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40)
요새가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성벽으로, 팔은 성문으로 이루어진 거인.
흑청색의 정체 모를 금속으로 전신을 코팅한 거인의 사지엔 수많은 마력포들이 마나를 충전하고 있다.
―철기(鐵機)라네. 최후의 싸움을 대비해 만든 물건이지.
거인의 머리로부터 기계음 섞인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나 기계라기보단 거대한 고층 빌딩을 마주하는 것 같은 위화감이 진혁을 감쌌다.
―그 최후의 싸움이, 설마 이런 식일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화성.
이가의 기술이 집약된 요새와 일체화된 이한의 목소리엔 조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대한 육체로부터 나오는 자신감 때문인지, 개미처럼 작아 보이는 진혁을 내려다보는 그의 마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하군.’
진혁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당장 거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마나의 양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상회했으니까.
대체 저 거대한 거인의 몸속에 몇 개의 마력엔진과 마정석이 들어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야.’
거인의 위압감에 짓눌리는 대신, 진혁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근! 두근!
검은 심장으로부터 퍼 올린 흑마력이 혈관을 타고 사지로 흐른다.
오른손에 모여든 기운이 진혁의 팔을 시커멓게 물들인 것은 순식간의 일.
스으으!
이내, 그가 끌어 올린 흑마력이 멜리나가 내려놓은 곤돌라로 향했다.
흑마력 안개가 버스 몇 대를 합쳐 놓은 크기의 곤돌라를 완전히 삼켜버린 그때.
콰앙!
무언가가, 곤돌라의 외벽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몸에 비해 한쪽 팔이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고렘.
복잡한 기계장치와 마법진으로 구성된 녀석의 몸에선 강한 흑마력과 아직 흑마력으로 변환되지 못한 마기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녀석이군. 우리 가문에서 도움을 줬다는 고렘이.
고렘의 작은 덩치와 반비례하는 강력한 힘에 이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혁은 반응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수십, 수백 배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둔 그의 표정엔, 조금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끝내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들어 올린 오른손을 앞으로 향할 뿐.
“키이이이이!”
딱딱! 딱딱딱!
진혁의 신호와 함께 망자의 군대가 전진했다.
목표는 눈 앞의 거대한 적.
이미 죽어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망자들의 걸음엔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마치 개미떼처럼 자신을 포위하려는 망자들을 내려다보며, 이한의 기분이 조금 들떴다.
―그래, 끝을 보자꾸나!
그 말과 함께.
파지지직!
거인의 몸에 부착된 수십기의 마력포가, 지상을 향해 청색 번개를 쏟아 냈다.
경복궁을 불태운 화마는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지원을 부탁한 마법사들이 하나둘 도착하면서 마법으로 이루어진 불꽃을 중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복구하려면 적어도 삼 년은 걸리겠어.”
불꽃에 가려져 있던 폐허가 드러나자, 설화는 한쪽 입술을 깨물었다.
수많은 마법진으로 보강된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거나 무너졌고, 궁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들의 행방 역시 알 수 없는 상황.
그 모든 것을 전부 잃었다면, 복구에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두정갑에서 내린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한 남자가 넋을 잃은 채 잿더미가 되어 버린 궁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아…… 어찌…… 이런 일을…….”
이정.
한국의 오 대 엽사 가문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이가의 가주.
하지만, 급히 궁을 빠져나오느라 산발이 된 머리와 초점을 잃어버린 눈은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고 있었다.
“아바마마, 일단 들어가시지요.”
“한아…….”
“아바마마를 덕수궁으로 모시도록 해. 충격이 많이 크실 거다.”
“네, 대장.”
설화의 명령을 받은 착호갑사대의 부대장과 대원 몇이 실성한 가주를 부축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잿더미가 되어 버린 터전을 바라보던 그녀는.
“후.”
짧게 한숨을 쉬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다행이야.”
본가를 송두리째 불태워 놓고는 다행이라니.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설화는 이한의 속내를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모든 걸 혼자서 안고 가겠단 생각이시겠지.’
결국, 쾰른을 파괴하고 무명교의 분노를 이끌어 낸 것은 그녀의 오라비다.
가문과 함께 사라질 바엔, 가문의 배신자가 되어서라도 모든 책임을 떠안겠다는 생각이리라.
그렇다 해서, 설마 가문의 궁궐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바보 같기는.’
수원이라고 했던가.
진혁의 말을 떠올린 설화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빌딩숲 사이로 난 대로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엔 어느 새 길쭉한 곰방대가 물려 있었다.
