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준비된 회귀자 ==============================
*알림*
본 글은 픽션으로서,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명이나 사명, 지명 등은 사실과 다릅니다.
#1
○ 준비된 회귀자
무더운 여름의 한낮.
뜨거운 햇볕은 모든 것을 늘어지는 마법을 부렸다.
길가의 가로수, 사방에 나 있는 잡초는 물론, 얼마 전 새로 깔린 신작로의 아스팔트와 아직 공사 중인 곳을 알리는 칼라콘 등등 땅 위에 있는 것들 대부분 파김치처럼 축 늘어졌다.
무더위에 맥을 못 추는 건 길가에서 한참 떨어진 낡은 집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안쪽 산허리 즈음에 자리한 허름한 집이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녹색 이끼가 듬성듬성 껴 있어 지어진 지 오래되었음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는 집이었다.
벽 하나로 이어져 있긴 해도 방이 2개였고, 큰 방 앞에는 제법 널찍한 마루가 연결되어 있었다.
마루 위에는 작은 아이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이름은 유재원,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장난꾸러기였다.
안방에서 옮겨 놓은 낡은 금성사 선풍기가 뿜어주는 바람과 산에서 내려오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낮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 혼자 마루에 나와 자는 모습이 특이했지만, 집안 사정이 이럴 수밖에 없다.
맞벌이하는 가정의 외동아들이었고, 지금은 한창 여름 방학 중이었으니, 혼자 있을 수밖에.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꼬마는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손발이 꼼틀했다. 뜻 모를 잠꼬대도 나왔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감전을 당한 듯 몸뚱이 전체가 움찔하더니,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 잠결이 남아 있는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곧 정신을 완전히 차린 모양인지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러더니 아이답지 않은 이상 행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도 하고,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서 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기도 했다.
낮잠에서 깨자마자 자기 모습을 확인하는 모습이라니. 왕자병에 빠진 꼬맹이처럼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돌아왔구나.”
잠들기 전 유재원은 12살 꼬맹이였지만, 지금 눈을 뜬 유재원은 더는 꼬맹이가 아니었다.
무려 수십 년을 살다가 시간의 바퀴를 거슬러온 63살의 유재원이 꼬맹이의 몸 안에 있다.
거대한 시간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 이른바 회귀!
늙은 유재원은 돈 주고도 못 얻을 최고의 행운을 얻었고, 오늘이 그 행운이 현실로 이뤄진 날이었다.
본인의 몸 상태를 확인한 유재원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을 겪게 될 경우, 보통은 극도로 흥분하고 믿지 못해서 오두방정을 다 떨어 민망한 경우를 연출하기도 하는데, 유재원은 달랐다.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
훈훈한 바람에 섞여 불어오는 시골의 냄새.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낡은 집의 모습,
수십 살 먹었던 유재원에겐 흐릿한 기억이었다. 그 낡은 기억이 지금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세월의 무상함으로 부스러질 흑백의 사진이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새것처럼 깨끗해졌고, 심지어 천연의 색까지 자연스럽게 입혀지며 살아나는 듯했다.
단순히 추억만 되살아 나는 게 아니었다.
몸에 남아 있던 어린 유재원의 기억과 회귀한 유재원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융합되었다. 그러자 희미하다 못해 망각해버렸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을 켠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1988년 8월?”
농협 마크가 선명한 달력을 보며 오늘의 날짜를 헤아리는 유재원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흥분한 상태였다.
동시에 꼬마 유재원의 기억을 흡수하자 뭔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손과 발도 그나마 자연스러워졌다. 아마도 늙어버린 몸에 적응해버린 생체리듬이 젊다 못해 꼬맹이가 된 지금의 몸은 영 어색한 모양이다.
유재원은 어려진 몸에 적응할 겸, 추억 속에서만 있던 옛집을 직접 둘러보기로 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운동화를 신은 다음, 마당으로 내려왔다.
부모님이 가꾼 텃밭엔 고추와 가지 등 채소들이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다. 현대식 정원처럼 가꾼 것도 아니지만, 정성이 들어가 있는 터라, 훨씬 정겨웠다. 마당 한편에 돌로 만든 작은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들도 보였다.
자연스럽게 추억도 떠올랐다.
“6학년 때 야구 놀이를 한다고 장난치다가 장독대의 옹기 항아리 몇 개를 깨 먹고 온종일 혼났었지.”
야구공 대신 테니스공이라도 썼다면 장독대가 와장창 깨질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땐 고무공도 없었다.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야구공이었고, 작대기가 야구 방망이였다. 그래도 신경을 쓴다고 장독대와 반대쪽에 타자가 서고 돌멩이를 던졌는데, 헛스윙만 수십 번 하던 유재원이 처음으로 안타를 때렸다.
작대기에 맞은 돌멩이는 친구가 던졌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튕겨 나갔고, 장독대의 옹기 항아리를 때리며 작살을 내왔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유재원이 오늘의 회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소중한 걸 내주고 회귀를 약속받은 거래를 한 지가 무려 33년 전의 일이다.
옹기 항아리를 깨뜨린 것 같은 사소한 것부터 인생 전반에 미치는 커다란 흑역사를 바꾸기 위한 거래였다.
