….”
청명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것인지, 꼬마는 바닥을 구르며 성질을 냈다.
꼬마 용이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진혁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그때였다.
“……뭐야, 이 인간은?”
진혁을 바라보는 용의 눈빛은 경멸과 냉소로 가득했다.
청명을 대하던 태도와는 완전히 정 반대.
“엿들어 봤자 나올 거 없으니까, 빨리 꺼져.”
하지만 진혁은 욕설을 듣고도 코웃음칠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이게 평범한 용이었지.”
파슬란의 기억 속, 아스칸의 용들은 태생적으로 선민의식을 지닌 존재들.
자신을 대놓고 경멸하는 꼬마를 마주한 진혁이 느낀 첫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뭐야, 이 인간? 안 꺼져?”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진혁이 괘씸했는지, 꼬마 용은 인상을 구기며 성질을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
진혁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용의 몸이, 갑자기 얼음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굳어 버린 몸과 달리 꼬마의 동공은 빠른 속도로 주변을 살폈다.
마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이내.
“어, 어…….”
꼬마 용은 진혁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쳤다.
그의 표정에 담긴 것은 공포의 감정.
팟!
뒤로 몇 걸음 정도 물러난 꼬마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뭐야? 무슨 용이 저렇게 겁이 많아?”
“글쎄, 나도 모르겠군.”
설화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지의 권능이 발동한 모양이구나.”
의문에 답한 것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이었다.
“예지?”
“방금 전의 용, 아피루스는 미래의 일을 볼 수 있지. 아마도 널 보면서 무언갈 읽은 모양이구나.”
“썩 좋은 건 아닌 것 같다만.”
진혁의 답에, 청명은 입을 다물었다.
일국(一國)부터 구국(九國)까지.
전쟁에서 승리한 용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아홉 개의 나라 중, 구국을 영역으로 하는 것은 그들 중 가장 어린 용이었다.
유년기인 해츨링을 갓 벗어난, 성룡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할 만큼 어린 나이의 용 아피루스.
그가 구국에 존재하는 레어에 돌아왔을 때, 용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대체…… 그건…….”
진혁에게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진혁을 통해 보인 미래의 편린이 그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을 뿐.
아피루스는 조금 전 권능으로 확인한 미래의 모습을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두려웠지만, 예언의 권능을 가진 자의 의무를 무시할수는 없었다.
곧, 그의 눈 앞에 조금 전 읽어낸 예지의 장면이 나타났다.
“아아…….”
불타오르는 중원.
파괴된 대지의 이곳 저곳에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는 아홉 용의 시체.
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
“설마…그 인간이…….”
서진혁.
조금 전 자신과 눈을 마주친 남자가, 그 곳에서 죽은 자신과 다른 용들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 가져다 준 충격은 거대했다.
이윽고.
서서히 겁에 질린 마음을 추스린 아피루스는, 결심을 굳혔다.
“이건…… 장로님께 알려야 해.”
이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아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