‘나머진…… 내가 수습할게요.’
후우!
설화는 푸른 연기와 함께 남은 생각을 털어 버렸다.
파아앗!
저 멀리.
관악산 너머에서 청색의 광휘가 터져 나왔다.
격렬한 싸움이었다.
걸음 하나에 지축이 흔들리고, 손짓 하나에 폭풍이 몰아칠 만큼 거대한 스케일의 전투.
수 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의 끝은, 그에 비해 초라했다.
―졌구나.
파직! 파지직!
이가의 요새, 화성이 있었던 자리에 쓰러진 금속 거인.
전신의 부서진 마력포에서 튀어오르는 스파크 사이로, 이한의 씁쓸한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번엔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헛된 생각이었는가…….
쓰러진 이한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포위한 진혁과 망자들을 바라봤다.
―후회되는군.
무미건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진혁.
그를 바라보며, 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을 것인데. 작은 실수가 이렇게 커져 버리다니.
서가의 장남이 식물인간에서 깨어났단 말을 들었을 때, 그때 손을 썼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더 싸울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움직일 수 있다면.”
―자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진혁의 말에 이한은 피식 웃었다.
서른 여섯 개의 마력엔진 중 파괴된 것이 서른다섯.
마력엔진에 동력을 공급할 마정석들 역시 기능을 잃었다.
더 이상, 그에게 싸울 수 있는 힘은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나 하나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뿐이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진혁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
자신이 아닌, 가문에까지 손을 뻗지 못하게 하는 것뿐.
그러기 위해, 가문의 배신자가 되는 것을 택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가와 무관한 자이니, 이가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이미 내가 벌을 주었으니, 그 것으로 용서해 주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네. 그럼…….
진혁의 대답은 무덤덤했지만, 대답을 들은 이한의 마음은 한결 후련해졌다.
―이만, 끝내주게.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은 이한의 목소리에, 진혁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흑마력을 끌어 올렸다.
스으으!
‘이거면, 됐어.’
자신을 향한 고렘의 팔뚝이 점점 새까맣게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이한은 속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가를 겨냥한 테러는 한동안 한국 전체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대한엽사회에 검열당해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폐허가 된 경복궁과 수원 화성의 모습을 대중들로부터 감출 수는 없었으니까.
[경복궁 테러, 이가의 몰락인가?]
[실종된 이가의 후계자! 그 행방은?]
[이가의 새로운 후계자 후보들!]
오 대 엽사 가문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이가가 큰 피해를 입었으니, 한국의 세력 판도가 어떻게 변할지 모든 엽사들과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
그중,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이가가 몰락하면서 세한그룹을 이끄는 서가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단 사실.
그리고, 서가의 후계자인 서진혁의 영향력도.
하지만, 정작 진혁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화도.
괴수를 몰아내고 새롭게 인간의 땅이 된 섬의 동쪽.
“팀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그곳의 드넓은 평원에서, 주연은 자신의 상관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진혁의 대답은 평소와 같이 차분했다.
그 말에 주연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밥도, 물도 안 드시고 있잖아요. 아무리 엽사의 육체가 마나로 유지된다지만 최소한의 영양공급은 필요하단 거, 잘 알고 계시면서.”
그녀의 말 대로였다.
식사는커녕 물조차 마시지 않은 지 벌써 닷새.
일반인은 물론이고, 마나를 다루는 엽사라 해도 견디기 어려운 시간 동안 진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주연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
“이대로면 정말 쓰러지세요. 일단 물을 좀 챙겨 왔으니까, 이것 좀…….”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미리 챙겨온 500미리 생수병을 꺼내 내밀었다.
단순한 생수가 아닌, 신성력을 머금어 치료의 효능을 가진 무명교의 성수.
이미 몇 번이고 거부당했지만, 그렇다 해서 가만히 상사가 굶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그녀가 내민 생수병을 받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진혁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언갈 먹으면서 할 만큼 녹록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시간 뒤에 먹도록 하지.”
그의 작업이 거의 끝나간다는 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모든 음식을 거절하던 진혁이 갑자기 식사 이야기를 꺼내자, 주연은 환한 얼굴로 뛰쳐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혁의 신경은 온통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검붉은 보석.
악령을 담고 있는 붉은 용의 용심을 향해.
‘이제…… 곧 끝난다.’
에피로나.
차원 문 너머의 세계로 향할 준비가.
용심을 향해 흑마력을 불어넣는 진혁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