오려면 훨씬 일찍 올 수 있었다.
거래의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회귀의 권능 발동 요인이 바로 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언제 죽을지는 유재원 마음이었다.
그러면 왜 당장 오지 않고, 33년이나 미루었느냐?
가장 결정적 이유는 거래가 진짜였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구두계약이었을 뿐이다. 심지어 거래의 장소는 자신의 꿈속이었다.
혹시나 개꿈이었다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꼴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낱 개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그래서 유재원의 결정은 회귀를 최대한 미루면서, 회귀 후의 삶을 준비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얻는 이점은 무척이나 많았다.
회귀하는 사람이 갖는 가장 큰 무기는 미래에 대한 정보였다. 유재원은 버티고 버티면서 그런 중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모음과 동시에 회귀 후의 삶에 대해 준비했다.
끝이 없이 시뮬레이션하며 필요한 능력(?)을 상상했고,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진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건 확실한 준비뿐이었다.
자신이 어렸을때 나왔던 교과서를 중심으로 중고등학교 인터넷 강의를 보았고, 수능 시험도 여러 번 응시했다. 많은 악기를 다루기도 했고,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야말로 편집증적 증세가 보일 정도로 열심히 매달렸다.
그중에서 가장 열심이었던 것은 컴퓨터 관련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래밍 언어를 익혔고, 2D, 3D 그래픽 도구를 다루는 법도 익혔다. 아니, 익히는 정도가 아니라 마스터 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인생 방향이 달라지고부터, 사회 부적응자였던 유재원도 달라졌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의 가장 큰 변곡점이라면 서울대 합격이다. 공부 머리는 있었는지, 몇 년을 수능 공부에만 집중하니 수능 점수로만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만나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이 어째서 서울대에 목을 매는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만학도라고 해서 대한민국 최고 인맥 중 하나인 서울대의 학연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회귀를 준비하며 스스로 노력해 얻은 능력에 뒤늦게 터진 잠재력과 운빨이 더해져서 하늘 높이 날 수 있었다.
회귀 이후, 사업경험이나 쌓아보려고 시작했던 사업이 어느 순간 순풍을 탄 듯 상승하기도 했다. 학교나 사회에서 만난 형님 동생 하던 인연들 역시 시장님이 되고 의원님이 되면서 인생의 황금기가 찾아 왔다.
하늘 높이 날았다. 심지어 때마침 불어온 상승 기류를 타고 엄청난 성공을 목전에 두기도 했다.
‘했다’라고 끝나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유재원은 결국 실패했다. 학연이 작은 성공의 도움이 되긴 했지만, 대한민국의 기득권은 훨씬 크고 단단했으며, 중심에는 재벌이 있었다.
당시 유재원, 그리고 뜻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했던 사업은 성공만 한다면 산업의 판도를 완벽히 바꿔버릴 수 있었다. 셀룰러 폰이 범람하던 시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폰으로 평정된 것처럼, 게임의 규칙을 송두리째 바꾸는 게임 체인저 완성이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기존 산업을 가지고 있던 재벌들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었고, 이는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총과 칼만 없었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유재원의 패배였다. 형님 동생 했던 정치인들이 제일 먼저 도망쳤고, 믿었던 동료가 등에 칼을 꽂았다.
하늘 높이 날던 유재원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높이 날다 보니 떨어질 때도 무척이나 아팠다. 언론으로부터 대한민국 100년을 책임질 거대한 사업을 꾸리던 영웅에서, 서민들이 모은 투자금을 횡령한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다.
돈, 사람 등등 모든 걸 다 잃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화병으로 죽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다. 그러나 유재원은 그러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만, 원래 인생 계획은 회귀 준비였다.
회귀 준비 차원에서 보면 거대한 기득권과 전면전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물론 패배자가 되고서도 회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 작은 희망이 사회에서 매장된 유재원이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미래의 지식을 머릿속에 쌓았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수준이 아니라, 논문 수준을 읽고 이해하려 애쓰며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살다 보니 몇 년은 우습게 넘었다.
결국,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 없는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목숨을 연명하는 건 얼마든 할 수 있었다.
눈을 감기 전 나이는 불과 63세였고 몸에 달고 있는 병도 불치병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매장한 놈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사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최신의 기술도 볼 건 다 보았다. 기술의 발전은 쉬지 않으니 앞으로 더 엄청난 것들이 나올 테지만, 이젠 머리가 굳어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다만 가슴이 떨리는 불안감은 있었다. 만약 꿈속에서의 거래가 거짓이었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불안의 크기는 거대했고, 시간을 거슬러 오를 거라는 믿음은 겨우 한 가닥뿐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진짜로 돌아왔다.”
유재원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추락한 건 거의 10년 전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분노는 여전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놈들에게 불지옥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가장 낮은 곳으로 처박아 주고 싶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져 시간을 거슬러 왔지만, 여전히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기반은 여전히 탄탄하지만, 유재원은 맨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 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더구나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며 머릿속에 담아둔 강력한 미래의 지식은 유재원의 강력한 무기였다.
회귀로 주어진 이 강력한 무기로 압도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