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자이언트 킬러 ==============================
#46-1
-미래 그룹의 중심이 미래건설인 만큼, 이번에 공석이 된 미래건설 회장에 전명헌 회장의 아들 중 누가 오를지에 따라 향후 미래 그룹의 승계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분석입니다. 정계에서는 차남 전재구를 유력시하고 있는데, 6남 전재준의 부상도 무섭다는 소식입니다.
승계?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전생에서는 이건 2000년에 벌어질 일이었다. 미래 그룹의 승계를 두고 벌어진 전 씨 형제들의 전쟁을 왕자의 난이라고 했다. 왕회장의 자리를 두고 그의 아들들은 치열한 지분 싸움을 벌였다.
결국, 누구 하나 완벽한 승자가 없었고, 거대했던 미래 그룹은 크게 3개의 회사로 조각나게 되었다.
왕자의 난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전명헌 회장이 딱 부러진 승계 작업을 해놓지 못하고 돌아가신 탓에 벌어진 일이다.
후계구도 정비를 하지 못했던 이유는 승계 작업을 진행했던 장남 전재철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반쯤 진행되었던 작업이었는데, 승계받을 자가 사망하니 자동 올스톱이었다.
사망 사고는 82년쯤이었으니, 장남을 대신할 후계자를 뽑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왕 회장은 그러지 않았다.
무려 6명의 자식이 있었고, 그중에 남자가 다섯이나 된다. 그런데도 장남 말고는 딱히 전명헌 왕회장의 성에 차는 이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주력 계열사 부사장이나 이사 자리를 만들어 후계자 경쟁을 시키고 있긴 했다.
그런데 예정보다 일찍 공석이 된 미래건설 회장 자리로 인해서 후계자 싸움이 10년은 일찍 벌어질 모양이다.
지금은 왕회장도 건재하고 가신들도 많이 남아 있다. 그룹의 분할되는 건 창업자 입장에선 최악의 사태이니 그룹 전체를 통할할 한 명의 후계자가 선정될 공산이 크다.
“재미있겠네.”
본인이 일으킨 나비효과로 인해 벌어진 일임에도, 유재원은 괘념치 않았다. 외려 돈만 많이 있었으면, 한 다리 걸쳐서 이권이나 이득을 챙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워했다.
대신 이런 이야기는 팝콘을 놓고 봐야 하는 재미있는 소식이니, 앞으로의 뉴스가 기대되는 유재원이었다.
동시에 경각심도 생겨났다.
스리쿠션을 먹여 그분을 떨어낸 것이, 나비 효과로 인해서 미래 그룹 후계자 싸움이 벌어지게 생긴 것이다.
작년엔 올림픽 결과 같은 걸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뽑아냈다고 하며, 아버지나 현미유 사장님의 신용을 얻는 일을 했어도 현실에 커다란 변수가 생기진 않았다.
존재감이 많이 달라진 이제는 제법 큰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미래의 흐름이 크게 바뀌면 곤란해지는 게 유재원이었다.
ID 그룹을 일구기 전까지는 조심해야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약 또 이런 일을 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할 것이다. 미래 건설 회장이었던 그분을 낙마시키는 건 마스터 플랜에도 있는 중요한 목표였으니 말이다.
이유도 명확하다.
여러 가지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 요소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그분이 인터넷을 사유화하고 오염시키는 짓을 하기 때문이다.
유재원의 ID 그룹이 가질 가장 큰 비즈니스 영역은 인터넷이다.
인터넷 초기엔 사용자와 사용자 사이에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다. PC 통신 시절에 잘 만들어진 채팅 문화가 인터넷으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가 양날의 검이었던 익명성을 가지고 악성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악성 댓글은 인터넷 시대엔 어쩔 수 없는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국가 차원에서 악성 댓글을 달게 하고, 사용자끼리 정치 성향을 가지고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한 장본인이 그분이었다.
국정원과 군대를 동원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초토화했고, 포털 사이트와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 압력을 넣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이 나오도록 관리했다.
