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자이언트 킬러 ==============================
#49-1
다음 날.
“비정기적으로 이렇게 내려와야 하는 거 귀찮지 않아요?”
유재원은 자신을 데리러 그랜저를 끌고 온 김대석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평소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오늘처럼 유재원의 이동 스케줄이 있으면 언제나 신속히 내려오는 김대석이었다.
“아이고! 하나도 귀찮지 않습니다.”
그랜저 뒷문을 열어주려고 내렸던 김대석은 양팔을 저으며 완강히 부정했다. 표정을 보니 곤란한 표정은 하나도 없었다.
“비서실장이 다니는 곳은 거의 일정해져서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가끔 고향처럼 친근한 덕진리에 내려오는 건 특별한 일이지요.”
최강욱의 발이 되어주는 건 이제 익숙해서 좀 지루할 정도였는데, 가끔 이렇게 장거리 운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말투와 표정을 보면 진심인 것 같았다.
“헤헤, 전 회장님 비서하곤 통화 좀 해봤어요?”
곧바로 이어진 유재원의 두 번째 질문에 김대석은 순간 당황했다.
“어? 음! 그, 그건!”
유재원은 약속을 분명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열심히 업무에 집중했던 김대석에게 약속대로 비서의 연락처를 구해서 줬다.
본인의 연애 사업은 시작도 못 하고 있지만, 남들을 이어주는 건 이렇게 열심이다. 하지만 연락처를 받는 게 유재원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쉽게 해줄 수 있었다.
왕회장님 전화번호로 전화를 넣으면 그 비서 누나가 제일 먼저 받는다. 겉은 어린데 속엔 너구리가 들어 있다는 유재원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겉만 보고는 경계심이 쉽게 풀린다.
비서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전화를 했을 때다.
전 회장님이 외출로 안 계신다고 하며 메모를 남겨드릴까요 하고 물어보자 바로 개인적인 질문을 날렸다.
사귀는 사람 있으시냐고 말이다. 무척이나 실례인 질문이고, 이 질문을 받은 비서 누나도 전화기 너머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대목에서 자기도 당황하면 분위기만 어색해진다는 걸 잘 아는 유재원은, 좋은 사람 있는 데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그런다고 곧바로 돌직구를 날렸다.
다행히 사귀는 사람은 없다는 대답이 나왔다. 유재원이 말한 좋은 사람에 대해서도 긍정의 반응이었다.
덕분에 회사 전화번호가 아니라 집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었고, 김대석에 대해서도 간단히 말해줬다.
하여튼, 지금 반응을 보니 제대로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모양이다. 아니, 통화는 제대로 해보기나 했을까?
“통화는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연락도 않고 있었다면, 비서 누나에게 남자 소개는커녕 연락처만 받고 튄 거짓말쟁이가 될 뻔했다.
“저는 언제라도 괜찮은데, 현지 씨는 바빠서 시간이 잘 나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건 사실일 거다.
왕회장님이 새벽부터 회사에 나와서 저녁 늦게 들어가는 건 유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데이트를 잡는 게 연애사업이다. 아마도 김대석이 전화에서 덜덜 떨어서 말을 제대로 못했거나, 뭔가 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조언이 떠올랐지만, 끝내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다.
자신은 전생도 그렇고, 회귀한 지금도 아직까진 솔로 인생을 살고 있다. 약속했던 대로 매칭까지 해줬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식은 유재원이 뭔가 말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자,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비서 누나 이야기를 왜 물어 보냐면 임원 운전기사를 더 뽑고, 비서실도 확대 개편을 하려고 하거든요. 지금까진 엉성하게 운영했으니, 이제는 조직부터 확실히 기반을 다져놓을 생각이에요. 임원마다 전담 기사도 두고요.”
ID 테크놀로지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ID 인베스트먼트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임원들이 할 일도 많아졌고, 자연스레 차를 사용할 일도 많아졌다. 자동차는 그냥 돈을 주고 사면 되는데, 운전기사를 배정하는 건 예우에 관한 문제라서 신중해야 했다.
앞으로 김대석도 지금처럼 여기저기 불려다니지 않고, 누군가의 전담이 생겨 1:1 마크로 붙어 있게 될 거다. 당연히 근무 여건이 훨씬 좋아진다.
