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돈이 열리는 나무 ==============================
#27
“자, 이렇게 하는 거야.”
유재원은 시범을 보였다.
만들어야 하는 제품 종류는 두 가지.
디스켓과 메뉴얼을 두꺼운 봉투에만 담으면 끝인 번들용 제품과 골판지 트레이로 메뉴얼과 디스켓을 고정한 다음 화려한 상자에 넣는는 풀 패키지 제품이다. 삼보 컴퓨터의 주문은 번들 2천 개, 패키지 300개였기에 비교적 간단했다.
두 제품 안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건 24쪽 자리 메뉴얼이다. 번들용 봉투는 이미 광고 가게에서 그럴듯하게 만들어 줬다. 고급스러운 종이에 ID테크놀로지 마크가 선명하다. 풀 패키지는 좀 번거롭다. 겉 상자도 조립해야 하고, 안에 들어갈 골판지 트레이도 조립해야 한다.
일단 유재원은 아이들에게 메뉴얼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창고에서 제일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게, 3천 장씩 뽑아 차례대로 놓인 메뉴얼 낱장이다. B4 크기였고 양면 인쇄라서 12개 묶음이 있다.
“이걸 차례대로 추려서 스템플러로 찍으면 돼. 스템플러 찍는 자리는 여기 보이지? 표시된 3곳을 콱 눌러줘.”
“스템플러가 뭐야?”
“아, 호치키스 말하는 거야.”
찍었다고 끝이 아니다. 메뉴얼 표지를 넘긴 바로 다음 장에 등록번호가 인쇄된 스티커를 붙어주고, 맨 뒷장의 홈에 SKC 총판에서 가져온 디스켓을 넣어주면 메뉴얼 작업이 끝이다.
상자와 골판지 트레이 만드는 건 더 쉽다. 프레스기로 눌러진 실선을 따라서 접어주면 끝이다. 숫자도 300개밖에 되지 않는다.
“자, 이제 각자 한 번씩 해볼까? 하다가 모르겠으면 물어봐.”
유재원의 말에 아이들이 움직였다.
다들 눈썰미는 있던 모양인지, 유재원이 했던 것처럼 메뉴얼 낱장을 착착 모아서 바닥에 탁탁 쳐 선을 맞춘 다음 스템플러로 찍었다.
처음 하는 것이라 품질이 제각각이다. 손에 힘이 좀 부족한 여자아이의 경우 스템플러가 잘 박히지 않기도 했다.
“이건 합격이고, 이건 불합격이야.”
그런 것들은 따로 분류해서 놓았다. 그렇다고 타박하진 않았다. 메뉴얼 낱장은 정확히 3천 장은 아니다. 잉크 한 통에 나오는 출력물 숫자가 인쇄기 상태에 따라 좀 달라서 최소 수십 장 어떤 페이지는 거의 100장 정도 더 있다. 그러니 실수해도 괜찮다.
유재원은 그렇게 메뉴얼 제작을 시작으로 상자 접기, 풀 패키지 만들기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해보게 했다.
“이게 완성품이야.”
아이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자, 그럼 열심히 해보자.”
유재원은 아이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재료들을 향해 돌진했다.
꿈은 페라리지만, 현실은 포드였다.
드림카 같은 걸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전생에서도 잘 나갔을 때는 벤츠도 몰아보고 그랬다. 지금 유재원의 심정은 생산 공정에 대한 것이다.
페라리는 자동화된 일부 공정을 제외하면 엔진부터 장인이 손수 조립하는 시스템이다. 반면 포드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해 포드 T 모델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유재원은 일단 메뉴얼부터 다 만들기로 하고, 친구들을 투입했다.
새 학년 시작할 때, 교과서를 가져가는 것처럼 줄을 선 다음 메뉴얼 낱장을 차례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1페이지부터 24페이지까지 한장씩 집어 간 후에 스템플러로 찍고, 등록번호 스티커도 붙이고 디스켓도 넣어준다. 번들용 봉투에 넣는 것으로 완성이다.
페라리처럼 한 사람이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병목 현상이 일어난다.
