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93화 (93/1,007)

[93] 제국의 역습 ==============================

#59-1

똑똑똑!

-사장님, 엘런입니다.

때마침 미국 법무실장인 엘런이 플래그쉽 스토어 사무실로 도착했다. 엘런이 변호사증을 제시하니 안나 요원의 얼굴에 조바심이 한층 올라왔다.

“그렇군요.”

유재원의 설명을 들은 엘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이해했다. 영장이 오면 해제한 암호를 줘서 용의자의 다이어리를 열람해줄 거라는 대목에선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장님의 선택은 최선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듬직한 대답이다.

“그래요. 엘런 법무실장이 잘 처리해주세요.”

이걸로 유재원이 이 자리에서 할 일은 없다. 안나 요원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만 뻥긋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 잘했던 그녀였지만, 변호사가 있는 자리라서 말조심이 절로 되는 거다.

“그럼, 이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유재원은 손을 탁탁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과 바늘처럼 레밍턴도 따라붙었다.

엘런은 듬직한 미소로 유재원과 레밍턴을 배웅해주었다. 그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안나 요원이 안타깝긴 했다. 하지만 유재원은 그녀에게 더는 해줄 말은 없었다.

“보스, 다시 봤습니다.”

사무실 뒷문으로 나와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 레밍턴이 유재원에게 엄지를 척 올려주었다.

“예? 뭐가요?”

“컴퓨터만 잘하시는 줄 알았더니, 처음 FBI를 상대하는 사람이 변호사도 없이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하는 건 처음일 겁니다.”

“다들 이 정도는 하지 않나요?”

“천만에요. FBI 배지가 눈앞에 척 들어오면 몸이 바싹 얼어버립니다. 게다가 두 요원은 자기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마치 우리가 마치 살인자를 풀어주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보스처럼 중심을 잡고 있는 건 어려운 일이죠.”

레밍턴의 칭찬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덤으로 레밍턴은 FBI에 대한 호감이 바닥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유재원도 레밍턴의 말처럼 이런 상황이 처음이면 FBI에게 휩쓸려 불법적인 협조를 했을 거다. 하지만 전생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삶에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선의로 협조했는데, 그게 나중에 자신을 발목을 잡았다. 지금처럼 영장을 받아 놓은 것도 아니라서 선의였다는 걸 증명하지도 못했다. 그때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날 지경이다.

“비행기는 그만 태워주세요. 상식적으로 따져보니 간단하더라고요. 용의자는 용의자일 뿐이니,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면 안 되는 거죠.”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아니고 다른 나라였다면, 모르겠네요.”

스키너 요원들이 영장을 가지러 간 건 미국이 법치국가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군사정권 밑에 있는 한국처럼, 법률보다 더 강한 힘들이 작동하는 나라였다면 이런 식의 대응은 하기 힘들었을 거다.

대통령과 같은 힘 있는 사람 말 한마디로 만사형통이었고, 유재원도 대통령의 호감 덕에 사업에서 혜택을 보는 중이다. 그러니 대통령의 심기를 깨뜨리면 불이익을 받을 건 감수해야 하는 거다. 게다가 대통령 말고도 목에 힘주는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지금이야, 성장 중이니 잠자코 보고 있는 거겠지만, ID 테크놀로지가 통통히 살이 올랐다고 생각되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댈지 모른다.

포식자가 될 때까지 예술적인 줄타기로 위기를 넘기면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나마 미국에서 존재감이 커지면 한국의 권력자들이 멋대로 하긴 힘들어질 거다.

주차장에 도착한 레밍턴이 검은색으로 번쩍거리는 링컨 콘티넨털 자동차로 유재원을 안내했다. 미국 지사 역시 의전용 자동차로 벤츠를 보유하고 있는데, 지금은 부모님에게 배정된 상태라서 개인 차로 나온 것이다.

“링컨 콘티넨털, 좋은 차네요!”

“보스 덕에 부담 없이 뽑았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외부 일정은 끝이니, 이제 부모님이 계신 호텔로 가야죠.”

플래그쉽 스토어 오픈 행사에 엉뚱한 사건이 끼어들긴 했지만, 미국 일정에는 차질이 없었다. 스토어 오픈은 성공이고, 이제는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된다. 덤으로 조금 전 생각한 해킹 대회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다듬으면서 말이다.

