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ID 테크놀러지 ==============================
#18
득득득!
5.25인치 드라이브에 녹색 불이 깜박이며 열심히 일한다는 소리를 내뱉었다. 다섯 번쯤 그랬을까.
화면에 변화가 생겼다.
도스가 부팅되면서 화면에 표시한 글자라던가, 유재원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쳤던 글자들이 싹 사라지더니 검게 변했다.
이른바 로고 스크린이다.
검었던 스크린에 점점 수평의 파란색 그라데이션이 생겼다.
곧이어 파란 그라데이션 바탕 위에 ID 테크놀로지라는 영어, 한글 혼합의 글자가 하얀색으로 떠올랐다.
640*350이라는 고해상도에서 16색을 동시 지원하는 EGA의 성능이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코딩했다. 단순히 그림 파일을 불러오도록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성능 컴퓨터에서도 그라데이션이 사르륵 올라오는 모습이나, 하얀 굴림체 글자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하려면 프로그래밍 함수로 그려내는 게 더 좋았다.
글자의 모양은 21세기에 많이 사용했던 굴림체다.
굴림체는 21세기 초엔 너무 많이 나와서 식상하게 보이는 글꼴이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최신식 감성이다.
“아이디 테크놀로지?”
정현웅 선생이 이름을 읽으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름 없는 회사는 없잖아요. 최신식으로 지어 봤는데 어울리나요?”
ID 테크놀로지가 바로 이번에 유재원이 만들 사업체의 이름이다.
ID는 자신을 여기에 있게 만들어준 인피니티 드림에서 따온 머리글자였고, 테크놀로지는 회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단어다.
무한의 꿈을 현실로 이루는 기술을 만드는 회사라는 의미였다.
“무한한 꿈이라. 좋구나.”
다만 선생님들은 테크놀로지라는 영어를 그대로 붙이는 것에 어색함을 느꼈다. 지금이야 테크놀로지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하지만 딱 10년만 지나면 묻지마 투자가 들어올 만큼 IT 기업의 상징처럼 쓰이는 단어다.
실제로 주식 시장에 상장된 회사 이름 중에 닷컴 혹은 테크, 시스템, 네트워크 따위가 붙어 있으면 무조건 주가가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게 거품이었다.
하나가 터지자 우르르 붕괴하며 주식 시장을 붕괴시켰고, 나중에 닷컴 버블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유재원은 그런 거품 가득 낀 회사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진보시킬 진짜 신기술로 무장된 차원이 다른 회사를 만들 자신이 있다.
“음?”
ID 테크놀로지라는 글자 사라지고 그 자리를 타자 연습기 키보드 워리어 1.0이라는 글자가 대신했다.
타자 연습기는 한글로 왼쪽 위에 나타났고, 키보드 워리어 1.0이란 글자는 중앙과 오른쪽 아랫부분을 큼지막하게 채웠다.
“키보드 워리어?”
“네! 타자 연습기 이름이에요. 컴퓨터가 어렵다 못해 무서운 왕초보들을 키보드 하나면 무서울 것 없는 전사로 만들어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야, 이름 한 번 쌈박하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센스가 돋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재원이는 영어도 잘 아는구나?”
선생님들은 한마디씩 하더니 교장 선생님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덕진 국민학교 교장이라 아이들의 실상을 잘 아는 교장 선생님이다. 덕진리뿐만이 아니라, 근처의 여주시에서도 영어 공부를 하는 아이는 한 손에 꼽아도 넉넉할 거라고 자신한다. 아주 극성스러운 집에서나 선행학습을 할 거다.
“네, 컴퓨터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다 영어로만 나오니까 답답해서 사전을 찾아보고 그랬어요.”
정신적 나이로 대략 60년 전쯤에 그랬다.
순간 영어 단어만 아는 게 아니라, 미국인과 일상적 대화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걸 알면 선생님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지는 유재원이다. 그래도 지금은 투자를 받기 위해 타자 연습기의 시범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집중하자.’
친근한 선생님들이 아니라 돈이 안 되면 확 돌아서는 투자자라고 생각하며 집중했다.
완성된 타자 연습기 1.0의 기능은 풍성했다.
단문 연습에 들어갈 속담과 격언 등은 수천 개에 달했고, 장문 연습용 예제도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고전을 20여 개 수록했다.
게임 기능도 한층 강화했다.
갤러가를 오마주했던 외계인 침공뿐만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단어들이 떨어져 내리고 땅에 닿기 전에 삭제해야 하는 산성비라던가, 시간제한을 두고 최대한 많은 단어를 쳐내는 타임 어택도 넣었다.
