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99화 (99/1,007)

[99]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2

○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10월 초.

ID 테크놀로지는 안드로이드 알파 판매금지 신청에 대한 정식 재판을 시작할 준비는 다 끝났다.

그런데도 재판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

서면 공방 중에 마이크로소프트 측에서 준비 부족을 이유로 재판 시작 날짜를 미뤄달라고 했고, 법원은 그 요청을 받아줬기 때문이다.

재판을 지지부진하게 기약 없이 길게 끌고 가는 게 마이크로소프트의 특기였다. 이번에도 그게 발동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미국인들의 생경한 반응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수뇌들이 적잖이 당황했다는 풍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소송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ID 테크놀로지를 대박 한두 개 터트린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기업쯤으로 보았다. 그것도 오너가 외국인인 특이한 기업 말이다.

후- 하고 바람을 불면 날아갈 것같이 작은 기업이고, 외국 기업이라는 크나큰 약점도 있다고 판단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계산은 외국 기업이 신종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미국의 기업 이익을 크게 침해했다. 보수적인 법원은 법적인 요건을 따져봐야 할 사안이긴 하지만 약간 무리를 둬서라도 미국 기업의 손을 들어 줄 거라고 판단했다.

실제 가처분 결정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계산 대로 나왔다. 그런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건 미국인, 아니 세계인의 반응이었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수준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점점 악의 축처럼 변해서 모든 이들의 손가락질을 한 몸으로 받는 중이었다.

명문대학과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탄원하는 서류가 1만 개를 돌파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행태를 고발하는 제보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IT 종사자만 알고 민간인들은 모르고 있던 것들이 기사로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기사를 본 다른 피해자들이 또 증언을 올리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측에겐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ID 테크놀로지를 가볍게 봤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유재원과 레밍턴, 엘런의 체계적 대응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다가왔다.

유재원은 미국 언론은 아니지만,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용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1천만 달러 상금이 걸린 시큐리티 챌린지를 두고 한국 언론과 했던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

만에 하나 ID 오피스의 암호가 뚫린다더라도, 망신이라는 생각은 없다. 본인을 능가할 인재를 ‘1천만 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채용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했다. 그 기사는 연합통신사를 타고 미국에도 전해졌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행태와는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렇지만,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도 있으니, 사람의 원래 속성은 줬다 빼앗아 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점이다. 특히 공짜라고 생각했던 안드로이드 알파 대신 60달러짜리 MS-DOS를 사야 하는 사용자 입장에선 절로 욕이 나올 상황이다.

물론 안드로이드 알파에는 복사 금지 장치도 없고, 시리얼 번호를 넣는 것도 없으니 친구들에게 복사해 달라고 하거나, 사설 BBS 자료실에서 받으면 그만이지만, 이전까진 합법이었던 것이 갑자기 불법으로 바뀌면 달가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기업마저도 ID 테크놀로지와 함께 대(對)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전선을 펴려고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재원도 급한 건 없었다. 미국이 세계 정부도 아니었으니, 판매 금지 처분은 그저 미국땅에서만 통용되는 판결이었다. 캐나다와 남미, 유럽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는 얼마든지 배포할 수 있었다.

ID 테크놀로지의 경영진은 이 기회에 유럽과 아시아 공략에 집중하기로 했다. 미국과 비교하면 공략이 덜 된 새로운 시장이지만, 이번 소송 이야기는 유럽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만한 이슈였다.

안드로이드 알파와 ID 오피스의 이름값은 순식간에 세계구급으로 치솟았기에,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횟수가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높아졌다.

유럽 공략은 레밍턴 부사장이 맡기로 했고, 아시아는 당연히 유재원의 몫이었다.

유재원에게 아시아라고 하면 21세기의 거대한 시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인 중국에, 매년 놀라운 성장률을 보이는 동아시아 나라들, 선진국 진입의 막차를 탄 한국과 아시아 최대 경제 대국인 일본.

어마어마한 시장이었다.

21세기 경제 분쟁은 대부분 아시아 지역, 정확히는 중국을 두고 생겨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89년인 지금 안드로이드 알파와 ID 오피스가 진출할만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대만 정도에 불과했다.

