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65화 (65/1,007)

[65] 자이언트 킬러 ==============================

#45-1

3월이 되었다.

봄바람에 얼었던 땅이 녹고, 녹색의 새싹이 속속 모습을 드러낼 때였지만, 한국의 정국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청문회를 시작으로 야당의 공세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선 파업 소리가 끊이지 않자, 노 대통령은 결국 공안 정국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빨갱이 딱지를 받지 않기 위해서 정치인들은 바싹 긴장했고, 시위 진압을 위한 경찰들의 대응도 한층 강경해졌다.

서슬 퍼런 정국이었지만, 시골 덕진리는 딴 세상이었다.

신작로를 깐다고 땅을 다지고, 배수로를 만든다고 길가를 파는 중이었다. 사방에서 으쌰으쌰하는 공사 소리가 시끄럽다. 심지어 덕진 국민학교 본관 건물 뒤쪽으로 커다란 식당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가 ID 테크놀로지의 이름으로 시작된 마을 정비 사업이었다.

유재원의 이름은 숨겨졌다.

돈을 많이 쓰는 일이었고, 이를 통해 유재원에게 돈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교장 선생님과 현미유 사장님 등, ID 테크놀로지의 주주님들이 전면에 나섰다.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로 바꿔간 상태였지만, 그래도 ID 테크놀로지의 자랑스러운 주주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울컥 해지는 유재원이다.

스스로 재물을 챙길 줄 모르는 분들이니, 유재원은 틈틈이 우선주 배당을 통해 큰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하여튼, 내오마을을 비롯한 덕진리 전체에 일제히 공사판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사방에서 ID 테크놀로지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속사정을 잘 아는 내오마을 사람들은 유재원을 칭찬했고, 소식이 좀 떨어지는 다른 마을 사람들은 교장 선생님을 높였다.

이렇게 시작된 공사 계획에서 작은 덤 하나가 나중에 추가되었다.

외가가 있는 능서면이었다. 공사를 시작했을 때, 외가를 챙기는 걸 깜빡했다는 것을 다행히도 자각한 유재원이었다. 능서면 하나 추가한다고 전체 공사비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어려운 공사도 아닌지라, 포크레인과 덤프트럭, 레미콘 트럭 등의 물량공세가 쏟아지자, 시골 마을의 풍경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휙휙 바뀌었다.

동시에 이런 식의 기부는 처음 있는 일이라서 지역 신문사는 물론 여주 시장까지도 관심을 보였다.

관심이 행동으로 바뀌는 것도 순간이다. 시장이 나서서 공사에 필요한 것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중에 가장 반가운 건 경기도 수도사업본부와 협의해서 수돗물이 빨리 들어 올 수 있도록 해주기로 했다.

마을에 수도관을 다 깔아도, 광역상수도망과 연결되지 않으면 물이 안 나온다. 유재원은 상수도망과 연결될 때까지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보내주려고 했는데 시장의 말 한마디에 쉽게 풀렸다.

시장도 큰돈 드는 것도 아니고, 말 한마디 하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정비사업이 끝나면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욕심에 해주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숟가락 올리기라고 할까.

그렇다고 나쁘게 보진 않았다. 아직 민선으로 시장을 뽑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으로 얻은 개정헌법에 따라 민선 1기는 91년에 시작하게 된다.

거의 3년 뒤였으니, 대다수의 임명직 시장들은 선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에 반해 여주 시장은 숟가락 올리기가 확실하긴 해도, 민생을 챙기긴 하는 것이다.

분명 민선 1기 시작을 위한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사용할만한 좋은 사진이 될 거다.

“전체, 차렷! 교장 선생님께 경례!”

유재원이 전교생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학생들이 군인도 아니면서, 군인처럼 경례를 올렸다. 국민학생들이라서 자세도 안 나오고 중구난방이긴 해도 600명이 넘는 전교생이 한 번에 경례를 하니 그림은 잘 나왔다.

3월 2일. 덕진 국민학교의 89년 첫 번째 아침 조회 시간 모습이었다.

유재원은 6학년 1반이 되었고, 반장과 학생회장이란 타이틀을 동시에 얻었다.

학생 자치 같은 건 없을 때이니, 반장부터 학생회장까지 죄다 선생님들이 낙점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덕진 국민학교의 스타 유재원이 반장도 하고 학생회장까지 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모님은 반장에 학생회장까지 한다는 말에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ID 테크놀로지를 통한 성공은 뭔가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면, 반장과 학생회장은 부모님도 확실히 체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작년에 장관상을 받았을 때처럼, 마을에 잔치라도 열 기세였다. 특히 이장이자 큰아버지인 유봉철이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잔치는 사정에 의해 열리진 못했다.

내오마을뿐만이 아니라 덕진리 전체가 이미 공사판이라서 잔치를 열 여력이 없었다. 그 공사에 인부들로 마을 사람들이 다 참여한 덕에, 잔치를 즐길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잔치는 됐고, 떡이라도 해서 돌리기로 했다.

유재원은 반장은 물론 학생회장 자리가 딱히 끌리는 건 아니었다.

귀찮기만 하고, 권한도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스승의 은혜를 확실히 받은 유재원이었다.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고, 의리도 있으니 경례 구호를 외치는 유재원의 목소리는 커다란 운동장을 쩌렁 울릴 정도로 컸다.

작년까지만 해도 지루하다고 느낀 교장 선생님의 훈화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따로 만날 때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하시는데, 학생들 앞에만 서면 말주변이 사라지는 신기한 교장 선생님이셨다. 그래도 준비해오신 투박한 훈화에는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담겨 있기에 집중하는 유재원이다.

