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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3화 (3/1,007)

[3] 준비된 회귀자 ==============================

#2

“기분은 이상하네.”

막상 상상만 했던 그 순간이 찾아왔는데도, 흥분은 물거품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수없이 해봤던 상상 속에선 하늘을 날 듯 환호하고 방방 뛸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부터 실전 시작이라 그런가?”

유재원은 나름대로 이유를 찾았다.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는 건 이제 끝이다.

앞으로는 머릿속에서 수없이 했던 상상을 현실로 실행해야 한다.

연습은 없다. 더욱이 이제부터 시작될 현실은 중대한 결정 후 되돌리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실수가 치명적일 수도 있고, 되돌리기 불가능한 것들도 많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건가?”

머릿속엔 거대한 계획을 품고 있지만, 12살인 지금 당장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12살 꼬맹이가 하는 일에는 법적인 효력도 없고, 주변의 영향력도 0이었다. 미래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드려도 제대로 따라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기대를 할 수 있는 건, 아직 유재원은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외동아들이라는 점이었다.

“일단 내 할 일부터 하자.”

마루에서 일어난 유재원은 바로 안방으로 갔다.

“와, 이놈 오랜만이다.”

안방에는 집안의 보물이 있다.

인텔 80286 컴퓨터, 그중에서도 고급 기종인 AT 컴퓨터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88년의 컴퓨터라면 보통 8비트 컴퓨터가 보통이었다.

MSX 호환 SPC-1000 같은 것이 주류이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학교 컴퓨터실에나 가야 볼 수 있었고, 이제야 8086 XT컴퓨터가 학교나 정부에 보급되는 것이다. 그것도 비싼 장비라서 학교 측에선 아이들이 다루다가 고장을 낼까 쉽게 개방해주지도 않았다.

어쩌다 있는 실습도 고학년 위주였다.

그런데 그것들보다 한 단계 위인 286이 시골집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건 모두 유재원의 어머니, 김말숙 여사님 덕이었다.

정확히는 김말숙 여사님의 교육열이었다.

유재원이 5학년에 오를 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평균 85점 이상을 맞으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약속을 했다.

4학년 때까지 평균 70점을 맴돌았던 유재원은 놀랍게도 평균 86점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겁도 없이 한창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던 컴퓨터를 사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처음엔 무척이나 곤란해 했지만, 며칠간 고민 끝에 그 약속을 지켜주셨다.

그 결과가 안방, 제일 좋은 자리에 놓여 있는 대호컴퓨터가 제조한 AT 컴퓨터였다. 그것도 최고급형이었다.

웬만해선 보기 힘든 20메가바이트 용량의 하드디스크는 물론이고, 16색 동시 출력이 되는 EGA 그래픽카드와 컬러 모니터, FM사운드가 나오는 애드립 카드가 장착되어 있다. 한글 카드도 빼놓을 수 없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쓰려면 하드웨어적인 카드가 필요한 게 옛날의 컴퓨터다.

이렇게 좋은 컴퓨터는 도(道) 전체를 봐도 몇 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은 컴퓨터가 공부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하신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지.”

그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맞긴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5학년 들어서 평균 성적이 16점이나 오른 건, 운이 좋아서였다. 얼마 하지 않은 시험공부 분량에서 문제들이 딱 나왔고, 여기에 덤으로 짝꿍이 똘똘한 녀석으로 바뀐 덕이었다.

애초에 공부에 재미를 들려 점수가 오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값비싼 컴퓨터가 비싼 게임기로 탈바꿈되는 건 순식간이다. 유재원의 게임 라이프를 막을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은 컴퓨터 할부금을 갚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셨으니, 퇴근 시간도 느려졌던 탓이다.

“테트리스, 울티마, 너구리. 아, 내년에 나올 페르시아 왕자도 빼놓을 수 없지.”

유재원의 입에서 추억의 게임들이 줄줄 나왔다.

컴퓨터를 설치하러 와준 기사 형이 서비스라고 온갖 게임을 다 깔아주고 갔었다.

“하아, 진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졌었는데. ”

추억에 빠진 유재원은 컴퓨터 커버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실내에 쓰는 컴퓨터에 무슨 커버냐고 할 수 있겠지만, 원체 비싼 몸이다 보니 기본제공 품목에 커버가 있었다. 심지어 본체에는 열쇠도 달려 있는데, 잠금을 해놓으면 전원을 아무리 눌러도 켜지지 않는다.

부모님은 컴퓨터 게임과 유재원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열쇠로 잠가 놓기도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잠금장치가 그렇게 정교한 게 아닌지라, 본체를 열고 전원을 켜면 우회할 수 있었던 탓이다.