중국은 아직도 죽의 장막 안에 웅크린 상태였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최신 컴퓨터를 굴릴 여력이 없을 만큼, 경제력이 약했다. 대만이나 한국이 그나마 나았고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니

한국, 대만과 일본 중 선택한다면 일본을 선택하는 게 상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본 시장은 선진국치곤 너무도 폐쇄적이라서 쉽게 뚫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일본에서 대중화된 컴퓨터는 IBM 호환 기종이 아니라 PC-98 시리즈였다. NEC가 만든 16 BIT 컴퓨터였는데, 구조는 IBM 호환 기종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CPU는 인텔의 칩을 쓰지만, CPU와 주변기기를 연결하는 규격이 C버스라는 독자적인 확장 카드 버스를 사용했다.

세계 표준과 다른 독자적인 걸 좋아하는 갈라파고스의 나라 일본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스템이 PC-98 시리즈였다.

대중화된 PC-98는 적당한 속도에, 화사한 색감과 음질 좋은 FM 사운드가 기본인 PC였다. 그런데 해상도도 좋고 색도 풍부한데, 결정적인 단점이 있으니, 처리 속도였다. 화면 전환이 느려서 액션 게임은 부적합했다.

일본에 미연시 게임이나 삼국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많은 것도, 화면 전환이 느린 PC-98 시리즈의 스펙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만도 문제가 있다. 바로 한자를 사용한다는 거다. ID 오피스에서 한자를 지원하긴 하도 상용한자 1,800자에 불과해서 대만어를 지원하는 건 아직 무리였다.

일본이나 대만, 중국 등 한자문화권인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게 ‘언어 입력기’였다.

문자가 복잡해 키보드 하나에 담기 어려운 나라의 말은 소리 나는 대로 알파벳을 이용해 입력하면 된다. 그러면 컴퓨터가 한자나 일본어, 기타 문자 등으로 바꿔주는 시스템이다. 보통은 끝말까지 다 입력해야 하는데, 유재원이 생각하는 입력기는 앞의 한두 글자만 입력하면 뒤에 단어도 알아서 추천해주는 현대적인 언어 입력기를 생각하고 있다.

언어 입력기는 맞춤법 검사기와 함께 ID 오피스 2.0의 핵심 기능 중 하나로 기획한 기능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안드로이드 1.0에도 탑재해서 아시아 시장 공략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장 아시아에서 ID 테크놀로지가 공략을 시작할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한국 공략의 시작점은 당연히 삼보 컴퓨터였다.

유재원에게 삼보컴퓨터는 동맹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파트너였다. 게다가 삼보의 회장님과 부사장님은 유재원에게 큰 호감이 있었다.

삼보에서도 미국에서 ID 테크놀로지의 행보가 워낙 눈에 띄다 보니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팅 신청을 하니 곧바로 약속 날짜가 잡혔다.

10월 2일.

유럽 수출 건으로 출장을 나가신 이용태 회장님을 대신해서, 이용권 부사장이 삼보 컴퓨터 본사에서 유재원을 맞이했다.

“어서 와라.”

이용권이 아들의 베스트프랜드를 맞이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유재원을 불렀다. 본인의 집에 초대까지 했던 마당이었으니, 친밀도는 한층 올랐다고 자부해도 된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뭐, 이게 환대씩이나 되나. 오히려 우리가 영광이지. 미국에서 위명이 자자한 ID 테크놀로지의 사장님이 직접 방문해주셨으니 말이다.”

이용권은 ID 테크놀로지의 미국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삼보컴퓨터도 미국 지사가 있었고, 지사를 통해 미국의 최신 뉴스는 팩스나 전화로 받아 보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일전을 벌이고 있는 ID 테크놀로지의 이야기가 빠지는 건 삼보 컴퓨터 미국 지사가 직무 유기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삼보의 미국지사장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한국의 언론이 대충 보도했던 것만 본 사람보다 훨씬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용권 부사장은 유재원을 위해 직접 내린 원두커피와 쿠키를 준비했다. 저번에 자신의 집에 초대했을 때, 유재원이 커피를 잘 마셨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분쟁이었다.

이용권 부사장이 큰 흐름은 다 알고 있었기에, 설명은 필요 없었다. 소송에 대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으로 이용권의 호기심은 상당 부분 해소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폴&스미스라니 대단하네.”

