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34화 (134/174)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4)

1945년 8월.

지구의 운명을 건 대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

연합군의 중심인 무명교의 대주교, 게르디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용케 정체를 감추고 여기까지 왔군.”

이균.

대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연합군에 가담한 한국의 S급 헌터들 중 하나.

자신의 궁궐에서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게르디아를 마주한 그의 얼굴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비록 허름한 로브로 정체를 가리고 있다곤 하지만, 상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고강한 신성력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 말에, 후드 아래로 보이는 게르디아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이름 없는 신께서 도우신 탓이지.”

게르디아는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자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겐가.”

이균은 무명교의 대주교가 로브를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긴 이유를 깨달았다.

“이건……마기에 침식되었군. 이름 없는 신의 사랑을 받는 자네가 어찌…….”

로브를 걷자 드러난 노인의 얼굴 오른쪽은 검은 핏줄로 뒤덮여 있었다.

마기에 의한 침식.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표.

상대가 성녀와 함께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주교였기에, 이균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게르디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에 조금 방심했네. 놈의 마기는 생각보다 지독하더군. 일주일 안엔 침식이 끝나겠지.”

“……성물은? 무명교가 가진 성물이라면, 자네의 몸에 파고든 마기쯤은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지 않나!”

언제나 침착하던 그답지 않게 격양된 이균의 목소리.

게르디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맡길 게 하나 있다네.”

그 말과 함께 대주교는 로브 속에서 은은한 신성력을 뿜어내는 회색 도장 하나를 꺼냈다.

무명교의 세 성물 중 하나, 천상의 열쇠였다.

“이건…… 천상의 열쇠 아닌가. 어째서 이걸……!”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가져와서 맡기려 한단 말인가.

대주교가 쥔 작은 도장이 무명교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이균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이제 이건 성물이 아니라, 악의 봉인일세. 절대로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물건이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게르디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봉인이라면…….”

“마왕.”

얼어붙은 듯 멈춰선 대전쟁의 동료를 향해, 게르디아는 죽어가는 몸으로 애써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무명교의 성지, 쾰른에 위치한 공항.

그곳의 게이트에서 이한과 마주한 설화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설화 네가 여기까진 어쩐 일이냐?”

그녀와 달리, 이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성물을 빼돌리신 겁니까.”

분노한 설화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씹듯이 뱉어졌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제야 본래 주인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무명교가 오랜 시간 찾기를 고대했던 성물 중 하나였으니, 이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게 세상의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주인에게 가서는 안 될 물건이었을 뿐.

“무명교의 사제들이 성물의 힘을 방해하는 봉인을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지금, 오라버니께선 마왕의 일부를 세상에 다시 풀어 두신 거란 말입니다.”

과거, 두 번째 대전쟁을 일으킨 주역이자 인류의 대적 중 하나.

놈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면, 지구는 또다시 거대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일을 저지른 오라버니를, 설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세상이 혼란에 빠질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가문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게다.”

누이동생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도, 이한의 부드러운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설화였다.

“오라버니, 대체 그게……!”

“서진혁.”

진혁의 이름을 입에 담은 이한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 녀석을 막아야만 우리 가문이 살 수 있다. 이대로라면 우리 가문…… 아니, 다른 모든 엽사가문은 서가의 지배를 받게 될 게 뻔해. 이미 혼약 따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야.”

“그것과 이번 일은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습니까!”

“무명교는, 정확히는 성녀가 이미 녀석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한 상태야.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단체가 서진혁의 편이란 말이다. 놈을 무릎 꿇릴 순 없어도, 최소한 놈의 편을 줄이긴 해야 할 것 아니냐.”

건조하게 흘러나오는 오라비의 목소리.

순간, 설화의 속에서 헛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가문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최소한의 선조차도 보이지 않는 이한의 행동 앞에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서 떠나거라. 곧 봉인이 풀릴 테니.”

고오오!

이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명교의 대신전이 위치한 방향으로부터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시작한 모양이로구나. 자, 따라오거라. 이제 이곳을 떠날 것이니.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한은 누이를 향해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리란 사실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으면서.

그러나.

“……먼저 가시죠, 오라버니.”

설화의 선택은 달랐다.