-노숙자 연쇄 살인마 검거!

-FBI의 첨단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의 승리!

-결정적 단서는 범인의 컴퓨터! 잔혹한 소설과 게임이 가득!

이틀 후.

룸서비스로 온 신문의 머리기사였다.

기사 제목으로 알 수 있듯, 스키너는 수색영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엘런은 영장을 꼼꼼히 검토한 후에 암호가 적힌 쪽지를 주었다. 그런데 그때가 강제연행 만료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다행히 다이어리에서 범행에 관한 명확한 증거가 나오면서 용의자는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기사를 열심히 읽어 보니 FBI가 최신으로 도입한 프로파일링 기법에 대한 칭찬이 반이었다.

“뭐야? 게임과 소설이라니.”

그런데 기사의 내용이 어째 좀 낯이 익다. 흉악범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에 꼭 죄 없는 문화 콘텐츠를 대입시키는 거다.

게임과 소설은 이때부터 동네북이었던 모양이다.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잡았으면, 프로파일링 기법을 칭송하면 되는 거지, 어떻게 별 상관도 없는 게임과 소설을 집어넣을 수 있나. 그것도 보통 신문도 아니고 LA 타임스에 올라온 기사였다.

그나마 다행은 키보드 워리어라는 구체적인 게임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거다.

교육용 게임이라는 신기원을 연 소프트웨어였지만, 걸고넘어지면 얼마든 연관될 수 있었다. 적들이 좀비이긴 해도 폭발하면서 오체분시가 되기도 하고, 사용자의 공격에 따라 피가 튀기도 했다.

기사에는 분명 의도가 보였다. 범인을 잡은 FBI의 공은 한없이 치켜세우고, 저런 비인간적인 연쇄 살인마가 만들어진 이유로 잔혹한 콘텐츠 탓으로 돌리는 거다. 사회나 환경, 인간관계 같은 걸 분석하긴 어렵고 따분하니, 자극적인 면만 강조하는 기사가 많았다.

“아무래도 선수를 쳐야 할 것 같은데.”

기사를 본 유재원은 즉각 레밍턴에게 전화했다.

-레밍턴입니다.

“부사장님, 저예요.”

-예, 보스! 무슨 일입니까?

“LA타임스 기사 보셨어요? 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기사를 좀 내야겠어요.”

FBI가 범인을 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은 ID 테크놀로지가 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기사가 필요하다. 게임에 부록처럼 딸린 일기장임에도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FBI도 풀지 못할 만큼 어려운 암호가 적용되었다는 걸 알려주는 거다.

이와 함께 FBI가 제시한 수색영장을 통해 ID 테크놀로지가 협조해서 범인의 검거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는 것도 먼저 알려준다. 덤으로 ID 오피스에는 이보다 훨씬 강력한 암호 체계가 담겨 있어서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도 절대 풀지 못할 거라는 장담도 담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문도 기업이 원하는 내용만 담긴 기사를 올려주는지는 모르겠다. 기자 정신이 제대로 든 기자들로 운영되는 신문이라면, 어려울 거다. 하지만 FBI가 잘나가는 게 보기 싫은 기자도 있을 거고, 수사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궁금해하는 자들도 있을 테니 이런 성향의 기자를 만나서 잘 이야기하면 신문에 기사가 날 수도 있다.

“어그로가 많이 끌리면 좋겠다.”

기사의 핵심은 FBI도 뚫지 못한 키보드 워리어의 암호였다. 그리고 ID 오피스에는 그보다 몇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암호 체계가 있으니 아무리 위대한 해커라도 뚫지 못한다고 자부했다.

보통 이렇게 장담했다가 보기 좋게 털리는 건 많이 있는 일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걸 해보겠다고 나서는 해커들도 많을 거다.

기사도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언론 플레이라고 느낄 만큼 많이 뿌려 놓는다. 이렇게 어그로를 잔뜩 끌어 놓고 사상 최대의 상금을 건 해킹 대회 이벤트를 발표하는 거다!

“흐흐. 재미있겠네.”

음모를 꾸미는 흑막의 주인공처럼 흐뭇한 웃음을 날리는 유재원이다.

