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1화 (71/1,007)

[71] 자이언트 킬러 ==============================

#48-1

“이제 실행해 봐야지.”

경고나 오류가 없어도, 정작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이상할 때가 좀 있다. 링크를 빼먹어서 일부 소스코드가 컴파일을 안 해 버리는 경우나, 희귀한 경우지만 컴파일러도 소스코드에서 경고나 에러를 잡아내지 못하는 일도 있다.

완벽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철저한 테스트뿐 이다.

유재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았다.

오피스 프로그램의 시작 명령어 ‘START’를 번개처럼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드르륵거리는 하드디스크 로딩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유재원에게도 익숙한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640*480의 VGA 해상도에 16bit 64K 컬러로 이뤄진 바탕화면은 깔끔 그 자체였다.

바탕화면 그림은 푸른색 산과 파란 하늘로 맑은 봄날 덕진리의 뒷산을 찍은 것을 스캔으로 옮겨온 것이다.

16bit 컬러를 사용할 때만 보여주는 히든 바탕화면이고, 256색이나 16색 사용자는 제한된 색상에서는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2〉라는 모자이크 비슷한 작품을 오마주한 바탕화면이 나온다.

왼쪽 위에는 오피스 프로그램의 아이콘들이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다.

워드 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별로 뭔가 독자적인 이름을 지어준 게 아니라 프로그램의 속성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대신 모든 프로그램에 ID라는 접두사가 붙어서 경쟁 프로그램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바탕화면 아이콘은 이게 다가 아니다.

파일 관리자라는 서류철 모양의 아이콘도 있었고, 키보드 워리어 한글판이나 미국판 아이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울펜슈타인 베타 버전까지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컴퓨터에 설치된 ID 테크놀로지의 제품은 모두 자동으로 검색해서 바탕화면 아이콘으로 생성해준 것이다.

“자동 검색 기능은 합격!”

유재원은 체크 리스트의 맨 윗줄, ‘자동으로 프로그램이 등록되는가?’를 지웠다. 그리곤 다음 단계인 ‘마우스는 자동으로 인식했는가?’를 체크했다.

투박한 3 버튼 마우스를 잡고 흔들어 보는 거다. 그러자 화면 구석에 숨어 있던 화살표가 마우스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부드러움과 경쾌함!

그것은 유재원이 절대 놓치지 않는 필수 속성이다. 마우스의 움직임도 다른 프로그램에서와 달랐다. 보통의 프로그램은 마우스를 지원하더라도 뭔가 툭툭 끊기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유재원의 오피스 프로그램에선 진짜 모니터 속에 마우스가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우스의 위치를 갱신해 주는 속도가 남다른 것이다.

보통은 30Hz인데 ID 오피스는 85Hz로 3배 가까운 속도로 높였다. 모니터의 화면재생속도와 일치시켰기에 화면 속 커서가 손에 딱 맞는 듯 움직이는 것이다.

둘의 차이는 크다. 게다가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 사용할 때에도 영향을 준다. 마우스로 스크롤 바를 움직일 때, 30Hz짜리는 뚝뚝 끊기는 반면 85Hz는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고성능 세팅은 하드웨어의 호환성을 따지게 된다. 하지만 양질의 품을 사용하고, 하드웨어 통신 규격을 잘 지킨 제품이라면 문제없다. 물론 고성능 세팅이 켜지지 않는 시스템을 위한 저속 모드도 준비되어 있다.

“마우스도 OK!”

마우스도 잘 움직이는 걸 확인한 유재원은 곧장 시작 버튼을 눌렀다. 풀다운 메뉴가 부드럽게 펼쳐지며 감동을 자아냈다.

설치된 프로그램 목록, 최근 문서, 설정, 찾기, 도움말 등등. 유재원이 그림으로 그렸던 리본 인터페이스가 제대로 작동했다. 오른쪽 끝에는 날짜와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도 들어 있다.

기본 요소는 너무 훌륭했다.

오른쪽 마우스 버튼을 클릭해서 설정에 들어가 해상도나 컬러를 바꿔 보는 것도 해봤는데, 아주 잘 작동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유재원은 ID 워드프로세서를 실행했다.

곧 화면 중앙에 ID 워드 프로세서라는 타이틀 로고가 큼지막하게 떴고, 로고 밑으로는 프로그램 제작에 사용된 각종 특허 번호들이 깨알같이 들어갔다.

오피스 프로그램 제작 작업을 하면서 각종 신기술이 많이 개발되었고, 이것들이 죄다 특허로 등록했다.

워드프로세서 화면이 나타나기까지 딱 3초 걸렸다.

