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안드로이드 비긴즈 ==============================
#53-1
“백업! 백업 파일은 무사해?”
터진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게이츠가 급히 되물었다. 그러나 알파 랩의 팀장은 물론이고 팀원들까지 누구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봐! 제임스! 백업 파일은 무사하냐고! 가장 최근 게 언제 거야?”
게이츠의 말에도 아무 대답이 없자 이번엔 스티브가 팀장을 콕 찍어서 물어봤다.
“어, 부사장님. 그게, 그러니까 최근에는 야근도 많았고…….”
“제임스! 최근 백업이 언제 날짜냐고!”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지는 제임스의 말을 싹둑 자른 스티브가 다시 한 번 압박했다. 얼굴은 어린데 주황색 수염이 가득했던 제임스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6월 3일입니다.”
“뭐? 6월, 3일?”
무려 한 달 전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개발실 정책은 매일 상시 백업하는 것이었고, 중요한 코드 같은 건 하드디스크에 저장과 동시에 디스켓에도 저장하도록 했다. 이걸로도 부족해서 특별한 서버를 만들어서 자동으로 백업하도록 설정했다. 하지만 특별한 서버도 원인 미상의 공격을 받아서 먹통이 된 상태였다.
만약 서버 운영체제가 유닉스였다면 유재원의 공격은 예상했던 것처럼 흐지부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서버 시장도 제패하겠다는 야심이 있었고, 그것이 윈도우 NT라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알파랩의 백업 서버는 자체 조립한 고성능 PC에 프로토타입 윈도우 NT를 올려 놓고 있었다.
물론 프로토타입 NT 시스템은 단순한 백업만 담당하는 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내부 통신망을 구성하는 진짜 서버는 유닉스가 탑재되어 있다. 프로토 타입이지만 백업 기능은 어제까지만 해도 잘 작동했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에 있던 결정적인 결함이 큰 화를 초래했다.
바로 도스 호환모드였다. 하위 버전과의 호환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이크로소프트였기에, 프로토타입에서도 도스 호환모드가 활성화 된 상태였다.
덕분에 도스용으로 설계되었던 유재원의 지뢰는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결국, 남은 백업파일은 디스켓으로 복사해 놓은, 물리적으로 분리된 백업 파일만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시점이 한 달 전인 6월분이었다.
매일 엄청난 분량의 설계와 코딩이 이뤄지는 만큼, 한 달 전이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옛날의 이야기였다.
“저기……. 최근에 ID 오피스의 리버스엔지니어링 임무에, 도스 4.0의 마무리 작업, 윈도우 3.0 기초 코딩이다 등등. 여러 가지 업무가 많이 내려와서…….”
제임스가 변명을 시도했다.
원래 알파 랩의 임무라는 건 윈도우 3.0의 설계와 제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ID 오피스의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해봐라부터, 도스 4.0의 메모리 관리 체계를 더 바꾸라는 지시까지 내려오니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더넷으로 연결된 서버가 무척이나 편리했다. 자기들이 만든 NT라는 운영체제는 제법 그럴듯하게 돌아갔으니 디스켓 백업이라는 원칙이 희미해졌다. 게다가 디스켓 백업은 하루 업무를 마무리할 때 하는 건데, 최근 한 달 동안 퇴근을 정시에 해본 기억이 없는 제임스였다.
“변명은 필요 없다!”
그러나 제임스의 변명에 돌아온 건 용암처럼 뜨거운 불호령이었다.
“자네들은 해고야!”
화가 머리끝까지 폭발한 게이츠는 유행어를 외쳤다.
해고한다는 보통 유행어가 아니다. 무려 TV쇼에 잠깐 나왔던 사업가를 미국의 대통령을 만들어준 말이었다.
다만 찰진 맛이 넘치는 원작과 달리, 부들부들 떠는 게이츠의 '해고야'는 격정적이었다.
신중하고 직원 친화적인 성격인 스티브도 지금만큼은 게이츠를 만류하지 못했다. 무려 한 달 치 업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제임스를 비롯한 팀원들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가 너무도 커 게이츠의 해고를 만류하지 않은 스티브다.
유재원의 지뢰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한 달 치 작업은 물론이고, 정예 개발팀이었던 알파 랩까지 날려 버렸다.
신이 들어준 것처럼 유재원의 기도가 완벽히 이뤄졌다.
며칠 후.
-마이크로소프트가 요즘 시끌시끌합니다.
“호오?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개발팀 하나를 해체했다네요. 게다가 보통 개발팀도 아니고, 개발 경력이 7, 8년쯤 되는 최정예에다가 30명쯤 되는 마이크로소프트 최고, 최대의 개발팀인데 죄다 해고했다는군요.
한국시각으로 새벽 6시.