미국 여행은 즐거웠다.

특히 인상적인 건 스탠퍼드 대학교였다. 무슨 학교가 하나의 도시처럼 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고, 미국에서는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게 스탠퍼드 대학교였다.

넓이가 3,300헥타르로 여의도의 11배! 서울 송파구와 비슷한 면적이다. 걸어서 캠퍼스를 돌아보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스탠퍼드 투어를 할 때도 마가리라는 교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게다가 면적만 넓은 게 아니다. 그 넓은 면적에 학교 건물도 알차게 들어서 있었고, 조경도 잘 되어 있어서 리조트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붉은색 지붕에 연황색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과 야자수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보기 좋게 심어진 것이 잘 어울렸다. 방학 기간이라서 학생들이 얼마 없긴 했지만, 그래도 활기차 보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건 로댕의 작품들이 조각 정원이나 메인쿼드 입구, 도서관 등 여러 곳에 널려 있었다는 거다.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들 같은 엄청난 작품이 무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의 명문대는 하버드나 예일 정도만 인지하고 계셨던 부모님도 직접 캠퍼스를 돌아보기도 하고, 실리콘밸리에서 그 영향력을 직접 체감하니 확실히 달라지셨다.

나중에 스탠퍼드 대학으로 진학하겠다고 하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대학교냐고, 서울대로 가라고 강권하실 일은 없을 것 같다.

이후 일정도 순조로웠다.

FBI의 일이 액막이가 된 것처럼, 사소한 사고도 없이 순조로웠다.

스탠퍼드 투어를 시작으로 골든브릿지와 골든 게이트 휴양지 같은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도 보았다.

다음엔 LA로 넘어가서, 디즈니 랜드도 가보고 LA다저스 경기도 직관했다. 아는 선수는 없었지만, 보는 재미는 충분했다. 야구 리그로는 세계 최고의 역사를 가진 메이저리그다 보니 경기의 수준은 이보다 높을 수가 없었다.

특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메이저리그에 열광하셨다.

두 분은 한국에서 고교 야구가 흥행했던 시절부터 야구를 줄곧 보셨던 야구광이었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출범한 다음에도 직접 경기장엔 가보지 못하고, 텔레비전으로만 보셨다. 경기장은 멀리 있었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이 바빴던 탓이다.

두 분 역시 유재원처럼 메이저리그 선수 중에 아는 분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야구의 룰은 잘 알고 계셨기에 경기를 즐기기엔 문제없었다.

선수들의 사인도 많이 받았다.

작년 LA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로렐 허샤이저,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같은 거물급 선수들부터 토미 라소다 감독의 사인까지 받았다. 이걸 다 모으면 89년 LA다저스 선수들 사인북이라고 명명해도 될 것이다.

일부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는 건 쉽지만, 모두에게 받는 건 어려운 일인데 엄청나게 비싼 VIP 티켓이라서 가능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그랜드캐니언 투어였다.

유명한 뷰포인트에 가서 보는 것도 좋았지만, 헬리콥터 여러 대를 빌려서 나눠 타고 협곡을 비행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장구한 시간이 만든 예술작품에 직접 들어가는 느낌이라서 장엄한 감동이 밀려왔다.

다만 여행을 마치는 날, 총비용을 결산했을 땐 그 감동이 살짝 흔들렸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부모님과 친척들 다 해서 12명이 넘는 단체 여행이었고, 숙박이나 식사, 체험활동 등등을 모두 최상급으로 했으니 비용이 불어나는 건 당연했다. 유재원은 자신보다 금전 감각이 훨씬

타이트한 부모님께는 절대 보여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화로운 미국 여행을 마치고 유재원과 부모님들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건 8월 22일이다. 비행기에 오르는 날에는 쇼핑만 했다.

부모님과 친척분들은 지인들에게 돌릴 기념품을 주로 구매했다. 유재원은 본인의 특기와 적성에 맞는 컴퓨터 부품이었다.

이렇게 성공적인 미국행을 마무리하고 한국 김포국제공항으로 돌아온 건 23일이었다.

유재원의 귀국 이후, 며칠간은 잠잠했다. 그러다 세계가 깜짝 놀랄 빅이벤트가 갑자기 터진 건 26일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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