486의 성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모습이다. 386이라면 6~8초 정도가 걸릴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라 스프레드시트,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을 모두 실행시켰다. 작업 표시줄에 뜬 프로그램을 보고 알트키 + 탭키를 동시에 눌러 전환도 해봤다. 워드프로세서를 하나 더 실행해서 다른 문서를 불러오기도 해봤다.

4메가 램 덕에 중복 실행도 부드럽게 이어졌다. 최적화가 잘 되어 있으니 1메가 램이라도 실행할 때 약간 버벅거리지 실행이 끝나면 부드럽다.

유재원은 온갖 기능을 다 실행해봤다.

보석글로 작성된 문서를 불러와서 ID 워드프로세서 파일로 바꿔 저장하기도 했고, 여주 지사가 로터스 1-2-3으로 만들어 보낸 급식실 결산 자료를 ID 데이터베이스에 올린 후, 스프레드시트로 불러와 정리해보기도 했다.

스프레드시트에서 돼지고기의 공급가 변동을 막대 그래프를 만들어, 워드프로세서로 불러와 붙여 보는 작업도 문제없었다.

중요한 프린터 출력도 정상이다. 막대 그래프도 깔끔하게 뽑혔고, 글자가 깨지는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작업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현재 나온 사무용 프로그램들과는 기술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3, 4년 정도는 앞선 건가?”

자세한 조사는 따로 해봐야겠지만 기술력의 차이는 압도적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최소 3년이다. IT 분야에서 3년을 앞선다는 건 해당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이라는 이야기다.

“방심은 금물이다!”

순간 우쭐해지려던 유재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매끄럽게 돌아가지만, 소스코드만 수십만 라인에 달하는 방대한 프로그램인 만큼 어디서 예상하지 못한 오류가 뿜어질지는 모르는 거다.

프로라면 혼자 잘 만들었다고 만족할 게 아니고, 무조건 많이 팔아야 하는 법이다.

내일 새벽 실리콘밸리 팀과 통화를 해서 오픈베타 테스트나 앞으로의 출시 일정에 관해 논의를 해봐야겠다.

“하여튼, 오늘은 즐기자!”

큰 과제를 완수한 유재원은 컴퓨터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 먹은 급식 말고는 집에 와서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

“이럴 땐, 자기에게 스스로 선물을 줘도 돼!”

전생에 큰일을 끝낼 때마다 자신에게 선물을 주었던 유재원이다. 자신을 챙겨주는 다른 사람이 없으니 본인이라도 스스로 챙겨 먹자고 해서 시작했던 일이었다.

처음엔 고디바 같은 비싸서 선뜻 사 먹기 힘든 초콜릿 같은 걸 먹었다. 그러다가 성공이 이어지고 주머니가 커지자 고가의 게이밍 컴퓨터를 사기도 했고, 나중엔 삼각별이 떡하니 박힌 독일 자동차를 사기도 했다.

점점 뭔가 커져 가는 듯 했지만, 소박한 선물이라도 스스로 찾아서 먹었다. 전생에 이런 습관을 들여놓으니, 지금 자신에게도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포상을 위해 여러 가지 목록이 떠올랐다. 개중엔 돈이 좀 드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생각나는 건 고가의 명품은 아니었다.

“으, 치킨에 맥주가 딱인데!”

고소하고 촉촉한 육즙이 가득한 통통한 닭 다리를 확 물은 다음,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하고자 한다면 맥주 한 병 정도는 몰래 마실 수는 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원하는 맥주는 독일 정통의 바이엔슈테판 오리지널 라거였다. 다스 비어 부츠라는 장화 모양의 전용 잔에 가득 담아서 한 방에 마시면 끝내준다.

이건 서울에 가봐도 못 찾는다. 지금 한국의 맥주는 OB와 크라운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가만! 맥주는 몰라도 치킨은 지금은 할 수 있는 거 같은데?”

치킨 레시피는 유재원이 빠삭하게 알고 있다.

생닭도 수경이네 집에서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고, 식용유도 현미유 공장 사장님으로부터 사올 수 있다.

이제는 염지를 하고, 튀기는 게 문제인데 지금은 전문적으로 조리할 수 있는 조리 시설도 있다.

기왕 치킨을 만드는 거 수백 마리 튀겨서 아이들과 함께 먹으면 오피스 프로그램 완성을 축하는 데 딱이다.

행동력이 좋은 유재원은 즉각 전화기 앞으로 가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헉! 버그를 다 잡으셨습니까?

실리콘밸리 팀, 전화기 너머로 프로젝트 매니저 마리오 로저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 네. 거긴 아직 컴파일 완료를 못 했나요?”