가끔 레밍턴에게 실리콘밸리의 상황을 보고받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실리콘밸리의 동정이 아닌 북쪽으로 한참 올라간 시애틀 레드먼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매설했던 지뢰가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개발팀 하나가 완전히 해체될 정도라면, 스플레시 데미지가 엄청나게 들어갔다는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깨소금 맛이었다.
난리가 난 마이크로소프트를 생각하니 고소하고 짭짤했다. 그러면서도 유재원은 뒷일은 걱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리버스엔지니어링은 불법이었다. 유재원에게 항의한다면 그건 자신들이 불법을 저질렀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법 알기를 우습게 아는 마이크로소프트라도 자신의 불법을 외부에 알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 시애틀까진 상당히 먼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 거예요?”
-에헴!
유재원의 물음에 레밍턴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처럼 으스댔다.
-제가 이래 봬도 한때, 전국구 탐정으로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주요 도시엔 아직도 소식을 전해주는 뻐꾸기들, 아니 정보통들이 있죠.
“오, 그렇군요.”
정보통이라.
솔깃한 소리였다. 레밍턴이 가진 정보통 덕에 유재원은 덕진리 방구석에 앉아서 편안하게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의 동정을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식으로 운영되는 건 아니죠?”
-아, 예. 뭐, 이전에 쌓아둔 친분 덕에 해주는 거죠.
“그러면, 이번 기회에 아예 정식으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정보통 중에 레밍턴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직접 고용해서 정보를 수집해 보내주는 거예요.”
-오! 진심입니까?
솔깃하다는 레밍턴의 표정이 절로 그려진다.
실제로도 실리콘밸리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들고 있는 레밍턴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처럼 일이 없어진 옛 친구들에게 좋은 직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신 무작정 마구 늘릴 수는 없어요. 예산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탐정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IT업계에 대한 동향이면 충분하거든요. 이번 마이크로소프트의 사례처럼 특정 기업의 동정이라던가, 최신 기술 파악, 원하는 아이템의 수색 같은 업무가 될 거예요.”
-그럼요. 문제없습니다.
레밍턴도 곧잘 대답했다. 자칭 전직 전국구 탐정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모든 도시에 정보통이 깔린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진짜 믿을 만한 녀석은 얼마 없으니 유재원의 지시에 따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ID 오피스에 대해 약간의 수정이 있어요. 마이크로소프트가 예고했던 어깃장을 돌파할 방법을 찾았거든요. 로저스에게 개발팀원들을 다시 작업 모드로 갖춰 달라고 해요. 아참! 이번에 레드먼드에서 해고된 개발자 중에 스카우트할 사람이 있으면 데려오고요.”
지뢰가 기대 이상으로 크게 터졌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개발팀 하나가 해체되기도 했다니, 유능한 개발자들에 대해 욕심이 난 유재원이다.
-알겠습니다, 보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레밍턴과의 통화를 끝낸 유재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유재원의 집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하다.
스케줄이 없는 부모님도 집에서 계셨고, 한국통신에서 ISDN 모뎀의 설치를 위해 두 사람이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여기에 유재원도 있으니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으로 인해 작은 집이 들썩였다.
한국통신에서 나온 이들은 보통 직원도 아니고, 무려 첨단통신기술 연구원들이었다.
21세기엔 외주로 돌리는 통신망 설치업무였는데, 지금은 철통 보안을 지켜야 할 만큼 최신 기술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덕진리라는 허름한 시골까지 내려가야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덕진리에 내려오고 난 다음에 뭔가 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밤중에 비가 왔던지라 보통 시골이라면 흙탕물이 흥건했을 텐데, 덕진리는 잘 포장된 도로가 깔려 있어서 깨끗했다. 심지어 도로 옆에는 깔끔하게 정비된 배수로가 있어 흙탕물이 막히지 않고 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을 안쪽에 자리한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상부의 지시가 이해가 되는 연구원들이었다. 하교 후, 바로 집으로 달려와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유재원을 보고 나서다. 정보통신과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몰라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케텔이라는 PC 통신도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유재원이 사업적으로 이룬 성공에 대해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케텔에서도 전문가 이상의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여러 사람을 도와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둘 중 하나는 유재원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아저씨가 마린보이였어요?”
마린보이라는 무척이나 간단한 아이디를 사용하는 이는 추명석이란 연구원으로 30대 중반이었다. 아이디의 유례도 간단해서 해병대 출신이라고 마린보이란다.
“응. 네가 인디?”
인피니트드림이라는 비슷한 수준의 아이디를 쓰는 유재원이었다. 그런데 장문을 타자할 때 귀찮다고 단어를 줄임여쓰는 게 미래에서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요즘은 케텔에서는 유재원의 아이디에서 앞글자를 따서 인디라고 불렀다.
“저번에 고마웠어. 네 덕에 속도 향상이 컸다.”
마린보이에게 전해 준 노하우는 인터넷 속도 향상법이었다.