다만 누구의 운전기사로 할지 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연애 사업이 잘되는지 물은 것이다.
잘되고 있다면 최강욱 전담 기사로 하려고 했다. 실패했다면 자신의 전담으로 쓸 생각이었다. 친하기도 하고, 말도 잘 통했으니 말이다. 물론, 출장이 뜸한 자신이니, 당분간은 부모님 전담이 될 거다.
그런데 연애사업이 잘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실패한 것도 아니면 애매해진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장님이 애써 연결해주셨지만, 현지 씨랑 잘 안돼도 그건 제 팔자니 말입니다.”
김대석은 유재원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똑 부러지는 대답을 해줬다.
“그래요? 본인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요."
"진짜 괜찬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석이 형은 제 전담이 되어주세요. 운전기사 신규 모집이 끝나면 곧바로 인수인계를 하시고 덕진리로 내려오세요. 집도 좋은 거로 잡아드릴게요. 대신 운전기사에서 제 수행비서로 보직도 바꿔 드리겠습니다.”
김대석을 자신의 전담 운전기사로 삼는 유재원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김대석은 뜻밖의 승진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그냥 승진도 아니고, 직책부터가 기사에서 비서로 바뀌는 거다. 게다가 사장인 유재원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중책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럼, 바로 서울로 올라갈까요?”
유재원을 뒷좌석에 태우고 신나게 운전석에 오른 김대석이 행선지를 물었다.
뭐지? 왜 갑자기 흥분할까?
어쨌든, 김대석이 좋아하는 걸 보니 유재원도 기분이 좋았다.
“아뇨. 수경이네 집 먼저 들려주세요.”
“네! 바로 모시겠습니다!”
김대석이 운전대를 잡고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리곤 막 가속 페달을 밟으려는데, 멈칫했다.
“어, 그런데 수경이네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긴, 수경이네하고 김대석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지만 이름만 딱 듣고 집 위치를 떠올리는 건 이장님과 같이 마당발을 가진 몇 사람만 가능한 일이었다.
내비게이션 같은 게 없었기에 유재원은 연습장에 약도를 그려주면서 위치를 찍어 주었다. 다행히 김대석은 덕진리의 작은 길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었기에, 약도를 보고 바로 알아보았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딩동!
수경이네 집에 도착한 유재원이 초인종을 눌렀다. 나란히 서 있는 김대석은 입이 떡 벌어졌다. 덕진리에 이런 좋은 집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재원이 왔느냐? 잠깐만 기다려라.
초인종을 누르자 몇 초의 텀도 없이 수경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왔다. 멀리서 거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수경이네 아버지가 직접 대문 앞까지 나와서 문을 열어주셨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여러 번 수경이네 집을 방문했던 유재원인데, 지금까지는 수경이네 어머니 아니면 수경이가 열어줬다. 수경이 아버지가 열어준 건 처음이었다.
“어서 오너라.”
막상 대면하니 어색한 티가 역력했나 보다.
“수경이 엄마랑 수경이는 교회에 갔단다.”
수경이 아버지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까지 해주셨다. 유재원도 꾸뻑 인사를 하면서 어색함을 풀었다.
“들어가자.”
유재원은 수경이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차에 남아 있으려는 김대석까지 눈치를 줘서 따라오게 했다. 앞으로 수행비서가 될 사람이니 지금부터 따라다니는 연습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셋은 거실에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테이블에는 유재원이 오기 전에 미리 다과를 세팅된 상태였다. 살짝 더워질 때이니만큼, 시원한 녹차에 고급스러운 버터 쿠키였다. 김대석을 위한 찻잔을 더 꺼내 오는 것으로 준비는 끝이다.
유재원은 일단 차부터 마셨고, 쿠키도 하나 해치웠다.
그 모습을 본 수경이 아버지는 속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작년 봄까지만 해도 유재원이란 아이는 그의 뇌리에 없었다. 그러다 여름부터 존재감을 인식했다. 그런데 존재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더니 지금은 상상 그 이상이다.
컴퓨터를 가지고 게임만 하는 수경이와 달리, 그걸로 대통령까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과를 내놓지 않았던가.