“설화야.”

“전, 오라버니가 해 놓은 개짓거리를 막을 테니까요.”

후우!

그녀는 곰방대에서 빨아낸 푸른 연기를 하늘에 피워 올렸다.

파지직!

그녀의 몸 곳곳에서 푸른색의 스파크가 튀어 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와 함께 아공간에서 나타나 그녀의 몸을 휘감는 강철의 갑주.

곧. 설화가 서 있던 자리에 한 기의 금속 거인, 두정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콰아아아!

등에서 푸른색의 불꽃을 뿜어내며 공항의 천장을 뚫고 날아가는 두정갑.

“…….”

멀어져 가는 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지하의 예배실에서 빠져나온 진혁과 클레어의 앞에 펼쳐진 것은, 생생한 지옥의 현장이었다.

“아…… 이름 없는 신이시여…….”

신을 찬미하던 도시는 지옥의 유황불로 검게 불타고 있었다.

무너진 신전 아래로 사제와 신도들의 피가 흘렀고, 적을 향해 달려드는 성기사들이 쥔 참마검에선 새하얀 오러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들을 대적하는 열 다섯의 검은 괴수들.

‘……!’

비록 자신의 형태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마디의 울음소리도 없이 사악한 의지만을 사방으로 내뿜는 놈들의 기세는 하나하나가 갑 급 괴수 못지않게 강력했다.

“쳐라!”

“이름 없는 신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무명교의 심장, 쾰른을 지키는 성기사들은 가려 뽑은 성전기사단의 기사들 중에서도 정예들뿐.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적들을 상대로, 성기사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 열다섯의 괴수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촤아아악!

“크아악!”

괴수들의 몸에서 시시때때로 쏘아져 나오는 촉수들.

녀석들의 변칙적인 공격에 기습당한 성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놈들의 촉수를 조심해라!”

“신성방어를 끌어 올려!”

순식간에 동료들을 잃은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피해를 조금 줄였을 뿐, 촉수가 쏟아져나올 때마다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괴수들의 촉수에 당한 성기사들의 시체가 도시의 곳곳에 쌓이고 있었다.

‘망자들을 데려왔다면 조금 더 편했을 텐데.’

전황이 불리하다는 걸 단번에 파악한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는 열다섯.

그것도 갑 급의 괴수와 엇비슷한 수준의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진혁이 멜리나나 성준, 자이츠를 비롯한 망자들을 데려왔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나았으리라.

‘후회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의 진혁이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의 옆엔, 아직 하나의 망령이 남아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평범한 망령이 아니라 악령이었지만.

‘아아…… 엄청난 마기가…… 눈앞에……!’

열다섯 괴수들로부터 뿜어져 나온 강력한 마기에, 악령은 두려운 듯 영체를 부르르 떨었다.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모습.

그럼에도 진혁은 조금도 악령을 의심하지 않았다.

‘육체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지난번, 홍콩에서처럼.

문제는, 이곳에서 악령의 육체로 쓸 만한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괴수들과 싸우다 쓰러져 나간 성기사들의 시체.

신성력이 깃들어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망자의 육체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지만.

‘무명교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르지.’

그의 옆에 선 성녀 클레어조차 이해하지 못할 일.

허나, 그는 포기하는 대신 클레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클레어.”

“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그 어떤 일도 방해하지 말도록.”

“어떤…… 일도요?”

“그래.”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차 고개를 움직인 진혁의 눈이, 도시 곳곳에 쓰러진 성기사들의 시체들로 향했다.

두근! 두근!

검게 물든 심장의 고동 소리에 맞춰 흑마력이 전신을 휘돌았다.

진혁의 주변으로 안개처럼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악령을 감싸 안은 것은 순식간의 일.

“망령이여.”

곧,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새로운 육체에 깃들라.”

스으으!

악령을 감싸 안은 흑마력의 안개에서 튀어나온 수백의 검은 실이 도시의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수많은 실들의 목표는 도시의 돌바닥에 차갑게 식은 성기사들의 시체.

죽은 육체를 파고든 흑마력의 실이 악령과 연결된 순간.

꾸득!

쾰른을 뒤덮은 수많은 시체들 중 하나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