세계적 인터넷 기업이 되려는 유재원에겐 최악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전생에 죽음을 기다리며 마스터 플랜을 만들 때, 그분은 진짜 거물이 되기 전에 떨궈놓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예정보다 일찍 왕회장 전명헌을 만났고, 덕분에 큰 소란 없이 낙마시킬 수 있었다.
그분은 모르겠지만, 지금 방식은 그에게도 좋았다.
기억의 궁전 속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마스터 플랜은 누가 보더라도 과격한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ID 인베스트먼트, 현장매니저 황재홍.
묵은 땅을 팔겠다고 나온 농지의 주인과 만날 약속 장소로 가기 전 황재홍은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몇 번이고 보았다.
볼 때마다 신기했다.
ID라는 영어는 은박으로, 인베스트먼트는 한글 고딕으로 쓰여 있었고 현장매니저라는 낯선 직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이 걸려 있다. 뒷면에는 사무실 전화번호와 회사의 사무실의 주소가 작게 들어 있다.
부동산 업자에서 탈피해 정식으로 번듯한 직장을 얻은 것이다.
굴리는 돈은 무려 45억 원.
자신과 같은 굼벵이가 100년을 굴러도 얻을 수 없는 엄청난 돈이었다. 게다가 자린고비의 굴비처럼 눈으로만 봐야 하는 돈이 아니었다.
분당이라는 지역 한정이긴 했지만, 자신이 보기에 목이 좋은 땅이라고 찍으면, 바로 매입 절차에 들어간다.
매입 대금도 다른 사람들보다 넉넉히 챙겨 준다. 전직 기획부동산을 할 때처럼 약을 칠 필요도 없다.
목적지에 도착한 황재홍의 크라운 자동차는 부드럽게 멈추고 약속 장소인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덕분에 사장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사장은 아니라고 몇 번은 사양했는데, 시골 사람들은 낯선 매니저보단 사장으로 황재홍을 칭했다.
황재홍이 땅을 사는 방법이, 비싼 가격에 팔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는 방식이었기에, 사장이란 단어는 순식간에 황재홍의 직책처럼 되어 버렸다.
처음엔 좌불안석이었다.
그렇지만 진짜 사장인 유재원이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오시는 유재원의 부모님은 호칭 따위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고 했다. 마치 헌병부대에서 막 들어온 이병에게도 일병을 달아주는 것처럼 이해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 성장하게 되면 창업 구성원들은 능력만 확인되면 임원이나 사장 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다.
지금도 든든한데 진짜 사장이 된다면?
의욕 충전 120%다.
이번 건도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전투적으로 맞은 편에 앉았다.
“어라? 이게 누구야? 재홍이잖아!”
익숙한 목소리다.
꾸뻑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순박한 촌로의 옆자리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한때 황재홍과 함께 업자 일을 했던 채무성이라는 형님이다. 떡하니 입을 벌린 모습이 무척이나 놀란 듯싶었다.
“탄천 일대의 땅을 쓸어담고 있다는 큰손이 재홍이 너였어?”
얼마나 놀랐으면 황재홍을 향해 삿대질을 한 채로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분당에서 사장님 소리를 듣는 황재홍은 이미 유명 인사였다. 묵은 농지를 사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 누적금액이 벌써 20억은 넘었다. 소문이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무성이 형님, 오랜만입니다. 형님이 고 어르신 땅의 중개를 맡은 겁니까?”
“어? 어! 그렇지.”
채무성도 업자긴 했다. 그런데 황재홍보다는 급이 살짝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채무성은 빛나는 부동산중개 자격증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성장하고 있는 도시의 목 좋은 곳에 복덕방 하나 차려 놓으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 한눈만 팔지 않으면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집안도 넉넉해지는 거다. 하지만 채무성은 집이 아니라 자신만의 빌딩을 갖고 싶어 했다.