특히 이용권 부사장이 감탄한 건 소송 변호인단으로 폴&스미스 법무법인과 계약을 했다는 대목이었다.

소송의 나라 미국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미국에는 변호사가 많다. 당연하게도 변호사들이 모인 법무법인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많은 법무법인 중에 제대로 실력을 인정받아 크나큰 명성을 쌓은 곳도 있었다.

미국 동부에 크레인&슈미트 법무법인이 있다면, 서부에는 폴&스미스 법무법인이다. 특히 서부의 폴&스미스 법무법인은 실리콘밸리의 열풍과 함께 최신 기술에 대한 이해가 높고, 기업 간 분쟁에서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단점이라면 이름값만큼 비싼 수임료였다. 삼보컴퓨터도 미국에서 소송을 고려할 때, 폴&스미스 법무법인을 생각했지만, 비싸서 의뢰하진 못했다.

“저도 생각보다 비싸서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이번 소송은 ID 테크놀로지의 승리가 확정된 상태로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소송에서 이기면, 소송에 들어간 비용을 모조리 상대에게 청구할 수 있으니 부담 없었어요.”

폴&스미스 법무법인 변호사들과 엘런이 정리하고 있는 데이터를 보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억지를 반박할 증거들이 차고 넘쳤다.

안드로이드 알파로 ID 테크놀로지가 얻은 직접 수익은 20만 달러에 불과했다. 광고슬롯 20개를 개당 1만 달러에 팔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파가 만들어낸 부가 가치는 6천만 달러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알파와 경쟁을 위해 MS-DOS 4.0의 가격이 40달러 깎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는 40달러의 손해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선 40달러를 절약했고, 그만큼 다른 일을 위해 소비할 수 있었다.

40달러는 게임 소프트웨어 하나를 사기에 충분했고, 정보통신 분야에 소모하지 않더라도 질 좋은 외식을 한 번 하거나, 푸짐한 장을 봐올 수 있는 거다. 이뿐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알파를 통해 많은 게임 개발사,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매출 증진 효과를 보았다.

추상적인 효과들이 데이터로 정리되자,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보였다. 물론 이것도 억지라고 하면 억지이긴 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6천만 달러 손해라는 헛소리보다는 훨씬 객관적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리처드 스톨먼이 시작한 탄원서도 1만 장을 넘어섰다. 전문가와 대학생들의 서명이 담긴 탄원서는 법정에서 판사들에게 강력한 압력을 행사해 줄 거다.

여기에 마지막 비밀병기인 제임스 어거스틴이 있다.

미국 법원이 보수적이고 기득권의 손을 들어준 적이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재판이 좀 길어질 수 있지만,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다. 재판 비용뿐만이 아니라 판매 금지 가처분으로 인한 손실과 위자료까지 톡톡히 털어낼 작정이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우리는 돈을 뜯어내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 사건에서 현실적으로 배상금 이상을 받아낼 수 있는 거니?”

“그럼요!”

유재원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치유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줄 작정이었다. 그래서 연계하고 있는 곳이 디지털리서치와 긴밀히 연락 중이다.

최초의 개인용 운영체제이고 DOS의 모태가 된 CP/M을 만든 개리 킬달이 설립한 회사였다.

게이츠가 80년대부터 PC 시장의 황제가 되었다면 이전 70년대엔 개리 킬달의 시대였다. 세계 최초의 BIOS를 만들었고, CP/M(Control Program/Monitor)이라는 운영체제까지 만들어 70년대를 평정했다.

그런 개리 킬달의 패착은 IBM에 OS 공급 계약을 거부했던 것이었고, 개리 킬달이 거부했던 IBM을 잡은 건 마이크로소프트였다.

개리 킬달의 디지털리서치가 바로 DR-DOS를 만든 회사였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특수한 코드를 사용해 공정경쟁에서 배제한 운영체제이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MS-DOS 4.0을 통해 ID 오피스에도 같은 수법을 사용했지만, 이제 막 나온 신제품이라서 피해의 규모는 추산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DR-DOS는 몇 년 전부터 나온 운영체제였기에 그 피해액은 엄청났다.

징벌적 피해보상 제도가 있는 미국은, 귀책사유가 분명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의 벌금과 보상금액이 만들어진다.