여기에 키보드 워리어 1.0에만 추가된 기능도 2가지나 있다. 비밀 일기장과 책 1권 분량의 초 장문 연습이었다.
비밀 일기장은 비밀 번호를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짧은 글을 자유롭게 써서 저장할 수 있게 했다.
초 장문 연습은 말 그대로 엄청나게 긴 글을 치는 것이다. 무려 책 반 권 분량, 글자 수로는 7만 자에 달하는 하나의 단편 SF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은 타자 연습기에 탑재된 게임, 외계인 침공에 대한 배경으로 유재원의 창작이었다.
21세기 장르소설을 섭렵한 유재원이었다. 그중에 인상에 남았던 글을 골랐다.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 선단이 인류에게 문자 그리고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줘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이걸 다 따라치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대신 화살표로 스크롤 해서 본문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했으니, 관심이 있으면 끝까지 볼 사람들은 있을 거다.
이스터 에그의 일종이자 동시에 낚시였다.
영화사나 출판사 등등 미디어 그룹들이 낚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
마지막으로 사용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타자 능력이 향상되었는지 통계 분석을 해주는 기능도 탑재했다.
일별, 프로그램 실행 횟수별, 등등의 기준으로 타수와 정확도를 그래프로 나타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이거 제가 보던 거랑은 많이 다른데요?”
정현웅 선생님이 화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시 대회에서 봤던 것이나, 경시 대회 나가기 전에 봤던 것이랑 화면이 많이 달랐던 것이다.
유재원이 마음만 먹으면 훨씬 일찍 완성할 수도 있었음에도, 근 두 달에 걸친 시간을 들인 건 화면의 디자인에 공을 들였던 탓이다.
화면에는 그라데이션과 타자 연습기 글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화면 하단에는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있다.
“여기 시작이란 버튼에 커서를 놓고 엔터를 누르면 돼요.”
그러자 시작 버튼 위에 작은 사각형이 떠올랐고, 그 안에 타자 연습기의 각 기능이 나타났다. 마우스가 있다면 훨씬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지만, 키보드 화살표 키로도 쉽게 제어할 수 있다.
단문 연습에 커서를 놓고 엔터를 치자, 그라데이션 되어 있던 화면 위에 큰 창이 떴고, 그 안에 익숙한 단문 연습 기능이 구현되었다.
시작 버튼, 그리고 작업 표시줄 그리고 큼직하게 떠오르는 창 화면.
윈도우나 맥 OS 사용자에게 익숙한 GUI를 텍스트 모두에서 구현한 유재원이다. 95년쯤에나 나올 혁신을 7년이나 일찍 가져왔다.
비록 그래픽 화면은 아니지만, ASCII 문자를 절묘하게 사용해 만들어진 인터페이스였다. 실제로 작업 표시줄은 제대로 작동된다. 사용자가 단문이니 비밀 일기장 등의 작업을 실행하면 작업 표시줄에 큼직하게 표시도 되고, 상단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X]를 누르면 창이 닫힌다. 물론 ‘esc’키도 같은 기능이다.
작업 표시줄 오른쪽에는 디지털 시계와 날짜도 들어가 있었다.
유재원은 이것을 통칭해서 리본 인터페이스라 명명했고, 앞으로 ID 테크놀로지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에 모조리 탑재시킬 작정이었다.
당연히 전략적인 선택이다.
바로 경로 의존성의 고착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단 한 번 대중화된 기술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게 힘들다는 거다. 설사 그 기술이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어도 말이다.
쿼티 자판, 2벌식 자판, 빌어먹을 액티브X 등등. 그렇게 대중화된 기술은 수도 없다.
리본 인터페이스도 마찬가지다.
키보드 워리어 1.0를 시작으로 컴퓨터 사용자들을 리본 인터페이스에 완전 적응시켜 놓는 거다. 나중에 나올 2.0이나 다른 응용 프로그램에서는 그래픽 모드로 구현된 유려한 리본 인터페이스를 보여줄 거다.
액티브X처럼 불편하고 불안정한 기술도 몇 년, 몇십 년을 쓰는데, 완성도에서 차원이 다른 리본 인터페이스는 어떨까.
조만간 컴퓨터 운영체제가 도스에서 탈피해 GUI가 탑재된 차세대 운영체제를 놓고 거대한 전쟁이 일어난다.