메뉴얼 낱장을 한 장씩 집는 게 어려운 친구도 있었고, 스템플러도 1개뿐이라서 기다려야 한다. 등록번호 스티커를 붙이는 것도 누구는 한 번에 빠르게 붙이는데, 누구는 조심조심 붙였다.
유재원은 반복작업만 하면 친구들이 호기심을 잃을까 봐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도록 했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였던 모양이다.
8명이 30분 동안 겨우 120개를 만들었다. 생산성이 너무도 떨어진다. 결국, 포드식으로 일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의 능력에 따라 임무를 정해줬다. 다 함께 만들면서 누구는 낱장을 잘 집고, 누구는 스티커를 잘 붙인다는 걸 미리 봐놨기에 적성에 맞는 걸 찾아주는 건 쉬웠다. 일단 손이 많이 가는 낱장 집기에는 3명을 배정했고,스템플러는 두 명이다. 하나로는 속도가 느려서 문방구에서 스템플러를 하나 더 구매했다.
스티커 붙이기, 디스켓 붙이기 같은 공정에는 한 명씩 배치했다.
유재원은 검수와 프리롤을 맡았다. 번들용 잘 만들어졌나 검사하고 불량품은 빼내다가 좀 밀리는 곳이 있으면 가서 돕는 거다.
과연 포드식 생산체제는 생산 효율의 극대화였다.
30분에 120개를 만들던 아이들이, 똑같은 30분에 230개를 만들었다. 이대로 4시간만 하면 메뉴얼 작업은 끝이다. 다음엔 종이봉투에 넣고 밀봉만 하면 된다.
“좀 쉬었다 하자.”
하지만 생각처럼 쉬지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면 만드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단순반복 작업만 하니 금방 지쳐버리는 것이다.
다 그런 건 아니다.
눈에 드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영식이라는 아이였다.
같은 반이긴 한데, 평소 대화를 잘 나눠본 적은 없었다. 영식이가 워낙 말이 없었고, 딱히 활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도와주겠다고 나서기도 했고, 맡겨준 작업도 묵묵히 수행했다.
친분이 깊은 주민이나 수경이까지도 50분을 넘어가니 좀이 쑤시는 반응이었는데, 영식이는 묵묵히 나가는 전차 같았다. 영식이만 보면 1시간이 아니라 4시간 연속 작업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포드식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가장 큰 단점이 공정 하나가 멈추면 전체 생산라인이 다 멈추는 것이다.
“간식 먹고 하자.”
유재원은 약속한 간식을 세팅했다.
메뉴는 빵과 음료수다.
슈퍼에서 사 온 공장 빵이라도 다들 맛있게 먹을 테지만, 기꺼이 나서준 친구들을 생각해서 유재원은 제과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빵을 사 왔다.
영원한 인기상품 단팥빵부터 슈크림 빵이나 채소 빵, 샌드위치와 햄버거 등등. 종류도 다양하고 양도 넉넉히 준비했다. 음료수도 100% 오렌지 주스와 우유로 빵과 잘 어울리게 가져왔다.
“이야! 빵이다!”
그야말로 푸짐한 간식 시간이다. 친구들이 만세를 부르며 달려왔다.
“제품에 빵가루 묻으면 안 되니까 작업용 장갑은 벗고 먹자.”
유재원의 말에 달려오던 아이들이 멈칫하더니 장갑을 벗어두고 와서 허겁지겁 빵을 먹기 시작했다.
“집에 갈 때 따로 챙겨줄 테니까, 배부르면 억지로 먹지 말고.”
친구들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유재원은 친구들 노동력을 빌린 대가를 간식 하나로 입 닦을 생각은 없었다.
간식은 그저 친구로서 대접이다. 수당은 ID 테크놀로지의 이름으로 주는 거다.
그렇기에 친구들 인건비도 다 회계 처리를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나중에 법인세를 계산할 때, 인건비와 같은 항목을 통해 상계된다.
믿음직하지 못한 국가에 세금으로 내느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임금으로 주는 게 훨씬 나았다.
“오늘 수고했어. 나머지는 내일 하자.”
