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디지털 혁명(Digital 革命) ==============================
#66-2
개장한 지 한 시간.
쏟아져 들어오는 관람객과 바이어 그리고 매스컴 기자들을 맞이해서 ID 테크놀로지의 부스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부스 안은 제법 정리가 된 모습이었다. 부스를 운영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오는 경험을 몇 번이고 치렀던 플래그쉽 스토어의 에이스들이었기에, 혼란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냈다.
부스 방문객에게 커다란 종이가방과 사은품을 담아서 나눠주는 일도 동시에 이뤄졌다. 대형 종이가방을 준비한 곳은 ID 테크놀로지 하나뿐이라서, 이걸 받은 이들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 거대한 컴덱스 행사장이 ID 테크놀로지의 이름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어휴, 겨우 풀려났네요. 우리도 한 바퀴 돌아봐요.”
개장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쉬지 않고 했던 유재원이었다.
비즈니스 데이라고 관계자에게만 개방되는 날이 있으면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아직 행사의 진행이 그 정도로 세련된 상태는 아니었다.
컴퓨터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려면, 그냥 일반 관람객처럼 이리저리 섞여서 돌아봐야 했다.
신기한 게 많았다.
다만 유재원의 마음에 쏙 드는 신제품은 없었다. LCD를 채용한 노트북도 몇 개 보였지만, 해상도가 매우 낮았고, 단색이었다. 결정적으로 잔상도 너무 심했다. 완전 문서 작업이나 스프레드시트 전용이다.
심지어 덩치도 컸다. 두꺼운 국어 대사전처럼 크고 무거웠다. 그나마 CPU도 386 SX인데, 그마저도 1~2시간 구동하는 게 전부였다. 모바일 전용 칩이라는 게 없어서, 부품들이 전기를 정말 잘 먹었기 때문이다.
반면 배터리의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게만 3kg짜리 배터리 팩을 쓰는데도 3시간을 버티면 많이 버틴 거다.
“어휴, 모바일 분야는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21세기 초에 나왔던 울트라북 정도는 되어야 들고 다닐만 할 텐데, 언제 그때가 되기를 기다리나. 차라리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기술발전에 유재원 본인이 직접 뛰어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터리, 모바일 칩, 카메라, 가속도, GPS 등등의 초소형 센서와 모바일 통신 모뎀 등등. 아직 산업적으로 발전이 미진한 분야는 너무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컴덱스에 실망만 한 건 아니다.
유재원의 눈이 번쩍 뜨이는 제품도 있었으니, 스캐너와 프린터였다.
무려 32비트 컬러로 사진을 디지털로 바꿔주는 스캐너가 떡하니 나타났다. 어디서 만들었나 봤더니 일본의 샤프였다.
“일본이구나.”
8, 90년대 일본의 전자회사 기술력은 세계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스캐너 말고도 어른 손보다 조금 큰 크기의 전자사전이나 전자수첩도 제법 완성도가 있었다.
컬러 프린터는 테크토닉이라는 미국 벤처기업의 제품이다. 인쇄 방식은 3색 잉크를 사용하는 잉크젯 프린터였다.
특수 코팅이 된 인화지를 이용하면, 사진과 같은 퀄리티의 출력물이 나온다고 자랑하는데, 조명이 약한 행사장 안에서 보니 그렇게 보이는 거고, 밝은 데로 나가면 사진과 비교하기엔 해상도가 좀 떨어진다. 그래도 24핀 도트 프린터에 비하면 속도와 컬러, 해상도 비교할 것 없이 잉크젯 프린터의 압승이다.
물론 기술력이 좋다고 해서 히트작이 되는 건 아니다.
32비트 컬러 스캐너의 가격은 4천 달러. 테크토닉 컬러 잉크젯 프린터의 1만3천 달러였다.
프린터 가격이 웬만한 자동차 가격이 된 건, 프린터를 제어하기 위해서 워크스테이션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시리얼 포트나, 프린터 포트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전용 규격 케이블을 썼다고 한다.
테크토닉이라는 회사는 21세기에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시 일찍 망하는 회사들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재원은 샤프에서 스캐너를 3대 구매했다. 2대는 미국 개발팀이 쓰고, 한 대는 한국으로 가져와 사용하기 위함이다.
이후 유재원은 인텔과 IBM도 돌아보았고, 한창 전쟁 중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부스도 가 보았다. 유재원과 레밍턴의 등장에 마이크로소프트 부스 관계자가 깜짝 놀란 듯해서, 다른 곳보다 2배는 더 길게 머물면서 제품들을 살펴봤다.
도스 4.0이 주력이었고, 차기 윈도우에 대한 이미지 홍보도 진행 중이지만, 왠지 의기소침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드로이드 알파와 직접적인 경쟁이 붙었고, 심각하게 밀리고 있는 탓이다.
프리웨어 버전의 안드로이드 알파는 배포 금지 상태였지만, ID 오피스에 동봉된 광고 삭제 버전인 안드로이드 알파는 문제없이 유통 중이다.
