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용의 언령은 창조주에게서 비롯된 권능이다.
한 줄기의 의지와 한마디의 말로 주변의 현상을 조작하는 힘.
비록 끊임없이 몰려드는 괴수에게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세계의 수호자라는 의무에 걸맞는 힘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사용 방법은, 상대에게 죽음을 강제하는 것이다.
대상 주변의 마나를 조작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을 안겨 주는 권능.
아피루스가 진혁에게 사용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죽어.”
어린 용의 한마디와 함께, 진혁의 육체를 둘러싼 마나가 반응한다.
심장이 멈춘다. 체온이 내려간다. 신경이 마비된다. 영혼과 육신의 연결이 끊어진다.
세계의 수호자인 용의 의지에 따라, 마나는 서진에게 차근차근 죽음을 안겨 주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 봐야, 결국 인간일 뿐이지.’
선 채로 죽어가는 진혁을 올려다보며, 아피루스는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순리를 거스르는 권능인 만큼, 그 반동은 사용자인 용조차도 여러 번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
‘하지만, 일족의 멸절을 막는 대가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무나 값싼 대가였다.
한 인간의 죽음과 함께, 용의 운명은 바뀌게 되리라.
서서히 생기를 잃어 가는 진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피루스는 눈을 빛냈다.
……두근!
그의 초월적인 청각이, 이미 죽은 자의 심장 뛰는 소리를 잡아내기 전까지는.
“……뭐야.”
아피루스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분명히, 멈췄는데.”
심장을 멈추고, 영혼을 육체에서 끊어 냈다.
용이라 하더라도 이 지경까지 와서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그러나.
두근! 두근!
그의 상식과는 달리, 진혁의 심장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마나가…… 밀려난다고?”
진혁의 육체를 공격하던 마나가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에 의해 밀려나는 모습에, 꼬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진혁은 눈을 떴다.
“어떻게…… 인간이…… 죽음의 언령을……!”
용이라도 피할 수 없고, 신조차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렇기에 그 반동 또한 강력한 것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눈앞의 인간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
스으으!
남자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온, 정체불명의 검은 기운과 함께.
“순리를 뒤틀어 죽음을 강제한다라. 세계의 수호자란 말이 빈말은 아니었어.”
죽음에서 돌아온 진혁의 첫 마디는 담담했다.
아마도, 그가 망령군주 파슬란의 기억을 이은 존재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터.
‘이젠 내가 망자인지, 산 자인지 모르겠군.’
이미 죽어 버린 망자를 되살리듯, 그의 영혼과 육체의 끊어진 연결을 흑마력으로 다시 이어 붙였다.
육체는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영혼과의 연결상태는 망자의 그것과 비슷한 상태.
진혁도, 파슬란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뭐라 말하기가 애매했다.
‘시간이 되면, 본격적으로 연구해 봐야겠군.’
일단은, 눈앞의 용을 먼저 처리해야겠지만.
“말, 말도, 말도 안 돼.”
진혁이 한 걸음을 내딛자, 아피루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죽음에서 돌아온 인간을 처음 목격한 그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물어볼 게 많겠어.’
스으으!
뒷걸음질 치는 어린 용을 향해 다가가던 진혁의 눈이 시퍼런 귀기를 뿜어냈다.
“자, 잠깐…….”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갖고 있었음에도, 아피루스는 공포에 질린 채 계속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그때였다.
팟!
하얀빛이 번쩍 터지면서, 진혁과 아피루스 사이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팔국의 수호룡, 청명.
“아피루스.”
굳은 표정으로 겁에 질린 아피루스와 진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어린 용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거대한 분노.
“누, 누나…….”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아피루스는 마음속으로 안도했지만.
그녀가 찾아온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화끈한 통증.
“누나……?”
얼얼한 뺨을 부여잡으며, 아피루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청명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청명의 눈은 차가웠다.
“혹시나 했더니, 이게 무슨 짓이냐? 수호자의 의무를 지킬 때에만 사용해야 할 죽음의 언령을 함부로 사용하다니.”
“하지만, 전 봤어요! 저 남자가 일족을……!”
“네 예지가 대단한 것은 맞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원인과 과정 없이 결과만을 보여 주는 네 예지의 의도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그, 그건…….”
“만약 그렇다고 해도, 네가 일족 전체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기라도 하단 말이냐? 네 해석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걸 가지고 인과를 네 맘대로 뒤틀다간, 예지의 권능 자체가 힘을 잃어버린다는 걸 또 잊어버린 게냐?”