하루하루 버티는 회사원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유재원의 입에서 나왔다. 이때가 날이 좀 어둑해지는 오후 6시 30분이었다.
간식을 먹고 다시금 힘을 내 작업하던 아이들의 입에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났다. 엄청나게 맛있는 간식 덕에 누구 하나 농땡이 치는 것 없이 다들 열심히 해주었다.
학교에서 3시에 출발했던 것이니 순 작업 시간은 3시간 조금 넘는다. 그 사이에 1,300개를 만들었으니 성과는 제법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들 작업에 익숙해졌으니, 내일 1,700개를 만들고 수요일엔 풀 패키지 판을 일찍 완성해서 서울로 올라가면 납품일정은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된다.
“자, 이거 받아.”
유재원은 제과점에 주문한 선물 상자를 친구들에게 하나씩 쥐여 줬다.
간식을 사러 갔을 때 따로 주문한 선물상자다. 안에는 잡다한 빵 7개와 1리터짜리 오렌지 주스가 들어 있다. 여기에 노란 봉투도 챙겨줬다.
“이건 일당이야.”
“야 이놈아! 친구끼리 도와준 건데, 무슨 일당이여? 우리 성의 무시하는 거냐?”
싱글벙글하며 선물상자를 대뜸 받았던 주민이가 봉투는 거절했다. 하이고, 고맙긴 하다만 그렇게 인정에 기대어 회사를 꾸려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
전생에 그런 식으로 하다가 폭삭 망했는데, 또 그렇게 하긴 싫다.
“내가 주는 거 아니다. ID 테크놀로지가 주는 거다. 게다가 회계 처리도 정식으로 했다고. 너희가 안 받으면 세금으로 나갈 돈이야. 그래서 나도 일당을 받는다. 정 마음에 걸리면 내일이랑 모레 더 빡세게 도와줘.”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도 국민학교 5학년쯤 되니 자신들이 안 받아가면 나라에서 가져간다는 건 확실히 이해했다. 다들 계면쩍음 반, 보람 반이 섞인 표정으로 봉투를 받았다.
집에 가는 것도 유재원은 알뜰히 챙겼다.
같은 동네 사는 아이들끼리 묶어 택시를 잡아준 것이다. 그렇게 다 보내고 나니 창고 앞엔 유재원만 남았다. 인화성 물질이라던가, 창문이 안 닫힌 게 있나 살펴본 후에 밖으로 나와 창고 문을 단단히 잠그는 유재원이다.
“어휴, 오랜만에 한 따까리하니 진이 다 빠지네.”
마지막 일을 마친 유재원이 허리를 쭉 펴며 푸념을 냈다. 그래도 피로가 있을지언정 보람이 있는 일이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나이의 친구지만 유재원의 정신적 나이는 할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작은 손으로 일도 도와주고 제과점서 사 왔던 간식도 잘 먹어주니, 보는 재미가 있었다. 쑥쑥 커서 ID 테크놀로지의 기둥으로 커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걱정은 새벽에 있을 레밍턴 스팅과의 두 번째 통화였다.
원래 계획대로 진행될지, 아니면 플랜 B를 가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잘 찍어 주었던 감각도 이번만큼은 어느 쪽도 확신이 없다.
다음날 새벽.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유재원은 전화기를 들고 마루로 나갔다. 개인 방이 있는 게 아니어서 까딱 목소리가 커지면 부모님이 깨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걸 생각 못 하고 그대로 통화했었는데, 이제라도 조심하는 것이다.
레밍턴 스팅 탐정사무소의 국제 전화번호를 눌렀고, 몇 초 기다리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레밍턴 스팅 탐정사무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벨이 한 번 다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분명 긍정적인 신호였다. 게다가 전화를 받자 나오는 멘트는 비록 상투적인 문구였지만, 그 안에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접니다. ID 테크놀로지. 입금 확인은 하셨나요?”
-휴, 그렇소. 동시에 의문 하나가 생겨나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점심도 대충 먹고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지.
“뭔데요?”
-내가 돈만 먹고 딱 잡아떼면 어쩌려고 그 큰돈을 한꺼번에 입금한 거지? 계약서도 쓰지 않았잖아.