최신의 통신기술을 다루는 연구원이다 보니 당연히 인터넷도 사용할 줄 아는 추명석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접속하면 다운로드 속도가 더 느려졌다. 기본 세팅이 안정성을 위해 패킷마다 오류검출용 데이터를 훨씬 많이 담아지도록 해놨던 탓이다.
오류 검출용 데이터는 줄이고, 일반 데이터를 최대한 담을 수 있게 설정하면 인터넷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물론 모뎀의 물리적 한계 속도를 넘을 순 없지만, 유의미한 속도의 향상이 있다.
추명석은 자신의 컴퓨터 세팅을 바꾸는 것은 물론, 연구실의 컴퓨터 세팅도 바꿔서 상사로부터 칭찬도 듬뿍 들었다. 덕분에 유재원에 대한 호감이 무척이나 컸다.
다른 연구원은 이재정이란 사람인데, 추명석과 비슷한 나이였다. 둘 다 외모도 비슷해서 귀를 가리는 장발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다. 조그만 CRT 모니터 화면을 계속 보고 있으니 눈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유재원도 둘의 안경 쓴 모습을 보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모니터에 보안경을 씌워 놓긴 했지만, 프로그래밍을 할 때 가끔 눈도 풀어주는 운동도 꼬박꼬박 해서 안경을 쓰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설치할 컴퓨터가 저거니?”
작은 집에 컴퓨터가 두 대나 있다.
하나는 부모님이 사주신 286 컴퓨터였고, 다른 한 대는 인텔에서 보내준 본체에 유재원이 추가적인 부품을 사서 맞춘 최신 컴퓨터였다.
덩치의 차이도 상당했다.
데스크톱 형태의 본체에 작은 모니터가 있는 286과 달리 인텔에서 보내준 컴퓨터는 엄청나게 큰 빅타워 형태의 본체였고, 모니터도 14인치나 된다. 스피커도 오디오용 북쉘 모니터 스피커에다가 앰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덩치가 2배는 커졌다. 추명석도 커다란 컴퓨터를 가리키며 물었고 유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곧장 ISDN 설치에 들어갔다.
전용선이 아니라 전화선을 쓰는 거라서 뭔가 까다로운 선로 매설 작업은 할 필요가 없었다. 집으로 들어온 전화선을 두 갈래로 분리해서 하나는 전화기에 하나는 ISDN 모뎀에 연결하면 끝이다.
모뎀에 어댑터를 꽂아 전원을 넣고, 모뎀과 컴퓨터는 이더넷 카드로 연결하면 하드웨어의 세팅은 끝이다.
“그럼 부팅을 해보자.”
이재정의 말에 유재원은 작업용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부팅에도 순서가 있었다. 모니터를 켜고, 컴퓨터 본체의 전원을 켜고, 앰프를 켜고, 맨 마지막에 스피커에 전원을 넣는다. 부품마다 전원을 다 따로 연결해줘야 해서, 6구짜리 콘센트를 사야 했다.
덕분에 마을 공사가 한창일 때, 집에 전기 공사도 했다.
집 안의 전선을 크고 굵은 것으로 바꿔 높은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했다.
유재원의 집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전기선로를 바꿨다. 마을 복지의 일환이다. 전기 테이프로 대충 감아 놓은 전선 때문에 감전 사고가 나거나. 누전으로 불이 나는 걸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우와! 486이네!”
“응? 진짜로?”
두 연구원은 전원을 켤 때 나온 바이오스 포스팅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CPU 종류를 띄워주는 문구에서 i486-DX33이라는 게 떡 보였으니 말이다. 메모리 테스트를 할 때도 4,096KB라는 게 나타나자 까무러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연구하는 자신들의 컴퓨터도 386이었다. 메모리도 1메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직 한국엔 정식 발매조차 안 된 486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인텔에서 먼저 써보라고 보내준 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유재원이 더 대단해 보이는 두 연구원이다.
“일단 케텔부터 접속해볼까?”
지금 정식으로 PC 통신 서비스를 하는 건 케텔이 유일했다. ISDN으로 접속할 수 있는 디지털 통신망도 케텔뿐이었다.
“응? 프로그램이 좀 다르네?”
보통 케텔 접속은 모뎀 제조사가 만든 터미널 프로그램을 쓴다. 하지만 유재원은 좀 다르다. C 언어를 통해 간단한 터미널 접속용 프로그램을 자작했다. 직접 한글화를 하고, Z 모뎀 같은 최신의 프로토콜도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쓰던 프로그램이 아니라서 당황하는 두 연구원이다. 하지만 설정 화면으로 유재원이 직접 들어가니, 익숙한 환경 변수들이 나왔다. 여기에서 속도를 정하고 사용할 프로토콜 등을 골라주면 된다.
모든 세팅을 끝냈다. 이제 실전이다.
컴퓨터 앞에 모인 이들은 곧바로 ISDN 전용 번호로 전화를 걸어 연결을 시도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연참 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