“이야, 너 언제 학생회장 해봤냐? 좀 하네?”

아침 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민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이다. 처음. 긴장해서 혼났다.”

유재원도 이제와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들이긴 해도 전생을 통틀어 6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 서 본 건 처음이었다. 전생에 사업도 해보고 지금도 사장을 하고 있다지만, 수백 개의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때엔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배에 힘 딱 주고, 온몸으로 목소리를 짜내니 겨우 삑사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매달 첫째 주 월요일은 무조건 아침 조회가 있고, 간혹 비정기적인 조회가 있을 텐데 그때도 잘해낼지 모르겠다.

“괜찮아. 몇 번 하면 아무렇지도 않아.”

나란히 따라오던 수경이가 한 마디 보탰다. 주민이와 수경이 모두 1반으로 같은 반에 편성이 된 덕이다.

수경이는 학년이 올라도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6학년이 되어서 유재원에게 반장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학급 임원 자리를 다 내려놓은 건 아니고, 부반장이라는 자리를 맡았다.

반장이라고 해봐야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차렷, 경례’하는 구호를 외쳐주는 게 다라서, 부반장이라고 타이틀은 거창해도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은 연속 반장 자리를 놓쳐서 아쉽지 않으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자신을 보는 수경이의 눈빛이 무척 홀가분한 표정이었던 탓이다. 하긴 5학년 때까지 줄곧 반장을 했으면 귀찮고 부담이기도 했을 것이다.

수경이도 6학년이 되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5학년 때는 심히 말괄량이 같았는데,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다. 여성스러움도 좀 느껴지기도 했다.

많아 봐야 3개월이니, 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바뀌었나 싶겠지만 그래도 분명 차이가 난다. 특히 외적인 변화는 눈에 보일 정도다. 일광욕한 것처럼 구릿빛 피부가 지금은 매우 옅어졌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날 선물로 받은 선크림을 열심히 바르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 선물을 한 사람은 유재원이다.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과외는 최근엔 좀 뜸해지긴 했는데, 2월 초까지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방문했던 것이니, 동성 친구들보다 유재원과 더 친해지는 건 당연했다. 은연중 자기 피부가 짙은 게 콤플렉스라는 속마음도 털어놨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까맣다고 놀림 받을까 걱정이란다.

유재원이 해결책으로 준 게 선크림이다.

이때만 해도 아이들은 화장품과 거리가 멀었다. 어른들만 바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선크림도 화장품의 범주에 들어갔다.

21세기 사람인 유재원은 향이 연하고, 백탁 현상이 적은 선크림을 생일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 겸해서 12개를 한 번에 사서 줬다. 물론 포장도 여자아이 취향에 맞게 핑크 상자에 리본으로 해줬다.

1년만 꾸준히 바르면 도시 아이들처럼 하얗게 될 거라고 해줬더니 열심히 바르고 있는 모양이다.

예전엔 털털한 동성 친구를 대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그렇다고 완전히 이성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의 이상형에서 롤리타 취향은 완벽히 제로였다.

수경이가 젖살이 빠지고, 성숙한 느낌이 나려면 최소한 고등학교 2, 3학년쯤은 돼야 하니, 한참 멀었다.

드르륵!

아침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교실인지라 시끌벅적했다. 반이 많이 바뀌어서 데면데면한 아이들도 있지만, 덕진리 안에서는 알음알음 알고 지낸 사이라서 금방 시장통처럼 변했다. 그러다 교실 앞문이 열리고 새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자 바로 조용해졌다.

6학년 1반 담임은 정현웅 선생이었다.

컴퓨터부 담당으로 유재원과 함께 경진대회에 나가서 상도 함께 받은 인연이 있었다. 그것으로 시작된 인연을 통해 ID 테크놀로지의 주주이기도 하는 선생님이었다. 고향은 서울에 있었고, 방학 동안에는 서울에 올라가 줄곧 있었다. 그래서 겨울 동안 있었던 2번의 주주 총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셨다. 대신 교장 선생님께 위임했고, 그 취지에 대해 인정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자신의 주식이 죄다 우선주로 바뀌었지만, 딱히 문제 삼진 않았다. 교장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배당금이 워낙 커서 당황했었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처럼 자기 재산을 챙기는 데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기부에 참여하긴 했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자동차도 사셨고, 관사에서 나와서 시내에 좋은 집을 전세로 얻으셨다. 좋은 옷과 시계도 사면서 삶의 질이 확 바뀌었다.

“차렷, 경례!”

반장인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 아이들을 통솔했다.

“다들 반갑다. 정현웅이다. 1년 동안 잘 해보자꾸나.”

정현웅 선생은 칠판에 본인의 이름을 크게 써 놓고 아이들에게 자기를 소개했다.

“컴퓨터부 담당이기도 하니까, 컴퓨터에 관심 있으면 지원하거라. 올해부터 교장 선생님이 컴퓨터실 개방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작년처럼 한 달에 한 번 만져보는 일은 없을 거다.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은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고 보이면 우리 반 반장 재원이가 이끄는 심화 반에 오를 수 있다. 심화반은 방과 후에 재원으로부터 컴퓨터를 배울 수 있을 거다.”

컴퓨터 심화반은 유재원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방과 후 활동이었다.

처음엔 작년 광고 가게 창고에서 가내수공업으로 패키지를 만들었던 친구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기 위한 정책이다.

========== 작품 후기 ==========

연참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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