이를 통해 안드로이드 알파와 도스 4.0은 직접적인 비교를 받고 있는데, 하드웨어를 제대로 다뤄야 하는 전문가들 말고는 도스 4.0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게다가 ID 오피스를 견제하기 위해 넣은 메모리관리 기능은 문제가 많았다.
ID 오피스에만 오작동을 일으켜야 하는데, 다른 프로그램까지 잡았다. 프로그램 개발사들은 MS-DOS의 강화된 메모리 관리 기능은 쓰지 않는 게 좋다는 공식 답변이 나올 정도였다.
그나마 체면치레를 하는 건 맥 PC용 MS 오피스 1.0이다.
도스용 워드와 엑셀을 맥 PC의 그래픽 운영체제용으로 만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이름값도 있고, 겉으로 보기엔 ID 오피스와 비슷해 보여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중이다. 하지만 동적 오브젝트 기능이나 데이터 처리 속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서, 두 가지 프로그램을 동시에 사용한 사람은 MS 오피스를 혹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여튼 마이크로소프트의 부스는 기존의 제품이 다였다.
“신제품은 없나요?”
ID 테크놀로지와 직접 붙게 될 컴덱스에 옛날 무기만 가져오지 않을 거다. 그런데 보여주지 않으니 부스의 책임자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책임자는 곤욕스러운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 유재원처럼 첫날은 감춰뒀다가 높은 사람이 와서 프레젠테이션한 후에 부스에 공개할 모양이다.
실무진을 닦달해봐야 나올 건 없었기에, 꾸뻑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와서 컴덱스 투어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아주 익숙한 상표를 찾을 수 있었다.
“와! 일성이다!”
구석진 자리였지만, 일성 전자의 부스도 있었다. 전시된 제품은 완제품 컴퓨터였는데, 무려 486 컴퓨터였다. 딱딱 각이 진 커다란 본체 위에, 똑같이 각진 모니터를 올린 데스크톱 컴퓨터다.
먼 땅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발견하니 기분이 뭔가 묘했다. 반갑기도 하고, 경계심도 조금 들었다.
다른 한국 회사들은 해외 진출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때에, 일성은 작은 규모이긴 해도 컴덱스에 부스까지 냈으니 제법 빠른 속도였다.
덕분에 평범할 게 없는 일성 전자 부스에 들어가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다. 유재원은 친하게 나왔는데도, 일성 전자 직원은 무척이나 경계하는 태도였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행사장 투어를 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제품은 그 자리에서 사들이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다가왔다.
ID 테크놀로지의 콘퍼런스가 시작할 시간이다.
“MGM 콘퍼런스장이라니 너무 거창한 장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우리 회사의 저력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입니다.”
최강욱 비서실장이 MGM 그랜드 호텔 행사장에 모인 구름 관중을 보며 반성했다. 수백 명이 들어와도 될 만큼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해졌던 탓이다. 1시간 전만 하더라도 빈자리가 90%는 되었는데, 행사 시작 3분 전인 지금 빈자리는커녕, 서 있을 공간도 얼마 없었다.
“흐흐, 시큐리티 챌린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지 않고는 못 배기죠.”
유재원의 장담이었고,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ID 테크놀로지가 발표한 MGM 콘퍼런스의 주제는 바로 ‘AES 256, 완전 해부와 보너스 한 가지’였기 때문이다.
AES 256은 시큐리티 챌린지에 참가한 수백만에 달하는 도전자의 거센 도전을 받는 ID 오피스의 암호화 알고리즘 이름이었다.
1천만 달러의 상금과 유명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들은 사소한 비밀 하나를 알고자 혈안이었고, 그 비밀을 ID 오피스의 제작자인 유재원이 직접 설명해주겠다고 했으니 벌떼처럼 몰려오는 건 당연했다.
매스컴이나 경쟁사 관계자들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 나올지 궁금해했지만, 큰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ID 오피스가 대히트를 칠 수 있었던 저력이 AES 256인데, 이걸 공개해 자충수를 둘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거다.
유재원의 배포를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6시 정각이 되자, 행사장 안의 조명이 약해졌고 무대 위만 밝아졌다.
-ID 테크놀로지의 오너 겸 사장이자, 이그제큐티브 디벨로퍼(총괄 개발자) 유재원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상큼한 목소리의 행사장 내 아나운서 맨트가 나왔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의 입구로 향했고, 그곳에 말끔한 차림의 유재원이 있었다.
수백 명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니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전교 회장으로서 아침 조회를 할 때마다 지휘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 부담감을 쉽게 떨쳐냈다.
힘찬 걸음으로 무대 가운데로 가서 섰다.
그 모습이 무대 뒤 커다란 스크린에 나타났다.
무대 앞에 있는 카메라맨과 프로젝터 연결해서 만들어진 화면이다. UHD는커녕 HD도 낯선 시대였으니 화질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하지만 라이브 스크린 하나로 콘퍼런스의 생동감이 확 살아났다.