“그럼, 뭐 당신을 소개해준 사람에게 가서 진탕 따지려고 했죠.”
-나를 소개해준 사람이 있다고?
“네, 캘리포니아 최고의 탐정이고, 컴퓨터 같은 최첨단 기술에도 능숙하다고 소개해줬지요. 또, 요즘은 한가하니 의뢰를 하면 성심성의껏 처리해줄 거라고 했습니다.
-허? 그 사람 말만 믿고 턱 입금한 걸 보니 엄청나게 믿는 사람인 것 같군. 도대체 그가 누군가?
누구긴 누구야? 당신이지.
하여튼 먹튀를 했다면 레밍턴 할아버지에게 좀 투덜거렸을 터인데, 다행히도 젊은 레밍턴 역시 신용이 있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죠? 의뢰를 받아들일 건가요?”
-이미 들어온 돈 중 반은 다 써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계약서를 써야 할 텐데 내 사무실로 언제 올 거요? 설마 내가 가야 하는 건가?
“아뇨. 일단 구두 계약으로만 진행하고 계약서는 나중에 쓰죠. 이 통화는 나도 녹음하고 있으니까 말을 바꾸더라도 증거로 쓸 수 있습니다.”
-아아. 알겠네. 그러면 내가 할 일은 뭐지?
드디어 본론 시작이다.
“컴퓨서브의 공개 FTP에 키보드 워리어라는 프로그램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게 우리 회사가 만든 제품입니다. 이걸 미국 전역에 크게 띄우는 게 목표입니다.”
-하하, 미국 전역이란 말인가?
“우리도 한 번에 성공할 거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차근차근 진행할 겁니다.”
-첫 타자가 캘리포니아인가?
“컴퓨서브입니다.”
레밍턴 스팅은 지역을 말했지만, 유재원은 서비스를 말했다. 이것이 인식의 차이였다.
-어라? 컴퓨서브? 내가 아는 그 컴퓨서브 맞나? PC 통신 말이야.
“바로 그겁니다.”
레밍턴 스팅이 컴퓨서브를 말할 때 익숙함이 느껴진다.
당연했다. 레밍턴 할아버지가 분명히 말씀하셨다. 80년대 말 일이 안 들어오자 매일 컴퓨서브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말이다.
조금 고루한 탐정의 이미지와 PC 통신은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레밍턴 스팅은 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탐정이 되기 전 직업은 LAPD였고, 여기서 수사과 첨단범죄담당 보직을 맡고 있었다. 컴퓨터에 익숙한 분이었으니, 컴퓨서브를 하는 것도 능숙하셨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의 IT 혁명을 직접 체감하셨고, 좋은 타이밍에 투자한 덕분에 돈벼락도 맞을 수 있었던 거다.
이러한 이력 덕분에 레밍턴 스팅도 지역과 서비스의 차이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키보드 워리어의 공개테스트를 위해서 컴퓨서브 유저 중 1,000명을 모집해주세요. 무료로 하는 일은 아니고 30달러 정도 사례를 할 겁니다. 이렇게 모집된 테스터는 3일 정도 키보드 워리어를 사용한 후에 소감을 컴퓨서브 자유게시판이나 소프트웨어 포럼 등에 올려주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좋은 전략이군.
간단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여러 노림수가 담겨 있었다.
우선 테스터로 선정된 사람들이 키보드 워리어를 내려받을 것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모집에 응했다가 탈락한 사람도 궁금해서 받아 볼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운로드 숫자는 올라간다.
테스터들이 소감을 게시판에 올리면 그것으로 키보드 워리어의 이름은 노출되면서 이목을 끌 수 있다. 만약 엄청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한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홍보도 해줄 거다.
-그런데 일일이 보상을 지급해줘야 하는 게 번거롭게 들리는군. 현금으로 받겠다고 내 사무실로 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온라인으로 입금한다고 해도 지원자가 개인정보를 보여 주는 걸 껄끄럽게 여길 테지. 그것 때문에 참여자를 다 모집하기도 힘들 수 있어.