서슬 퍼런 그녀의 말에, 아피루스의 얼굴이 푸르게 죽어 갔다.
옆으로 물러난 청명의 손가락이 진혁을 가리켰다.
“사죄해라.”
“네?”
순간, 아피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머뭇거리자, 청명은 다시 재촉했다.
“사죄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하지만, 어떻게 용이 인간에게 사죄를…….”
“아피루스.”
용이 인간에게 용서를 구하는, 전례가 없던 일.
하지만 청명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내뿜어지는 기운이 어린 용의 심장을 서서히 조여 갔다.
결국.
“……죄송합니다.”
아피루스는 진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멸감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만, 옆에서 청명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상황에서 사과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팟!
“도망간 건가.”
흰빛과 함께 사라진 아피루스.
진혁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청명에게로 향했다.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용의 사죄는 단순히 말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하러 간 걸 거다.”
“준비?”
“곧 알게 될 거다.”
그녀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일족을 대표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마. 이미 장로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니, 곧 그대를 천경으로 부를 터.”
천경.
청명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진혁은 원래 이야기하려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해 줄 말이 있다.”
“뭐지?”
“놈들이 천경을 노릴 거다.”
진혁의 말에, 청명은 잠시 동안 말을 잃었다.
“……요즘 인간들의 농담인가? 장로께서 계신 천경을 노린다니.”
“애석하게도 아니군. 마침 놈을 잡으러 가던 길인데, 함께 가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용을 향해, 진혁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구국에 위치한 아피루스의 레어.
“으으으…….”
순간이동으로 레어에 돌아오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아피루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죄…… 인간에게 사죄라니…….”
용은 사과하지 않는다.
용이 사과를 한다는 건, 세계의 균형을 무너트릴 만큼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아니, 그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인간 하나가 세계의 균형을 무너트릴 정도라고?”
죽음의 언령으로부터 무사히 살아 돌아올 정도였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숨이 푹푹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용의 사죄라는 건, 자기 자신마저도 구속하는 언령의 목줄을 스스로에게 채우는 것.
그것이 현 장로, 말리아가 세운 사죄의 조건이었다.
“……그래도, 뭐라도 들고 가야겠지.”
완전히 수긍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
진혁에게 돌아가 정식으로 사죄하기 전, 아피루스는 레어의 한 켠에 자리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 안에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는 것들 대부분은 에피로나와 지구의 보물들.
어지럽게 쌓여 있는 보물의 산들 사이를 거닐던 아피루스의 눈에 띈 것은, 검은색의 주먹만 한 구슬이었다.
“……그래, 저 정돈 돼야겠지.”
안타까운 눈으로 구슬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그의 손에는, 어느새 보물산의 꼭대기에 있던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조금은 봐주겠지?”
용심(龍心).
강력한 힘을 지닌 검은 구슬을 내려다보던 아피루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진혁과 청명이 브로커를 잡은 것은 출발한 지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 수호룡……!”
마나의 힘으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판웨이는 진혁의 옆에 선 청명의 얼굴을 알아보곤 낯빛이 파래졌다.
“여, 여긴 무슨 일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지하에 마련해 둔 은신처.
당분간 그곳에 머물며 계획을 짜려던 브로커의 계획은 단 오 분 만에 박살 나 버렸다.
설마 자신을 스물네 시간 감시하고 있는 망령이 바로 옆에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인.”
판웨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진혁이었다.
“마인은 어디에 있지?”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판웨이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이미 진혁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그 말에,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고는 청명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나보단 그쪽이 직접 캐내는 게 낫겠군.”
“정보 수집은 그대가 다 한 것 아니었나?”
“내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죽은 사람에게서 뿐이니까.”
“히익!”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운운하는 진혁의 말에 판웨이는 자지러졌다.
“그러면, 이 자는 레어로 데려가도록 하겠다. 덕분에 좋은 단서를 하나 잡았으니, 사례하도록 하지.”
파앗!
청명은 그 말에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하얀빛과 함께 사라졌다.
공중에서 몸을 떨고 있던 판웨이도 함께.
“흠…….”
홀로 남은 진혁은 가만히 서서 판웨이가 숨어 있던 은신처를 살폈다.
지하벙커를 개조해 만든 듯, 수십 미터 깊이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사무실.
선반마다 놓여 있는 수백 개의 핸드폰과 무기 따위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주의를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카르마라.’
그것도, 아주 진한 카르마의 검은 기운이.
“어디…….”
확인해 볼까.
벙커를 반으로 나눈 거대한 철문을 올려다보며,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