심지어 최근 만든 치킨이라는 건, 보통의 생각으로는 나올 수 없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닭과 돼지를 키운 지 거의 20년 정도 되었다. 하지만 도매업자에게 팔기만 했지, 그걸로 뭔가 만들어보겠다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치킨이라는 걸 먹어본 직후, 이걸로 뭔가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라면 모험을 회피하는 성격이라서, 상상만 해보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치킨이라는 아이템은 자기가 봐도 너무나 확실했다. 무엇보다 컴퓨터 하나로 대성공을 거둔 유재원이 만든 아이템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 대성공을 거둔 아이였다. 그러고도 다음 아이템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작은 성공에 안주하며 이때까지 왔다. 그런데 사그라졌던 열정이라는 게 유재원을 보고 다시 타올랐다.
마음을 되새기며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수경이 아버지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재원이 너를 부른 건 치킨 때문이란다.”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다.
이제는 수경이 아버지가 준비한 사업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크기인지 확인할 때다.
“그렇게나 많은 닭을 한 번에 사 간 건 처음이라서, 깜짝 놀랐지. 더 놀라운 건 그걸 하루에 다 먹을 수 있나 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는 거다.”
수경이 아버지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이라서 가능했다.
만약 삼계탕 같은 걸 했다면, 아이들은 반 정도는 남겼을 것이다. 게다가 콜라와 양배추 샐러드도 치킨의 흡입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퍽퍽한 가슴살이라도 콜라와 먹으면 꿀떡 넘어간다.
“덕진리에선 치킨 이야기가 한창이란다. 심지어 여주에도 마찬가지지.”
닭이 커서 1인 1닭을 완수한 아이는 별로 없었다. 남은 닭은 골고루 뿌려졌다. 마치 덕진리와 여주시를 상대로 거대한 시식회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해질 때 좀 식긴 했어도, 치킨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나에게 그 치킨을 어디서 구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수도 없이 많았다.”
아아.
수경이 아버지의 말을 듣다 보니 준비한 사업의 범위가 예상된다.
“치킨만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를 내면 무척이나 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딱 드는 거야.”
역시 가게 수준인 건가?
“그래서 말인데, 네가 만든 치킨 레시피를 나에게 팔지 않겠니? 지금 치킨 가게를 하겠다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아. 그래서 치킨 레시피를 통해 일종의 가맹점을 만들고, 그 가게에 우리 닭을 공급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단다. 일단은 여주시에 2개 정도 내주고 인근 도시에도 진출하고 말이다.”
오!
처음엔 실망했던 유재원이 뒤늦게 이어진 수경이 아버지의 말에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가맹점을 만들고 거기에 닭을 공급하겠다는 건 제법 현대적인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진짜요? 그러면 제 치킨 레시피의 가치는 얼마로 쳐 주실 건가요?”
“음, 그 점에 있어 고민이 많았다.”
수경이 아버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어제 유재원에게 전화하고 나서부터 저녁도 지나고, 새벽이 될 때까지 사업에 대해 고민했다. 특히 치킨 레시피의 가치에 대해서도 간과할 수 없었다.
관점에 따라 레시피의 가치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작게 보자면 이미 덕진 국민학교 급식실 조리사들은 상세한 레시피를 다 알고 있었다. 30년 전통의 손맛을 가진 국밥 할머니들이 맏며느리에게만 몰래 전수하는 식이 아니라, 조리실 아주머니들을 한데 모아놓고 다 함께 만들었다. 소스를 만드는 것부터, 조리 공정까지 다 알게 되었다.
그러니 유재원을 통하지 않고, 아주머니를 잘 구워삶으면 레시피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레시피의 가치는 하찮은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과 함께 놓고 보면 레시피의 가치는 한없이 높아진다.
유재원이란 존재는 쓰임새가 너무도 많았다. 이미 유명 인사다, 치킨의 오리지널 레시피를 만든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것으로 효과는 끝내줄 것이다. 게다가 정치권과 경제계에도 인맥이 좋으니, 사업에 어려움이 닥칠 때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네가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치킨 가맹점 사업 지분의 30%를 주겠다.”
유재원은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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