아무튼, 지금은 게임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게임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시대의 게임들은 유재원의 성에 차지 않았다.

초당 수천만 개의 폴리곤을 뿌려대며 현란한 그래픽을 뿜어내는 최신 3D 게임을 넘어 증강현실, 혹은 가상현실 게임까지 접해본 유재원이다. AT 컴퓨터의 조잡한 그래픽과 단순한 게임성은 아무런 재미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으으. 짧다.”

책상도 높고, 납작한 본체 위에 모니터를 올리는 형태라서 키가 작은 유재원은 깨금발을 딛고 벗길 수 있었다.

“이번 생엔 180cm를 넘고 만다.”

커버를 벗기며 기어코 키에 맺힌 한을 읊고야 마는 유재원이다.

전생에서는 성장기 시절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음식은 입도 대지 않았던 유재원이다. 남들은 좋아하는 멸치나 우유가 묘하게 비렸던 탓이었다. 더구나 밥도 잘 챙겨 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키는 겨우 170cm를 넘겼을 정도였는데, 이번 생에선 좋다는 건 다 챙겨 먹고,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다 해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커버를 벗긴 유재원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다.

드륵드륵 거리는 투박한 작동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포스팅 화면이 나타났나 싶더니, 순식간에 부팅이 끝났다.

이 당시 컴퓨터는 수많은 장치 드라이버를 읽을 필요도 없었고, 윈도우와 같은 그래픽 리소스를 읽어 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MS-DOS의 시스템 파일 3개를 읽으면 끝이다.

부팅이 정상적으로 끝나면, 투박한 커서가 사용자의 명령어를 기다리며 깜박인다. 여기에서 프로그램이 설치된 디렉터리를 찾아가서 실행파일을 일일이 입력해줘야 한다.

컴퓨터 책상 옆에는 그런 명령어를 잔뜩 써놓은 노트가 있다. 컴맹이나 다름이 없는 유재원을 위해서 설치기사가 적어주고 간 것이다.

어린 유재원은 그걸 보고 독수리 타법으로 콕콕 누르면서 컴퓨터와 친해져 갔다. 물론 친해진 컴퓨터로 게임만 줄곧 즐겼지만 말이다.

이젠 다 필요 없다.

“후후. 관리 잘 된 골동품을 만지는 기분이네.”

유재원은 능숙하게 키보드 자판을 눌렀다.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차각차각 소리와 적당한 탄성이 차졌다. 손이 작아져서 감각이 전생의 것과 좀 다르긴 했어도, 분당 200타 정도 나오는 건 문제 없다.

커맨드라인으로 컴퓨터를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

회귀를 위해 준비한 건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었다. 에뮬레이터를 깔아 당시의 컴퓨터 환경을 맞춰놓고 이에 대해 적응 훈련(?)까지 했던 유재원이었다.

“보석글.”

그렇게 해서 실행한 건 삼보컴퓨터가 출시한 워드프로세서 보석글이다. 대호전자에서도 워드프로세서를 내긴 했는데, 대세는 보석글이라서 설치기사 형이 개인적으로 깔아준 것이다.

온전한 국산 워드프로세서는 아니다. 메이커 리서치(T/Maker Research)라는 회사의 워드 프로그램 기능의 일부분을 수정해 한글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용법이 한국적인 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대로 된 국산 워드프로세서인 아래 한글은 내년에나 나올 것이기에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한다.

워드프로세서가 준비되자 유재원은 크게 심호흡한 후, 글자를 써넣기 시작했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고전 중 고전인 대학의 8조목에 나오는 구절로, 너무나 흔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재원이 전생에 33년간 갈고닦은 계획을 가장 명확하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문장 중에 이보다 어울리는 것은 없다.

유재원은 자신의 회귀를 단지 개인이나 가족의 성공만을 위해 한정하지 않았다.

“나 혼자 성공할 거라면 30년은 더 일찍 왔지.”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로또 번호 몇 개만 외워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지금부터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 90년대 초부터는 가문을 일으키며, 나아가 IMF와 여러 외환을 다스리며 국가에 보탬이 될 생각이다.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회귀 전의 암울한 미래보다는 번영과 영광의 시대로 이끌어 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33년이라는 준비 기간은 당시엔 참 길었는데, 막상 지금 생각하니 좀 더 버텨볼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할 수 있어.”

유재원은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문서를 작성해나갔다. 복잡한 디렉터리에 꼼꼼하게 숨겨놓고, 암호도 걸어놓을 것이지만, 문서 안에는 미래에 대한 단서는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대신 유재원만 알아볼 수 있는 특이한 단어들로 도치되어서 작성되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건, 버섯이니 도로, 타자기 같은 너무도 단순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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