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73)
진혁과 외눈박이의 관계는 질긴 악연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진혁은 놈에게 마나홀과 십 년의 삶을 빼앗겼고, 외눈박이는 그 대가로 한 팔과 수많은 괴수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어느 한쪽이 완전히 파멸해야만 정리될 수 있는 관계.
그렇기에.
‘결국, 내 손으로 처리하지는 못했군.’
이미 죽어 망자가 되어 버린 외눈박이를 바라보는 진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되살아나면서 이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듯, 흐리멍덩한 회색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외팔의 거인.
원한조차 잊어버린 원수를 죽인다 해서 그의 복수심이 충족될 리 없다.
‘결국, 놈들을 상대해야 하는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에블린을 제외한 파슬란의 심복들, 아크 리치와 데스나이트.
쓸모없어진 복수심을 망설임 없이 버린 그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현계와 명계의 질서를 원래대로 복구해야 하는 사령술사로서의 의무뿐이었다.
두두두두!
외눈박이의 뒤를 이어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을 바라보며.
“가라.”
진혁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알겠습니다.
―자, 날뛰어 보자고!
―어후, 쟨 또 왜 저래?
―망자를 상대로 한다라…… 괜찮은 데이터가 쌓일지 모르겠군.
―으으…….
―뭐야 이것들은…… 이런 것들이랑 싸워야 하다니.
성준과 자이츠, 멜리나와 민호, 무명과 에블린.
이제는 여섯으로 늘어난 진혁의 심복들과 함께, 그가 지금까지 부려온 수천의 망자들이 게이트와 그 앞의 괴수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서걱! 콰드드득!
가장 먼저 쓰러진 것은 외눈박이였다.
괴수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갑 급의 괴수라고는 하나, 이미 이지를 잃어버려 본능만 남은 상대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으니까.
쿵!
외팔 거인의 목이 달아난 것을 시작으로, 그 뒤의 수많은 괴수들이 망자들의 칼날에 도륙당했다.
진혁이 부리는 망자들의 상당수는 과거 엽사로서 활동했던 자들.
죽기 전부터 괴수들을 도륙하는 삶을 살아온 그들이었으니, 이미 죽어 죽지 않는 존재가 된 망자들의 공격은 생전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푸욱!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두 번째로 죽음을 맞이한 괴수들의 시체가 바닥에 쌓였다.
문제는, 그들이 베어 넘기는 괴수보다 게이트로부터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괴수의 숫자가 더욱 많다는 것이었지만.
서걱!
죽지도, 지치지도 않는 망자들이 적을 쉴 새 없이 베어 냈지만 쏟아지는 괴수들의 파도와 마주한 그들은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괴수들이 진혁의 망자들을 완전히 포위해 버리리라.
하지만.
‘슬슬 시작인가.’
진혁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
그의 뒤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으니까.
그와 함께 게이트를 향해 쏟아지는 오색의 빛줄기들.
마치 무지개를 바라보는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힘은 그렇지 않았다.
콰과과광!
지상에 닿은 빛줄기에 담긴 거력이 폭발하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하나하나가 2급 마법에 육박하는 강력한 포격.
강철마탑과 이가, 엘프와 난쟁이가 합작해 만들어 낸 특제 마력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포격에 휘말린 괴수들이 찢겨 나갔다.
콰아아!
그와 함께 하늘을 가르는 이가의 두정갑들.
투투투퉁!
푸른 화염과 함께 하늘 위로 날아오른 강철거인의 전신에서, 이가가 개발한 수많은 마공학병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목표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괴수를 뱉어 내고 있는 게이트와 그 앞에서 도륙당하고 있는 괴수들.
콰과광!
하나하나가 마정석을 품은 값비싼 포탄이었지만, 탄환들에 담긴 파괴력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순식간에 게이트 앞을 지키던 괴수들이 전멸하면서 생긴 거대한 공간.
빈틈을 발견한 순간, 진혁의 망자들이 그 틈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목표는, 괴수들의 벽을 돌파해 게이트 너머의 세상, 에피로나로 향하는 것.
콰과과광!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포격 사이로, 진혁을 포함한 망자들이 게이트를 향해 내달렸다.
그들의 돌진을 막기에, 살아남은 괴수의 숫자가 너무나 적었으니 가능한 일.
결국.
‘일단은, 넘어왔군.’
서걱!
게이트 너머의 세계, 에피로나에 발을 디딘 진혁.
‘이제 남은 건, 놈들을 찾는 일인가.’
주변의 괴수를 도륙하는 망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 * *
이설화.
한국의 다섯 엽사가문 중 하나인 이가의 장녀이자 실질적인 후계자.
“생각보단…… 별거 없네.”
에피로나를 마주한 그녀의 첫 감상은 소박했다.
“이런 데서 평생을 썩을 생각을 하다니, 나도 미쳤지.”
폐허와 그 위에 자라난 밀림만이 전부인, 파괴된 문명의 잔해만이 남은 세계.