리본 인터페이스는 전쟁을 끝내버릴 핵폭탄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리본 인터페이스가 적용된 그래픽 운영체제라면 핵심커널이 리눅스가 되었든, OS/2가 되었든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아무나 사용할 수 없도록, 최소 디자인 실용신안을 등록하고 할 수만 있다면 특허로도 박아버릴 작정이다.
“대단하구나.”
선생님에게 리본 인터페이스에 숨겨진 전략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만져보시면서 그 완성도에 감탄하셨다. 컴퓨터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정현웅 선생은 이면에 담긴 혁신성을 조금 읽었던 모양인지 혀를 내둘렀다.
“사소한 차이에요. 하지만 기본 기능만 충실하다고 대기업 제품과 경쟁하면 안 되잖아요. 이름값이 다르니까요.”
당연히 이건 겸양의 말이었다.
여기가 미국이었다면 한껏 콧대를 세우며 다니겠지만, 여긴 겸손이 미덕인 나라였다. 그래도 팩트는 이거다.
대기업 컴퓨터 회사들이 최고의 프로그래머를 거느리고 타자 연습기를 만들어도 키보드 워리어 1.0을 능가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자부한다.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으로 유재원은 시작 버튼 구석에 숨겨진 만든 사람들이란 메뉴를 눌렀다.
그러자 새로운 창이 떠올랐고, 영화의 스텝 롤이 올라오는 것처럼 글자들이 부드럽게 올라왔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ID 테크놀로지의 로고. 그 아래로 프로그래밍, 유저 인터페이스, 사운드 등등의 항목에 유재원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했으니 유재원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곧이어 도와주신 분들이라는 항목으로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덕진 국민학교부터 시작해서 교장 선생님, 교감을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의 이름이 줄줄 나왔다.
뛰어난 프로그램에 본인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은 살짝 감동하신 모양이다.
이때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때다.
“ID 테크놀로지는 일단 일인 벤처기업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알아보니까 제가 비록 국민학생이지만, 신원 보증을 해주시는 어른들 몇 분을 모시고 자본금만 충분하다면 창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원 보증은 걱정하지 마라.”
교장 선생님이 든든하게 나셔 주셨다.
보아하니 정현웅 선생님도 살짝 넘어오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여기에 부모님과 큰아버지를 모시면 법적 문제는 해결!
“일단 첫 사업은 타자 연습기 키보드 워리어 1.0의 판매입니다. 우선적으로 삼보 컴퓨터와 협상을 해볼 계획이고, 체신부의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의 번들 프로그램에 포함되도록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사업의 방향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너무도 정확해서 딱히 조언해줄 게 없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ID 테크놀로지에 투자하는 방식은 총 3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채권 투자입니다. 말 그대로 고정된 이자로 돈을 빌려주시는 거예요. 두 번째는 원금 손실이 있지만, 더욱 많은 수익을 약속하는 투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분 투자가 있습니다. 정산 순위도 제일 나중이고, 보장된 수익도 없습니다. 대신 배당금을 지분의 비율대로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역시 유재원은 기대에 완전히 부응해준 것이다. 그런데 함께하는 사람 중엔 진심으로 감탄한 사람도 있었다.
컴퓨터 부 정현웅 선생이다.
도대체 여름 방학 때 유재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이전까진 평범한 5학년 개구쟁이였는데,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확 달라졌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그렇고, 대학생보다 나았다.
믿음이 생긴 정현웅 선생은 가진 여윳돈을 계산해 보았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고, 방탕한 유흥생활도 하지 않은 터라 제법 많은 돈이 있다.
“지분 투자 한도 금액이 있니?”
“없어요!”
정현웅 선생의 결정은 지분투자였다.
“채권 수익률은 얼마로 잡았느냐?”
“6개월에 9%입니다!”
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해봤던 담임 선생은 원금 손실이 없는 채권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고 하고, 누구는 평생을 후회하며 두고두고 회자할 순간이기도 했다.
ID 테크놀로지의 투자금 모금은 딱 일주일이었다.
학교 선생님들과 큰집, 작은집 친척들 그리고 어머니 김말숙이 친정에서 받아온 돈과 아버지가 회사에서 올림픽 내기로 벌어온 돈. 마지막으로 호기심이 생긴 동네 사람 몇 명이 귀한 돈을 내주셨다.
이렇게 해서 자본금 3,255만 원, 부채 1,513만 원. 총자산 4,768만 원의 ID 테크놀로지가 창업되었다.
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증을 받아오고, 개업 축하의 의미로 작은 동네잔치를 벌였던 그 날이 1988년 10월 17일이었다.
창립을 마친 유재원의 첫 업무는 22일 토요일의 서울행 출장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군요!!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