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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30화 (130/174)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0)

“흠.”

서강진은 오랜만에 마주한 장남의 몸을 구석구석 훑어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차기 가주가 되어야 할 놈의 상태가 멀쩡한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자신을 살피는 날카로운 눈빛에 진혁은 의아해했지만, 강진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투로 답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험하게 굴리는 것 치고는 멀쩡하구나.”

“세한은 항상 앞서야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네 녀석은 그 스케일이 너무 커. 이번 일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용이라니, 나 원.”

엄한 모습만 보이던 평소의 강진과는 달랐다.

“이제 서가의 후계자라는 자각을 하거라.”

진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그 한구석엔 걱정이 섞여 있었다.

“가문을 이끄는 사람이 직접 나서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새겨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네 목숨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아들에 대한 걱정이자, 후계자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세한과 서가에 대한 걱정.

“네게 세한을 물려주는 것은 훗날의 일이겠지만, 그렇다 해서 네가 후계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지.”

그 말에 진혁은 피식 웃었다.

“아마, 이번 세기 안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일 품 엽사의 수명은 보통 이백 년 정도 잖습니까.”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야. 누군가를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고. 조금은 신경을 쓰거라.”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됐다.”

진혁이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이자, 강진의 날카로운 눈빛이 조금 무뎌졌다.

‘확실히, 많이 달라지셨어.’

후계자의 자리를 확고히 했기 때문일까.

한없이 냉혹했던 이전과는 달리, 진혁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미약하게나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이 때문일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들에게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할 생각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의 진혁에겐 조금 곤란한 일이었지만.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진혁의 말에 강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독일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독일?”

허나, 그 표정은 진혁의 다음 말과 함께 바뀌었다.

독일.

두 번의 대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기술과 마법의 강국.

하지만, 현대의 독일을 진정으로 상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독일이라면…… 무명교를 찾아가려는 것이냐?”

“네.”

지구 최대의 종교, 무명교의 본단이 위치한 나라.

“성녀를 만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을, 이름없는 신도 함께.

강진을 바라보는 진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독일 쾰른.

과거 마인과의 대전쟁을 벌이며 완전히 파괴된 도시 위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것은 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무명교의 사제들이었다.

그로부터 70년.

쾰른은 무명교의 본단을 중심으로 거대한 신성도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본단의 중심에 자리한 무명교의 대신전.

지구에 세워진 모든 무명교의 신전 중에서도 가장 신성시되는 이곳엔 대주교와 주교를 비롯한 무명교의 고위성직자들이 한데 모여 교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름 없는 신의 계시를 받고 새롭게 교단의 성녀가 된 클레어도 그중 하나였다.

“……재미없어.”

그러나, 대신전에서 막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표정은 무료함으로 가득했다.

“맨날 똑같은 건물에 똑같은 식사, 똑같은 예배라니. 휴…….”

이름없는 신을 상징하는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쾰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도시보다는 거대한 병영이나 교도소라고 생각될 정도로 삭막한 모습.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던 과거의 성녀였다면 모를까, 이미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한 그녀에겐 끔찍하리만큼 답답한 곳이었다.

“내가 왜 이런 걸 원했던 거지? 잠깐 미쳤었나?”

성녀로서 예배를 주관하고, 대신전에서 이름 없는 신과 함께 생활하며 늙어 가는 삶.

과거의 그녀가 그토록 원해왔던 삶이었지만, 지금의 클레어에겐 아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답답함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예전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아…… 돌아가고 싶어.”

한국.

“힘들긴 했지만, 최소한 지겹진 않았는데…….”

아니, 지겹기는커녕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건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위험한 일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곳엔 본단에서의 정적인 삶과는 다른 활기가 있었다.

“가고 싶다…….”

허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시베리아에서 성전기사단과 함께 돌아온 그녀는 보고를 마친 다음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성녀님, 지금은 괴수와 마인들이 도처를 배회하는 위험한 시기입니다.’

‘세상이 좀 더 안전해질 때까지는 본단에 남아 계시는 게 좋겠군요.’

무명교를 이끄는 대주교와 다른 주교들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

말로는 성녀의 안전 때문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동안 많은 것을 보고 익혀 온 클레어는 주교들의 속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두려우신 거겠지.’