-예. 계속 오류를 잡고 있는데, A를 잡으면 B가 터지고, B를 잡으면 H와 Z가 터고 해서 미쳐버리겠습니다.

디버깅이란 원래 그런 거다. 애초에 코딩을 완료하고 워닝 0, 에러 0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니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하, 알고리즘 문제가 아니라 함수나 변수 철자가 문제였던 거예요. O와 0처럼 헛갈리는 문자가 원인이었죠.”

-예엣? 단순한 오타 때문에 나온 문제였단 말입니까?

“네, 오탈자를 다 잡아서 컴파일해보니 에러 제로였습니다. 프로그램 빌딩이 쉽게 완성되더군요. 일단 돌려 봤는데 딱히 큰 문제는 잡히지 않았네요.”

-그렇습니까? 아이고, 천만 다행입니다!

“통화를 마치는 대로 점검을 마친 소스코드를 업로드할 테니까, 그걸 가지고 빌드를 해서 내부 테스트를 시작하세요. 내부 테스트도 문제 없다면 공개 태스트로 전환하고요. 레밍턴 부사장이 그 방식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보스? 키보드 워리어 때의 그 방법 말씀하신 겁니까?

이번엔 레밍턴의 목소리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키보드 워리어의 폭발력은 지금 상상해도 전율이 일 정도였다. 미국 시장을 게임성 하나로 개척해버린 명작이다.

애써 준비한 유료 베타테스터의 리뷰 폭탄은 자체 폭발력에 휩쓸려 큰 반향도 없었다. 덕분에 후속타로 준비한 자발적 소문 마케팅이나 인터넷 키워드 점유 마케팅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피스 프로그램은 사무용 제품인지라 키보드 워리어 같은 폭발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러니 작년에 사용하지 못한 첨단의 마케팅 기법을 지금 마음껏 펼쳐 낼 때다.

“물론 인터넷이나 PC 통신 마케팅이 전부는 아닙니다. 전통적인 광고도 준비해주세요. 잡지는 물론이고 TV 광고까지 말입니다.”

시장 선점이 중요하다.

일찌감치 사람들의 인식에 오피스는 ID 오피스라는 고정 관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워드 파일하면 ID 오피스의 IDW라는 확장자가 딱 떠올라야 한다. 스프레드시트라 한다면 IDS고 프레젠테이션은 IDP다.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유재원이 보증할 만큼 확실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386과 VGA라는 고성능 부품을 요구하는 게 전부다. 게다가 이것도 1년 전이면 치명적 단점일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사양 부품의 대중화를 이끄는 킬러 타이틀 키보드 워리어 덕에 VGA 카드의 출하량이 수백만 장을 돌파했다. 386도 매달 백만 대 이상 팔리고 있다. 올해 486이 나오면 VGA 카드는 기본이고 이보다 더 높은 성능의 SVGA 카드가 널리 퍼질 것이다.

-그러면 유료 베타테스터부터 모집해야겠군요.

“예. 리포트를 많이 써야 하는 대학생들과 사무직 직종을 집중해서 뽑으세요. 보상책도 이들 직군이 원하는 것으로 하고요.”

-알겠습니다. 보스.

“아참, 그리고 컴퓨터 박람회 같은 행사가 있으면 참가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개최 예정인 행사가 있으면 찾아서 보내주세요.”

-컴퓨터 박람회라. 알겠습니다!

유재원은 레밍턴의 확답을 들으면서 전화를 종료했다.

북미 지역에 강력한 소매 유통망을 가진 일렉트로닉아츠가 있긴 했지만, 그건 게임 전문 유통망이었다.

오피스 프로그램을 구매할 사람 중에 일반 개인도 있겠지만, 주력은 기업과 관공서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에게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려면 뭔가 그럴듯한 타이틀이 있어야 하는데, 박람회 참가, 박람회에서 타이틀 수상 같은 게 있으면 좋다.

무슨 행사인지는 유재원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크고 화려한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명색이 거인을 잡아낼 무기를 발표하는 것인데, 최대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좋지 않겠는가.

“국내는 어떻게 하지?”

키보드 워리어처럼 북미에서 먼저 성공하면, 국내는 자동으로 따라올 거다. 그런데 북미에서 성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건 그냥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다.

“그럼 일단 대기업 투어부터 해야 하나?”

국내는 대기업에 납품만 하면 일은 술술 풀린다. 관공서를 따내는 것도 중요한데, 이쪽 건은 정치적으로 풀 일이라서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유재원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기업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자연스럽게 삼보 컴퓨터와 미래 그룹이 떠올랐다.

“일단 약속부터 잡아야지!”

최강욱 실장에게 회장님들과의 미팅 스케줄을 잡아 달라고 팩스를 보내는 유재원이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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