디지털리서치와 손을 잡아서 마이크로소프트가 파산할 정도의 배상금을 받아내 끝장을 내버리는 게 유재원의 목포였다.

“그래서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뭐니? 안드로이드 알파를 기본 채용해달라는 거?”

이용권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에 호의적인 마음은 별로 없었다.

삼보 컴퓨터도 마이크로소프트에 맺힌 게 많았다. 완제품 컴퓨터 업체인 만큼, 시장에 나가는 컴퓨터에는 운영체제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즉, MS-DOS를 매년 수만 장, 많을 땐 10만 장 이상을 팔아주는 회사가 삼보 컴퓨터였다.

최근엔 유럽에서 대량 주문을 수주해서 열심히 공장을 돌리고 있다. 생산 분량이 늘어났으니, MS-DOS의 구매 숫자도 늘어났다.

대량 구매이니 할인을 바라는 것도 당연했는데, 그 수치가 기대 이하였다. 단적으로 앞에 있는 유재원은 기본이 10%였고, 더 많이 구매하면 20에서 30%까지 대폭 할인해주었던 반면, 한국 마이크로소프트는 한 자리 숫자에 불과했다. 그것도 해주네 마네 하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었다.

삼보 컴퓨터도 당연히 안드로이드 알파를 가지고 테스트를 해보는 중이다. 한글판의 경우 영문판보다 조금 느리긴 했다. 한글판은 한 글자를 표현하는 데, 2바이트가 소요되어서 영문판과 비교해 처리 능력이 2배로 필요한 탓이다.

한글 문자세트를 메모리에 계속 띄워놓고 있어야 해서 영문판보다 메모리 소모도 좀 크다. 하지만 일반인이 사용하는 대다수 프로그램은 잘 돌아간다. 게다가 리본 인터페이스라는 그래픽 화면은 새카만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 하나를 두고 직접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도스보다 훨씬 편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좋지요!”

“그래. 우리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문제가 좀 있다.”

문제라니?

안드로이드 알파에 어마어마한 호환성 문제가 생기면 진작 알려졌을 거다. 하지만 알파는 아직 그런 문제 보고가 없었다.

“응용 프로그램 문제라면 해당 소프트웨어 회사가 해결해줘야 할 일이지요. 그거 말고는 자잘한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실리콘밸리 개발팀이 열심히 버전 업 작업을 하고 있어요. 게다가 저렴하잖아요. 이 정도면 그냥 도입하시는 게 삼보에도 큰 이익일 텐데요?”

“네 말이 맞다.”

무엇보다 알파는 MS-DOS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게 큰 장점이다.

애드웨어 형태로 사용자에겐 공짜로 주어지는 안드로이드 알파지만, 컴퓨터 완제품 업체까지 그렇게 제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업체가 생산하는 제품에 경쟁사 광고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컴퓨터 완제품 업체는 광고 기능이 제거된 순수한 안드로이드 알파를 개당 9.9달러, 한국 돈으로 6,700원에 공급받을 수 있다. 대신 사용자에게 주는 패키지와 매뉴얼은 모두 완제품 업체가 알아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용 중 문제가 생긴 고객과의 AS나 문의 전화도 완제품 업체 책임이다. MS-DOS에 비해 해야 할 게 무척이나 많다. 하지만 9.9달러라는 획기적인 가격은 이러한 번거로움을 모두 감수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컴팩이나 델과 같은 미국의 완제품 컴퓨터 업체와도 구체적인 이야기되는 중이었다.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 때문에 순간 주춤하긴 해도 협상이 깨진 건 아니다. 그만큼 알파라는 제품에 매력은 엄청났다.

“지금 우리 공장에서 출하되는 제품 중에 VGA 카드와 하드 디스크가 동시에 장착된 컴퓨터 비율이 얼마인지 아니?”

이용권 부사장의 말에 유재원은 무엇이 문제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대충 VGA 장착 비율을 헤아려 보았다.

정부에서 올해 학교에 보급하는 컴퓨터의 성능을 286에 VGA를 기본으로 설정했다. 그러니 학구열이 높으신 부모님들도 비슷한 급으로 장만을 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는 유재원이다. 그러면 삼보 컴퓨터에서 가정용 컴퓨터의 비중을 따지면 근삿값이 나온다.