듣고 보니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유재원의 로드맵은 1997년부터는 정말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 있겠지만, 초반에는 구멍이 많다. 지금 보는 것처럼 88년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하지. 컴퓨서브 유저들이라면 1달 구독권 같은 게 매력적일 거야. 게다가 일일이 돈을 주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지. 컴퓨서브 아이디만 알면 되는데, 온라인에서 모집할 때 아이디는 다 알게 될 거 아닌가. 게다가 1천 개나 되는 유료 구독권이라면 컴퓨서브와 구매 협상으로 값을 낮출 수도 있겠지.
헐, 젊은 레밍턴도 제법이네.
돈을 나눠주는 번거로운 작업도 상쇄하고, 컴퓨서브 유저들에게 더 만족감을 주면서 대량구매로 돈까지 절약할 수 있는 수였다.
일을 맡겨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한 번에 사르륵 사라졌다.
“예, 그게 좋겠네요.”
-그렇지? 구독권 지급은 리뷰를 올린 다음에 지급하는 것으로 하고. 테스터들이 리뷰를 올릴 때도 시간을 잘 조절하면 좋을 거 같군. 유저를 백 명 단위로 묶어서 리뷰를 올리는 시간대를 조정하는 거지. 한 번에 우르르 올리면 의심을 사기도 쉽고, 노출되는 시간도 짧아지니 말이야. 젊은 사업가 양반, 내 생각이 어떤가?
어?
어어?
순간 유재원은 레밍턴이 마케팅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료 테스트의 본질은 사용한 사람의 소감을 듣거나 오류를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제품을 계속 노출해 시선을 잡아끌기 위함인데, 레밍턴은 그 본질을 제대로 읽은 거다.
“맞아요. 그렇게 하면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유재원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레밍턴에게 유료 테스터를 진행하는 전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지? 의뢰비도 받았으니, 바로 시작하지. 컴퓨서브에 게시글을 올리는 건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레밍턴도 귀찮게 발품 팔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의뢰를 비싼 값에 맡게 되어 신바람이 났다.
일의 진행상태에 대한 보고는 매일 이 시간에 유재원이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10일이면 좀 반응이 오려나?”
테스터 1,000명을 모집하는데 5일 정도로 잡았다.
이들이 3일간 키보드 워리어를 사용한 후 리뷰를 올리는데 3일이다. 이후 2일 동안 경과를 확인하면 될 것 같아서 10일 후를 생각하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 시장의 상황을 잘 모르는 유재원의 부정확한 예상이었다.
레밍턴 스팅의 일 처리는 완벽했다. 컴퓨서브의 협상으로 1개월 구독권 1,000개를 정가보다 12%나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고, 이벤트를 도와주겠다는 협력도 끌어냈다.
그렇게 사들인 1개월 구독권으로 테스터를 구하자 1,000명은 순식간에 모였다. 부유한 나라 미국답게 이들이 가진 컴퓨터 스펙은 386이 반이 넘었고, 그중에 일부는 미디 모듈까지 풀세트로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키보드 워리어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교육과 게임을 완벽히 융합한 키보드 워리어는 순식간에 열성적인 지지자를 양산했다.
지지자들은 순식간에 컴퓨서브의 게시판을 장악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곳까지 불을 번졌다. 인터넷을 운영 중이었던 대학교와 학교 등등, 키보드 워리어는 핫이슈로 떠올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뜨겁게 끓어 올랐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은 것처럼 폭발했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ID 그룹의 경이적인 성장과 이를 이끈 유재원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IT의 황제, 안드로이드의 아버지부터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아귀, 대재벌 해체 전문가 등등.
유재원은 하나였지만, 서술자의 사상이나 발언자의 의도에 따라 평가는 여러가지였다.
그렇지만 ID 그룹의 전신인 ID 테크놀로지가 세상에 당당히 이름을 드러낸 1988년 11월의 사건에 대해서는 이 문구가 나온 다음부터는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는다.
‘핵폭탄이 터졌다. ID 그룹이 터트린 첫 번째 핵폭탄이었다’라는 문구다.
그만큼 미국은 한 번 터지면 화끈하게 터지는 나라였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즐거운 토요일이네요~!!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주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