빌딩을 세우는 건 복비를 받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그가 평범한 중개를 서는 건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한 방이 계속 있는 것도 아니고, 씀씀이가 커졌는데 벌이는 시원찮으니 결국 본업인 중개를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분당의 부동산 시장은 평범했는데, 최근 큰 손이 나타나서 땅을 보러 다니고, 실제 거래도 이뤄지니, 뭔가 냄새가 났다. 채무성은 고 씨 어르신과 서로 아는 사이였고, 복비를 저렴하게 받겠다면서 그 큰손과 대면하는 자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황재홍이 나타나니 더럭 놀랄 수밖에.
반면 황재홍에겐 그다지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같이 일을 하긴 했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회포를 풀 정도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채무성이 중개사 자격증이 있다고 황재홍과 같은 이들은 시다바리 취급을 하며 겸상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사이가 지금은 완전히 반전이었다.
고 어르신은 정부의 의도적인 쌀값 고정 정책 때문에, 농사를 지어도 돈이 되지 않는 농지를 처분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땅이 하도 커서 황재홍 말고는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이가 없었다.
정자동에서 탄천을 끼고 있는 10만 평 상당의 넓은 농지였다.
탄천을 끼고 있는 덕에 산과 가까운 농지보다는 비싼 값으로 평가를 받았다. 최근 이야기가 된 건 평당 4,800원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평당 5천 원으로 맞혀주겠다고 하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래 대금이 무려 5억 원이나 되는 큰 건이었다. 이렇게 큰 건은 혼자 처리할 수 없었던 고 씨가 안면이 있던 채무성를 부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농지를 사서 무얼 하려고 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황재홍이 대금 지급에 대한 방식을 잘 설명하는 중에 채무성이 끼어들었다. 충격에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한소리를 하는 것이다.
서류만 잘 봐주면 되지, 잘 되던 거래에 왜 초를 치느냐며 고 씨가 눈을 흘겼다. 그렇지만 채무성은 배에 힘을 딱 주고 이유를 꼭 들어봐야겠다는 태도였다.
황재홍은 그 태도에 비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정부가 턱없이 모자란 서울의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신도시를 계획 중인데, 일산, 분당 등등의 지역이 유력시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황재홍이 돈을 뿌리며 다니니 소문에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커지고 있지만, 확신은 없다. 그러니 진짜 윗선에 신도시 예정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본인도 염치는 있어서 돌려서 물어보는 것이다.
“건물을 짓겠다면 상업이나 주거 용지를 샀겠지요. 농지를 사면 농사를 짓는 것밖에 더하겠습니까? 물론 먼 훗날에 녹지가 풀릴 수 있겠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렇지, 나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가 이렇게 늙어버렸네. 자네 회사에 땅을 넘기고, 며칠 뒤에 녹지가 풀리더라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고 씨 어르신은 채무성을 눈빛으로 타박하며 급히 말을 이었다.
채무성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도저히 나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덕분에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최종 계약서는 금방 만들어졌다.
“계약금은 5천만 원은 지금 입금해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날인은 바쁘신 사장님을 대신해 사장님의 부모님께서 내일 찍으러 오실 것이고, 등기 절차가 마무리되면 나머지 잔금을 한 번에 치르겠습니다.”
“아이고, 듣던 대로 시원하구먼.”
“제가 시원한 게 아니라, 사장님이 통이 크신 것이지요.”
임시계약을 마치고 계약금을 입금까지 했다. 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입금이 확인되자, 고 씨 어르신은 영수증도 써 주었다.
"그럼, 내일 보세!"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고 씨 어르신은 먼저 일어났다. 돈이 들어와서 그런지 몰라도 70 먹은 노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힘찬 걸음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볼일은 다 봤으니 황재홍도 일어나려는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채무성이 그를 붙잡았다. 그냥 무시해도 되지만, 그간 인연이 있어 일단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야, 우리 떡두꺼비 참 많이 컸구나. 앉은 자리에서 5억짜리 물건도 한 방에 끝내네. 엄청난 쩐주를 잡은 모양이구나?”
채무성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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