“30%쯤 되지 않으려나요?”

“10%. 주력 제품은 아직도 XT고, VGA는커녕 하드 디스크가 설치되지 않은 컴퓨터도 많단다.”

“아이고. 큰일이네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다 보니, 컴퓨터의 스펙도 미국 기준이 되었던 유재원이다.

286을 넘어서 386이 대중화된 나라가 미국이었고, 하드디스크도 보편적으로 보급된 상태였다. 반면 한국은 아직 베이비스텝을 떼고 있는 단계에 불과했다.

안드로이드 알파도 XT에도 설치되긴 한다. 대신 세 가지 필수적인 부품을 요구하는데, 그게 VGA 카드와 하드디스크, 1메가 램이었다.

디스켓만 사용해서 부트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무리라고 판단했다. 도스로 부트하는 거라면 로딩속도가 그다지 길지는 않는다. 반면 리본 인터페이스 구성을 위한 그 많은 그래픽 리소스를 다 읽어야 하는 알파는 한 세월이다.

“후후. 그런 고급 기종은 한 달에 기껏 해봐야 몇백대 수준이거든. 미국에서 수백만 장씩 팔아 치우는 너에겐 성에 차지 않는 분량이지.”

“괜찮아요. 시작이 중요한 거죠. 우리나라라고 언제까지 XT만 팔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나중에 집집마다 컴퓨터가 한 대씩은 있어야 하는 시대도 올 테니, 지금부터 착실히 지분을 넓혀 놔야죠.”

이용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유재원이 성공만 하다 보니 낙관적인 성격이 됐나 보다 싶었다. XT가 조만간 퇴출당하긴 할 테지만, 그건 몇 년 후의 일이었고 지금은 쌩쌩 돌아가는 현역이었다. 게다가 집집마다 컴퓨터가 한 대씩 보유할 거라는 전망은 장밋빛을 넘어선 것이었다.

어쨌든, 소량이긴 해도 만족한다니 안드로이드 알파의 도입은 확정하기로 한 이용권이다. 계약서도 쓰고, 계약금도 그 자리에서 내주었다.

그렇지만 아직 유재원의 용무는 끝나지 않았다.

“아, 혹시 컴퓨터 주문 제작 의뢰도 받으시나요?”

“물론이지. 고성능 제품에 한정하고 있지만.”

이용권은 유재원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삼보는 완제품 전문이긴 했지만, 고성능 PC의 경우엔 주문자가 원하는 스펙을 맞춰 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유재원의 주문 제작 주문은 처음이었다. ID 테크놀로지가 386 컴퓨터 몇 대를 완제품으로 구매한 적은 있었지만, 특정 스펙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인텔 486에 4메가 램, 최신형 VGA 카드, 80메가 하드 디스크, PCM 사운드카드. VGA 지원 컬러 14인치 모니터.”

유재원의 입에서 스펙이 나올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용권 부사장이다. 하나하나가 끔찍하다고 할 만큼 비싸디 비싼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486은 부르는 게 값이었고, 4메가 램 역시 마찬가지다. 80메가 하드 디스크도 헉 소리가 나올 만큼 비싸다.

다 합치면 수백만 원은 거뜬히 넘는 가격이다.

“일단 40대, 주문할게요.”

“헉!”

이용권 부사장의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척이나 고스펙 컴퓨터라서 한 대를 만들어도 남는 게 많은 장사였다. 그런데 한 대도 아니다. 무려 40대다. 억 단위 주문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의 주문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대신 이렇게 생긴 컴퓨터로 만들어 주세요. 금형 비용이나 개조 비용은 따로 드릴게요.”

주머니 안쪽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이용권에게 전해줬다.

이렇게 생긴 컴퓨터라니?

컴퓨터의 형태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었던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종이를 펼쳐 봤다.

“뭐지? 텔레비전이니?”

“아뇨, 컴퓨터에요. 일체형 컴퓨터.”

유재원의 설명을 들었으면서도 이용권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엔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디자인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어제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저는 날이 날인지라, 글 쓰기 난이도가 최고였네요. 덕분에 연참 행진도 아깝게 끊기고 말았습니다. ㅠㅠ.

2017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무리 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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