특히 뒤늦게 와서 맨 뒤에 있는 사람들도 스크린에 걸린 유재원의 모습을 보고는 갖가지 반응을 냈다.
오~하는 탄성을 내는 사람도 있었고, 진짜 재가 사장 맞느냐고 주변이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시큐리티 챌린지에 참여한 이들일 확률이 높다. 이들은 AES 256을 깨기 위해 갖은 연구와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면 AES 256을 만든 사람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했고, 찾아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다가 유재원의 모습과 나이를 보고 놀라던 경험은 최소 한 번은 있다.
그렇다고 이 행사장에 시큐리티 챌린지에 참여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잖은 이들은 레밍턴만 알지 유재원은 그냥 이름만 들어본 수준이었다.
더구나 사전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도 유재원의 실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으로 봤을 때와는 그 느낌이 확실히 다를 것이다.
다행히 여기 있는 사람들의 눈에 유재원이 마냥 어리게만 보진 않았다.
무대에 서기 위해 정장에도 공을 들였고, 헤어스타일에도 신경을 쓴 덕이다. 유재원의 나이를 아는 최강욱도 지금 모습이 본래의 나이보다 3, 4살은 더 있어 보인다고 했다.
“안녕하십니까? ID 테크놀러지 사장 유재원입니다. 한국 이름이라 발음하기 힘든 분은 ‘제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무대 중앙으로 나온 유재원은 완벽한 미국식 영어로 깔끔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웅성거림이 가득했던 행사장도 유재원의 맨트가 시작되자 행사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카리스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대장악력 하나는 확실했다.
유재원은 그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나갔다.
“지금 저의 모습만 보고, 프로그래밍 실력은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을 테지만, 잠시 후면 누구나 부정하지 못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자리에서 직접 코드를 짜면서 AES 256의 소스코드를 공개해드릴 거니까요.”
폭탄선언이다.
처음엔 유재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눈만 껌벅이다가 순간 다 함께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물론 유재원은 이런 반응 하나 듣자고 소스코드를 공개하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미국 연방정부였다.
연방정부는 사무용 시스템으로 ID 오피스를 채용하고 싶다고 정식 제의했는데, 그 조건이 소스코드의 제공이었다. 소스코드를 보고 백도어가 있는지, 다른 위험성은 없는지 검토한 다음 대대적으로 도입하겠다는 거다.
전생에 중국이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애플에 소스코드를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구글과 애플은 소스를 제공하는 것을 선택했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놓치는 건 큰 손해였기 때문이다.
유재원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요청에 올 것이 왔다 생각하며 기꺼이 제공하기로 했다. ID 오피스에는 백도어도 없었으니 켕길 이유도 없었고, 미국 연방정부가 사용하면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만에 하나 미국 연방정부가 소스코드를 유출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아내면 그만이다. 대신 기왕 소스코드를 제공하는 김에 AES 256은 아예 특허로 등록하기로 했다.
미국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신청했다. 기술 특허는 구조 자체를 공개하는 것이라서, 특허로 등록되면 누구나 그 기술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AES 256 기술을 원하는 IT기업은 수도 없이 많을 거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할수록 높은 보안수준을 유지하는 건 필수이니 말이다. 그 기업에 AES 256을 비싼 가격에 라이센스로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큰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AES 256 기술이 소스코드를 안다고 해킹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스코드를 아는 것 만으로, 암호화가 끝난 파일을 원래의 파일로 돌릴 수는 없다. 복호화를 위해선 무조건 암호화를 할 때 사용한 암호키가 있어야 한다. 암호를 건 본인이라도 암호키를 잃어버리면 그 데이터는 영영 복구할 수 없다.
AES 256의 소스 공개에 이러한 속사정과 ID 테크놀로지의 비즈니스 전략이 있다는 걸 한순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저 유재원의 폭탄선언에 깜짝 놀라는 게 전부였다.
“아, 소스코드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기 전에, 이번 일을 도와줄 제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유재원의 맨트가 끝나자, 새로운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입구에 나타났다.
거기엔 레밍턴 부사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는 움찔했다. 그리곤 곧 두 손으로 카트를 밀면서 유재원에게 다가왔다.
카트에 실려 있는 건 보라색 벨벳으로 덮여 있어서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겉으로 드러난 건 네모난 상자처럼 모양이 잡혀 있었다.
유재원이 있는 무대 가까이 올수록 기대감을 끌어 올리는 음악 소리가 점차 강해졌다.
긴장감을 주는 음악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무대의 메인스크린에도 카트에 담겨 있는 물건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리허설을 통해 타이밍을 익혔던 유재원은, 박자에 맞춰 카트 앞으로 왔고, 벨벳 천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신개념 올인원 PC 에그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이후 세상에 일체형 PC의 새로운 기준이 될 에그가 드디어 그 찬란한 자태를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2017년의 마지막 연재네요.
돌아보니 정말 다사다난 했던 해였습니다.
독자님도 고생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저도 올해 마무리 잘 하고 새해에 돌아오겠습니다~!!