두정갑 안에서 화면을 통해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계자가 되기 전, 과거엔 가문을 떠나 에피로나로 떠나고자 마음먹기도 했었지만 다 지난 일.
죽은 오라비 대신 후계자 자리에 오른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도망쳐서도 안 되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진혁과 함께 에피로나 공략에 뛰어든 것 역시, 그 때문이지 않았던가.
‘일단은, 주변을 좀 살펴볼까.’
콰아아아!
생각을 마친 설화가 양손의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자, 푸른 불꽃과 함께 두정갑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곧, 주변 수십 킬로미터의 정글이 그녀의 발밑에 들어왔을 때.
“……이런, 젠장.”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정글 사이로 질퍽한 늪처럼 꿈틀대는 거대한 무언가.
하지만, 그것‘들’은 늪 따위가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숫자의 괴수들이 일시에 움직이기에, 그 모습이 마치 하나인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 것.
“……이거, 이길 수 있는 거 맞나?”
설화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천, 만 따위로 셀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못해도 천만…… 아니, 억은 가까운 숫자의 괴수가 그들이 도착한 곳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직접 적을 마주하지 않고도, 적의 규모를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릴 만큼 압도적인 숫자.
[괴수 추정 수 – 최대 측정치 초과, 확인 불가.]
“……빌어먹을.”
화면 한구석에 떠오른 붉은 글자를 확인하며, 설화는 누군가와 통신을 연결했다.
“야, 내가 보는 게 맞다면…… 이 세계의 모든 괴수가 여기로 몰려드는 것 같은데?”
그간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두정갑에 장비된 통신 구슬을 타고 상대방을 향해 전해졌다.
곧, 상대로부터 답이 들려왔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뭐라고?”
―이미 이 세계의 모든 괴수는 망자화가 진행됐을 거다. 산자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달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지.
설화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진혁은 왜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담담한 투로 답했다.
그 말에, 설화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면, 저걸 우리가 다 상대해야 한단 소리잖아! 아무리 강한 엽사라도 억 단위로 몰려드는 괴수를 죄다 도륙할 수는 없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선발대의 숫자는 5천.
그들이 가진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억 단위의 괴수 앞에선 무력할 뿐이다.
지치지 않는 망자들과 달리 살아 있는 그들에겐 생존을 위한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진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 괴수들 중, 가장 강력한 흑마력을 내뿜는 존재를 찾을 수 있겠나?
“그건…… 어렵지 않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정갑에 장착된 탐지기를 가동시켰다.
진혁이 풀어 준 기술을 이용해 만든, 공략 전에 미리 두정갑에 장착해 둔 장비.
곧.
우우웅!
장비를 가동한 그녀의 눈앞에 흑마력의 분포가 붉고 푸른색으로 나타났다.
* * *
―가장 강력한 흑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어. 지금 바로 보내 줄게.
“알겠다.”
통신구슬 너머에서 들려온 설화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구슬 위로 주변 지역의 지도가 떠올랐다.
“출발한다.”
그 위로 설화가 말한 지점이 붉은 점으로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한 진혁은, 망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억 단위의 괴수를 돌파한다니, 육체가 없는데도 소름이 끼치는 기분인데.
―소름이고 나발이고, 조심이나 하라고!
콰아아아!
곧 멜리나와 성준, 자이츠를 비롯한 진혁의 심복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억 단위로 몰려드는 망자들의 파도를 뚫고, 그 우두머리를 찾아 제거하는 것.
진혁과 망자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곧 그들은 다른 망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쐐애애액!
원거리 공격 능력을 가진 수십 만의 괴수들이 쏘아 낸 탄환들이 빽뺵한 탄막을 이루었다.
―주인, 예상보다 적의 화력이 강력합니다. 이대로라면 오 분 안에 결계가 파괴될 겁니다.
멜리나의 뒤를 따르던 전갈사자, 민호가 걱정하듯 말했다.
진혁과 망자들의 주변은 수백 겹의 결계로 완전히 보호되고 있었지만, 수많은 괴수들이 만들어 낸 탄막은 가장 견고한 결계들마저 수 초를 버티기 어려울 정도.
“그 전에 도착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나 진혁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시퍼렇게 빛나는 그의 영안을 통해, 거대한 흑마력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이 보였으니까.
곧, 그의 말대로 진혁은 망자들의 수장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늘 하나 찌를 틈 없이 포위한 괴수들 사이를 가르고 나타난 두 망자.
아크 리치와 데스나이트.
―놈들이 공격을 멈췄습니다.
―뭐지? 무슨 꿍꿍이인 거야?
―일단 공격을 멈췄으면 좋은 거지, 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망자들의 잡담을 무시한 채, 진혁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두 망자를 바라봤다.
파슬란의 세 심복 중 둘.
그들의 시선이 진혁의 얼굴과 그 뒤에 선 에블린, 그리고 진혁이 이끌고 온 망자들로 향했다.
이내.
척!
“주군이시여…….”
“주군을 뵙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군.’
자신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 망자들을 바라보며, 진혁은 순간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