한마디 계시만으로 성녀가 되었을 때야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겠지만, 그녀가 본단 밖에서 벌인 여러 일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리라.

특히나, 서울에서의 강신과 일본에서 진혁과 함께 괴수를 막아낸 일은 이미 본단의 신자들에게까지 알려진 상황.

더 이상 바깥에서 영향력을 키우게 놔두기보다는, 본단에 묶어 놓는 쪽을 택한 것이리라.

“……그 사람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서진혁.

그라면 이런 상황에 처해졌더라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으리라.

“직접 올 거라더니, 대체 언제 오려는 거에요…….”

진혁의 얼굴을 떠올린 클레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블라인드를 내려 지긋지긋한 도시의 풍경을 가려 버렸다.

똑똑똑

누군가가 노크 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들어와요.”

“성녀님.”

클레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렌 슈미트.

“렌!”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죽어 있던 클레어의 눈망울에 생기가 돌았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본단에 오고서 통 못 봤잖아요.”

“죄송합니다, 성녀님. 훈련이 이제 끝난지라.”

반가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클레어를 향해, 렌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성전기사단의 견습 기사였던 예전과 달리, 그녀가 입은 갑주의 가슴팍에는 정기사를 상징하는 회색의 성표가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정기사네요. 축하해요.”

“이제 공식적으로 성녀님의 호위를 책임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주 뵐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좋아요.”

어딘가 모르게 차분하고 무거워진 렌의 모습에, 클레어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녀님, 그리고…….”

“네?”

렌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국……이요?”

한국.

그 말을 들은 클레어의 동공이 기대감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세부 일정이 정해진 건 아닙니다만, 서진혁 팀장이 곧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성녀님을 접견하겠다더군요.”

“정말……요?”

클레어는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치려던 걸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하지만.

‘드디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부들부들 떨리며 솟아오르는 그녀의 입꼬리는, 도무지 감출 방법이 없었다.

신성도시 쾰른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히 도시의 모든 것을 세운 무명교였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사정이 조금 달랐다.

쾰른에는 무명교를 이끄는 주교들보다 더욱 강한 위세를 가진 세력이 존재했으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주교들을 배출한 가문들이었다.

지구로 오기 전, 에피로나에서부터 명맥을 이어온 성직 가문들.

무명교가 배출한 수많은 주교와 대주교들을 가문의 구성원으로 두고 있었으니,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쾰른, 아니 지구 전역에 퍼져 있는 무명교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그중 하나.

“정말…… 오랜만이군요.”

유타하르덴 가문 출신의 사제, 하임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이 먼 곳까지 찾아오다니, 제가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없었던 일이에요.”

허나.

“마찬가지요. 오랜만에 대신전을 마주하니 마음속에서 저절로 경건함이 차오르더구려.”

미소지은 그와는 달리, 푸른색 갓과 두루마기를 걸친 남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한.

한국의 오 대 엽사 가문 중 하나, 이가의 장남인 그의 표정이 굳은 이유는 하나였다.

‘서진혁, 그 놈이 선수를 칠 줄이야.’

자신이 운영하는 이가의 정보조직 익문사를 통해, 서진혁이 쾰른에 방문할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아냈기때문.

심지어, 그 것이 성녀를 접견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까지도.

그가 천천히 공을 들여 준비하려 했던 계획을 버리고 급히 쾰른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 성녀와도 접점이 있으니 오지 못할 이유도 없을 터.’

사전에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을 뿐.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해 봐야 별 의미는 없었다.

그보다는, 눈 앞의 사제를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겉보기엔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소짓는 하임의 동공엔 초점이 없었다.

멀리 한국에서 왔다는 이상한 차림의 남자에게, 그가 꼭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과거 대전쟁의 동맹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먼 과거의 일일 뿐이다.

‘그래,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나라도 그랬겠지만.’

하임의 권태에 찌든 눈빛을 마주한 이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면식도 없는 타국의 사람이 만나자고 졸라댔다면, 그라도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그 생각이 바뀔 것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

“드릴 말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대주교 자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흠.”

여전히 권태에 찌들어있는 하임의 눈빛.

허나.

‘역시.’

사제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을 본 이한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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